(
찬 523장)
사람은 곤혹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책임 추궁을 당할 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변명을 사용하고 싶어하는데요, 그러나 이런 변명은 잠시의 소나기를 피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변명보다는 차라리 인정과 수용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의 변명과 하나님의 평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 때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그 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타락했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이것은 뭐를 암시하죠? 홍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사울 인생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이 일 때문에 근심하며 온 밤을 부르짖였는데, 정작 사울 본인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고, 사무엘을 만나자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완수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럼 내 귀에 들리는 양과 소의 소리는 무슨 소리냐? 왜 이것을 살려왔느냐”고 추궁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변명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인데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좋은 소와 양을 골라 온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즉 그건 백성이 한 일이지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거죠.

이 사울의 말은 누가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어요. 왜냐하면 정말 사울이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면 길갈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20킬로는 더 가까운 기럇여아림으로 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멜에서 길갈까지는 족히 100킬로 미터는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런 먼 거리를 가축 떼를 이끌고 이동했다는 것은 그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지않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뻔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할 때 처럼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엄숙히 전합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작은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시고, 왕의 길로 보내셔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고 왔나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요, 이 말은 사무엘상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구절이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보고 평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21~22) 함께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두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반복해서 죄를 부인하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위를 빼앗아 다시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의 핵심을 짚어주었는데요. 그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수많은 제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제사는 순종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자 이게 오늘 말씀의 내용인데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을까요?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길 원하실까요?
첫번째, 변명은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자기가 전쟁을 이끄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수하들의 군사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변명했습니다. 그 변명은 알고 보면 자기 합리화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울이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 좋은 가축들을 다 죽이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솔직히 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빕니다“라고 했다면 그는 분명이 용서받았을 것이요, 그의 가문도 멸족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813)에 보세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속죄의 약속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길 원하실까요?

두번째 (17)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는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스스로 낮아지면 높아질 만큼 공간이 커짐을 가르쳐 주신다고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Z8CHPQWXGo

사울이 겸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블레셋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반면 다윗을 보세요. 그가 끝까지 하나님께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언약(David’s Covenant)’를 통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요? 결국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사울은 변명했고, 다윗은 솔직히 시인하고 침상을 띄우는 회개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 둘은 이스라엘의 왕인데, 모두 다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자기 칼에 엎드려 죽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에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결과의 차이는 결국 겸손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뭔가요?
당신은 사울왕이 되려고 하십니? 자신도 모르게, 아니면 다윗왕처럼 살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다 되는 게 아니라 절대로 선택하면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왕의 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변명보다 수용을, 교만보다 겸손의 길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찬 365장)

인생을 살다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울 역시 그러한 순간에 맞닥뜨렸습니다. 그가 맞서야 될 블레셋 군대는 너무나 강력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불순종을 선택함으로써 믿음을 지키는 데 실패하게 되는데요.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다스린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블레셋 위협에 대응해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소집된 군사의 수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이 된 후 첫 번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전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7절)까지 내용을 보면 사울은 상비군을 3천 명 두었는데 그중에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나머지 천 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보냅니다. 요나단이 군대를 데리고 블레셋의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자 블레셋이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주둔하던 길갈에 모여 싸움을 준비했는데 수적으로 열쇠가 너무 극심했습니다.
5절에 보면 블레셋의 군대 규모를 볼 수 있는데요. “병거가 3만(전차가 3만대), 마병이 6천(말을 타는 기병이 6천), 백성은 해변에 모래같이 많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대규모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 온 것입니다.
싸우기 위해 모인 백성은 블레의 군대 위용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굴과 수풀 바위틈과 웅덩이에 숨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길갈 진영에 남았습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큰 일을 목도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단 말입니다.

