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번민',1459.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에게도 너무나 괴롭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했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예수님이 더욱더 크게 괴로워하신 것은 일시적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 역시 그 큰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먼저 (36~39절)까지 보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요.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느끼는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 고통과 범민도 몸소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과 죽음을 앞두고 괴로움 가운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진솔하게 밝히시며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요청하셨는데요.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가능하다면 잔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호소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것이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할 수 있는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더욱 깨어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40~44절) 말씀은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워서 사력을 다해 기도하셨는데 제자들은 근처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자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아마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는데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안타까운 마음이죠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들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신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반복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선한 목자같이 제자들을 돌보시며 지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 괴롭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기도로 견뎌내시면서도 제자들을 진정한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고 오늘도 당신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어서 (45 ~ 50절)은 성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기도를 다 마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팔아넘길 가려 누다가 가까이 왔음을 인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도망하거나 피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높고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 피할 길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완전한 순종을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각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대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완전한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놀랍고 위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한이 없지만 우리는 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실망하게 하지요. 육신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해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볍게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허물투성인 우리를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약함을 보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며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며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님 앞에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주님은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ni5RysDQsM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한은 예수님에게도 무거운 것이었지만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원대로 마우시고 주님의 원대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고난이 싫지만 현재 우리 앞에 닥쳐있는 역경과 힘든 상황이 너무나 싫지만 주님 원하는 대로 하시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우리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의 뜻에 붙들려 나아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순순히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원하오니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오늘 또 우리 가는 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히 우리 갈 길을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만찬의 예수와 제자들

 

(찬 265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속죄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순종의 길을 가시는데요.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약하여 말만 앞세웁니다. 오늘 세 사람을 보여주는데, 사리사욕을 위해 수년 동안 함께한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 의리와 충성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 그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극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26~30절)까지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무교절 첫날 저녁에 만찬을 여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제자들은 그 밑에서 뭔가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과 희생을 다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눠주셨듯 곧 자신의 살을 생명으로 주실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포도주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잔을 비운다면 더 예수님과 함께 잔을 나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만찬이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상에서는 마지막 잔이 될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 새 포도주로 성도들과 함께 마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1 ~ 33절)까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기뻐하며 함께 찬양까지 부르며 신이 났습니다. 그 후 장소를 강람산으로 옮겼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은 스가랴의 선지자의 말씀까지 인용하며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제자들은 꽤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반응하는데요. “나는 결코 줄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이 맹세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의 다짐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우리 신앙도 지속해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4~35절)까지 보십니다.
베드로는 호기롭게 자신의 충성심을 예수님께 내세웠는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먼 훗날도 아니고 한 달 후도 아니고 바로 ‘이 밤이 다 지나기 전에 베드로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결심과 다짐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의리를 다짐하고 내세웠지만, 그 의리는 금방 무너지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의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싸움을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진심 어린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연약함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려면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을 붙들어 인도하도록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나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가 있습니다.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또 그 언약의 피 안에서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zBDvYObj8I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의지와 신앙과 절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다가도 의심하고 변개하는 저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언약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님에 인도하심을 구하오니 오늘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또 신앙생활에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제자로 당당히 우리 자리에 서서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루벤스, 향유를 부은 여인

 

(찬 214장)

예수님은 절대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신앙적 행동을 통해서 성도들이 예수님께 보여야 하는 가장 합당한 태도와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틀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그것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자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제자들은 낭비라고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많은 말씀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 신앙이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만,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길 때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선험적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선험적 지식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시 향유는 당시에 매우 값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판단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이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일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바친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으며 사람들 앞에 그녀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실이 전해지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한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예배하고 예물을 드릴 때 예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그 모든 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반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행하는 모든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봉사와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큐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향유를 보인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낭비라 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놀라운 헌신을 기억하시고 높여 주셨듯이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사랑과 헌신도 언제나 기쁘게 받으시며 영원히 기억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가장 값진 것을 들림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입술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우리의 헌신과 예물과 우리의 정성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정말로 기뻐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더욱더 복되고 전기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k3rVVE6D0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의 죽음을 향유를 통해서 표현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귀한 것을 깨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행동과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향한 마음에서 동기가 되어 행동하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무엘상 30장,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더 이 문구가 와 닿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사흘 만에 자신들의 거처인 시글라고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성읍은 불타버렸고 아내와 자녀들은 아말렉에게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기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격분에 다윗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다윗을 지도자로 믿고 따른 결과가 너무 참담해 이성을 상실했던 것이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의 잘못이 아닌데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20장)에서 마치 출에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자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속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가족을 찾을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절망을 심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타인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위기와 슬픈 일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꺾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어서 큰 슬픔과 위기 앞에서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절망한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했지만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에봇이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비아달은 사울과 에돔 사람 도엑에 의해 제사장들이 멸절 당할 때 에봇을 입은 채 다윗에게 도망해 계속 함께했던 사람이죠.
사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녔기에 성전을 찾을 수도, 제사장을 만날 수도 없었고 다만 애봇을 입고 성전에서 섬기던 아비아달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응답하셔서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즉시 아말렉을 추격하지만 그중 탈진한 자 200명은 머물게 하고 400명만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금식을 선포했던 사울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거창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문제가 있고 없고 차이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성도는 다윗과 같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용기를 얻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 또한 그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므로 문제 해결의 열쇄도 하나님이 예비하셨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당하게 하시고 위기에 처했을 때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들은 주권자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주실 것을 믿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와 함께 하시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어떤 슬픔과 위기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닥친 슬픔과 위기는 무엇입니까 성도에게 닥치는 위기가 한편으로는 기회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고난과 위기 속에서 처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확신하고 언제나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도 슬픔과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e4dY15yi8M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큰 슬픔과 위기를 당했지만 다윗은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오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모든 슬픔과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명철하게 하셔서 복된 선택을 하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오늘 다윗이 버려진 종을 만나서 길을 찾게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은혜와 만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 우리를 인도하시고 복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삼상 29장