(8~9절)까지는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무엘이 길갈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이레를 기다리라고 했고 사울은 그의 말을 따라 급박한 가운데서도 이레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도착이 지체되자 백성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칭 제사장이 되어 번제를 번재를 드리고 맙니다. 이 상황만 보면 사울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마저 드는 대목입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울은 그 모든 상황에서 순종보다는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패하면 패하리라 또는 죽으면 죽으리라 이런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때인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10~11절) 섣부른 변명을 하는 사울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오늘 공교롭게도 사울이 번제를 바친 바로 그때 사무엘이 도착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고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왜 그랬는지를 해명하게 되는데요. 백성은 겁을 먹고 흩어지고 사무엘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고 블레셋의 공격은 임박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번죄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 상황 윤리를 적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란 무엇일까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각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맞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신속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이 사울의 상황 논리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3RBHWXVKg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진리는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상황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 순종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끝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지하고

융통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도우시리라는 그릇된 믿음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길을 여쭙고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상황 윤리가 아니라 주님의 절대적 진리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도 적용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융통성은 순종이 아닙니다.

융통성을 하나님 말씀 앞에 발휘하지 않게 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순종하며 주님께서 나아가실 때 우리의 길을 여시고 복된 삶을 펼쳐줄 것을 믿습니다.
오늘 또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91장)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성장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수직상승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지속성장을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울을 왕으로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우리가 살아갈 때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나름 정직하게 하는데도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살아가야 할까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시작하는 첫 번째 왕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미스바는 창세기에서 야곱과 라반이 화친의 조약을 맺은 곳이며, 사사 시대에는 백성들의 총회가 열려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거나, 집회를 통해 회개하였던 공적인 장소입니다.

오늘 나라의 중대사인 왕이 선출되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백성이 모였습니다. 왕을 선출하기 전에 사사인 사무엘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압제하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모든 나라의 손에서 구원하신 분이신데, 너희가 그 왕대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달라고 해서 오늘 이날을 맞이한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다분히 인간적인 의도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죠.

드디어 왕을 선출하는 방식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제비뽑기였습니다. 결국, 12지파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에서 마드리 가족이 뽑혔고, 그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울은 짐 보따리 사이에 숨어버려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울이 단상에 올라왔을 때는 온 백성이 왕의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사울은 키가 훤칠하고,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세우며 두 가지를 확실히 했습니다. 그가 뽑힌 이유는 첫째, 그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셨다. 둘째, 그는 모든 백성보다 출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국가 방위와 통치에 적격자임을 공표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부르면서 사울은 이스라엘 왕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앞서서 언급했던 왕정 제도의 헌법을 백성들에게 공표하여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런데 왕이 된 사울은 왕궁이 아닌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아직 이스라엘이 사사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에는 사울이 왕으로 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으로 남겼고, 사울은 그들의 저항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깨닫고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첫 번째 핵심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왕이셨고,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여 따로 왕을 세우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패역입니다. 동기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이요, 물질과 생활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주인 되고, 물질이 주인 되고, 사람이나 우상이 주인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우리의 생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완성된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백성도 품으셨고,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요청대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욕구대로 사는 삶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가를 깨우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내 욕구와 욕망대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종종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왜죠? 그것을 통해 아픔을 겪겠지만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가 아파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내 고통은 말씀의 순종에 온 것입니까? 인간적인 선택 때문에 온 고통입니까? 중요한 것은 아픔이 온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오늘도 진리를 깨닫고, 복된 삶을 깨닫고, 아름다운 인생을 향하여 재조정하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핵심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창 49장의 예언에 의하면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에서 뽑아 세우셨습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께서 미스한 것입니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사울을 뽑으셨다는 것이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음 유다 지파에 왕을 세우실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충성하고 지키면 되는 것이죠. 그러다 유다 지파에 왕을 세우시면 박수쳐주고 물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어 사울이 망쳐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정통 이스라엘 지파의 혈통에서 선택하지 않으셨고, 이방 민족의 혈통에서 뽑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자, 은혜로운 결정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괜히 유대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그 모양, 그 위치,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 누구나 큰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고, 큰 사업을 하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부르심의 목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길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중요한 것은 몇 달란트를 맡겼느냐가 아니라, 그 맡은 것을 얼마나 충성되게 감당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 선택에 감사하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감당하면 그것이 승리요, 성공이자, 가장 멋진 일입니다.

오늘 남을 시기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충성합시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갑시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 인생에 다른 것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합시다.

이것이 가장 인생을 잘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잘사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펼쳐지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Dd5-KcN-vE&t=6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사울 왕을 뽑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희도 선택하여 세상에서 뽑아내셨습니다. 사울에게 역할과 사명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같은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정해주신 경계 안에서 충성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며, 즐겁게 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성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여 귀한 일에 쓰임 받는 주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찬 458장)

모든 만남에는 뜻이 있습니다. 특히 성도의 만남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가 있습니다.
오늘은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내용입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오랜 시간 헤매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하시고 사무엘과의 만남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만남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찾아올 것을 말씀해 주셨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고 깊은 대화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먼저 (15~16절) 보면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은 우연히 보여지는 사건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기 24시간 전부터 사울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음 날 사울를 만날 것을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냐민 출신의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오직 당신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이미 하나님을 버려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절망에 빠진 그들을 구원할 왕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왕으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복되게 사는 비결입니다.

 이어서 (17~24절)까지 보면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줄 선견자를 찾았지만 선견자 사무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하나님은 확실하게 그가 하나님이 정한 사람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과 같이 대우합니다.
사무엘은 미리 초청해 놓은 많은 손님들 가운데서도 오직 사울에게 상석을 내주고 요리인을 통해 미리 준비해 놓은 최고의 음식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왕이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렸던 지도자의 권한이 끝나고 그의 아들들도 사사로서의 모든 권세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전심으로 새롭게 세워질 왕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모습은 그가 리더십으로 있으면서도 개인적 사리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순전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외적으로는 백성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결국 백성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과 봉사의 자리에서마저 서로의 영향력을 놓고 다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회이 보여준 순전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당신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살아온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 성실하고 순종적이며 겸손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데다 키도 훤칠하고 출중한 가문 출신의 자제였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을 봤을 때 외모로나 외적인 조건이나 성품으로 봤을 때는 훌륭한 왕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은 그렇게 믿음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그의 부족한 신앙 부분이 드러나게 될 텐데요.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미래의 왕에게 최선의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은 사사로운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 일처럼 행하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만남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시고 바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무 일처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을 통해서 그 만남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겼던 사무엘처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정을 세우게 하시고 사업장과 직장을 세우게 하시고 다음 세대를 세우게 하시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충성된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찬 516장)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왕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경우도 있고, 물질이나 사람, 성공이나 부유함을 왕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왕을 버리고 거짓 왕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행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나이많아 늙었고, 어느날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었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불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5)에 보면 진짜 왕을 요구한 이유가 나오는데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도 되고 싶다는 것이죠. 그들도 이방나라처럼 인간 왕을 세워, 통치를 받고 싶고, 전쟁에도 이기려면 왕이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7)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돌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 졌을 것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두가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은혜를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들이 ‘인간 왕을 요구한 것은 국가 위기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변 나라들을 막아주셔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망각해 갔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방어력으로 블레셋을 제압하고 있었다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다 사무엘은 점점 늙어가고, 그 아들들은 패역하니 불안과 염려가 백성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를 누렸는데, 그 평화가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고, 은혜를 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적) 사람들은 형통과 평안을 원하는데, 실제로 평안과 형통이 오면 불안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문제가 해결된 평안한 상태를 원하는데, 놀이터의 시소가 한 쪽 올라가면 상대쪽이 내려가듯이, 평안과 형통이 오면, 그때는 영적으로는 침륜에 빠지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또 실제로 형통하고 평안하면 기도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많아지게 되죠.

 

(잠언 30)에 보면 아굴의 기도가 나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7~9)

부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혹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잘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가난한 것이 훨씬 더 큰 복이요,
장수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보다, 경건하게 단명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것입니다.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이 왕을 구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요? 주변 나라들이 왕을 세워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그들은 세상에 속한 나라들이 잘 되는 것 같고, 그들을 부러워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부귀나 성공을 부러워하면 영적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지요. 창세기 6장에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여인들을 자기 아내로 삼으면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나라입니까?

(4)에서는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5) “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율법을 주셔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게 해 주신 특별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오랫동안의 평안과 형통이 방심을 하게 했고, 신앙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망각하면, 성도도 가정도 교회도 쉽게 무너집니다.
성도와 교회는 돈이 없고, 성공하지 못해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평탄하게 살며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한 때는 은혜받고 성령도 받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다가 지금은 예배도 안 드리고, 불신자가 된 경우를 보셨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 왕은 너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지 않은 세금을 걷어가고, 자녀들을 데려가 일을 시키고, 심지어 종으로 삼아 부려먹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19)에 보세요.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아무리 경고했지만 사무엘의 권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의 대답이 (22)인데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물론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7)에 보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왕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하나님이 진짜 왕임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RyKt1U_N4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나라처럼 왕만을 요구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로 주시는 첫째 왕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 인해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은 ’왕을 버리고 왕을 얻으려는 아이러니‘였습니다.

성도는 첫째,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왕을 버리면 육신의 왕, 세속적인 왕을 원하게 됩니다. 그 왕이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71,72)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참된 왕을 믿고 따르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겨 울 날

           송정수

 

어둠이

가지 않았는데

간간히

분주하다

 

집마다 등 켜지고

자동차 시트를 데우고

버스는 슬슬 떠난다

 

가로등 눈부시나

동녘에 녹아버리면

 

웅크린 강아지 기지개 펴고

울던 야옹이 범처럼 걷고

수줍은 학생들 조잘거리고

어른들 바삐 떠나고

노인들 볕가로 나와

회상하겠지

 

먼 태양 꼭대길 오르면 

시린 하늘
한점 구름

땅을 돌아볼거야

 

하염없이

지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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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19장)

암소 두마리에 실린 언약궤가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곧 큰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방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부담스럽게 여겨야 할까요? 기쁘게 맞아 드려야 할 존재일까요?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에서부터 암소에 실려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무 수레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번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희생제물의 가죽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드리는 제사법인데, 이것은 완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에서부터 온 암소를 번제물로 드리는 것은 제사의 정석은 아닙니다. 번제물로 드리는 소는 흠 없는 수소를 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의 전심을 다한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들은 밀 추수철의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영과 진리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암소를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멀찌감치 따라왔고, 암소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손수 제작한 금 독종과 금 쥐는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물로 상징하는 트로피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로 인해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며 하나님의 위엄을 더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그들은 다시 에그론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블레셋 방백들이 돌아갔다는 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곳, 우상 숭배가 만연한 땅으로 돌아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포기했고, 자신들의 섬기는 신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한편 기쁨으로 찬양으로 가득해야 할 벧세메스에 하나님의 갑작스런 진노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언약궤 안을 들여다 봤을까요? 언약궤가 훼손된 것은 아닌지 염려해서, 아니면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에 넘는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같은 성물을 함부러 다루지 말 것을 경고하셨는데요, (민 4장)에서는 여호와의 성소를 들여다 보지 말라시며, 보기만 해도 죽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삼하 6장)에서는 웃사가 제사장 신분인데도 언약궤를 잘못 다루어 죽게 되는 사건도 나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약궤와 성물에 대해 엄히 다루셨을까요?

아마도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 봤더니 별 것 없더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떠벌이거나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교만한 죄성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의도적으로 어긴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호기심을 천박한 호기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눅 23장)에 보면 천박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천박한 호기심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다면 어떤 기적을 일으킬 것인가 따위의 아주 천박한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헤롯 황제의 질문에 묵묵무답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헤롯 왕은 세상의 구세주를 직접 만났으면서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영적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쓸데 없는 호기심으로 질문 몇마디 했고, 예수님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헤롯은 아무런 감동도 없었고, 깨달음도 없었고, 영생과도 영영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헤롯왕은 결국 에수님을 직접 만나고, 질문해 봤지만, 결국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린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나, 천박한 호기김을 가진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헤롯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천박한 호기심 대상으로 여겼고, 그게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다 주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속죄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엄청나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안에 들어오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WD__EBhT0M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천박한 호기심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큰 일날 일입니다. 또는 성경을 볼 때도 그저 지적인 연구 대상으로 본다던지, 역사책으로 본다던지, 문학책으로 본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미련한 접근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겸허한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며, 합당한 영광을 돌리겠다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마침내 복을 받는 자리까지 나가야 겠다는 거룩한 목적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대상 1629,30)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99)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딤전 615~16)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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