 (
찬 397장)

‘위기가 곧 기회다’라고 하는 말이 있죠.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도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용병 노릇을 했던 다윗은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지요.
블레셋의 편에 서지 않으면 생존 위협을 받을 것이고 블레셋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우면 자기 동족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다윗에게 피할 수 없는 크나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스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신하였던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다윗의 참전을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또한 방백들은 오래전에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상기시켰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던 그 노래 가사를 아기스에게 이야기하면서 방백들은 다윗이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 노래 가사를 들었을 때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그 노래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다윗의 인생에 이렇게 구겨지고 힘든 순간들이 많아졌던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방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윗을 세 번이나 인정했습니다. 이제까지 다윗에게 허무를 본 적이 없었고(3절)에 정직하여 악을 찾을 수 없었고(6절)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하다고(9절)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의 강력한 항의로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라고로 돌아가게 되지요.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블렛의 진영의 군사로 참여하지 않게 되고 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과 맺은 언약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뜻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그저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위기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길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위기 때마다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오래전에 불렀던 여인들의 노래가 다윗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되었지만, 오늘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뼈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또 우리가 만났던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서 별처럼 빛나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로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해서 안전을 도모하려 했고 또 오늘 본문에서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 속에서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 불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윗을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다윗처럼 여러분의 상황도 막막하거나 답답하십니까 우리가 이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이십니다.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희에게 넘쳐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H7qH7LrRg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위기 어려움의 위기 질병의 위기 문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불의하고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문제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조합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을 간절히 바라며 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사무엘상 28장


(찬송가 543장)


(27장)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갔고, 아기스 왕 아래에서 평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28장)에서 아기스 왕이 함께 이스라엘을 쳐서 공을 세우면 큰 보직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 때 사울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으며 크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가 거룩한 전쟁임을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물었는데, 첫째는 꿈이요, 둘째는 제사장을 통해 듣는 우림이었고, 마지막은 선지자를 통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진짜 잘못된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무엘이 죽었을 때 내쫓았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이 엄격하게 금하는 주술로라도 확신을 찾으려 집착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 과도한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를 자행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합니까?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분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과욕을 부리며 살더니,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사실 사울 왕에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현실적인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사울은 아직까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황이 지금 불리하긴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전보다 불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의 과거 행적을 살펴 본다면 이 정도 상황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음식조차 끊어버리고 이렇게까지 절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까지 절망했을까요?결국 답은 사울왕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만을 뛰어난 존재로 여기고,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나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곳에서도 도움을 기대하거나 요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에 쓰러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성도가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교만하게 되면 사울처럼 왕임에도 일반 백성보다 못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스스로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만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못하여 결국 파멸의 길로 갔던 사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 내 뜻, 내 마음대로 안 되어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안 되었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허락하시고, 정말 그러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겸손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최선이 기도라면 기도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사랑이라면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일이라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역사를 바꾸려 하지 말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이 우리에게 본보기와 거울이 되어, 우리 행동과 마음가짐에 영향을 끼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운에 맡기지 말고, 힘들고 어렵다고 점치는 자에게 묻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성도의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가는 길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Z7YZy4wvg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저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려운 일은 오지만 사울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님에 감동되어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미래가 밝은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우리 갈 길을 밝히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을 따를 것이냐 이것은 우리 삶에 늘 주어지는 숙제와 같은 것이지요.
엔게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사울이 왜 왕자에서 쫓겨났는지를 드러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했고 사람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13~16절) 말씀에서는 다윗은 사울의 진영과 거리를 확보한 이후에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다윗이 자기를 부르고 있음에도 왕을 부른다고 착각했고 또 그가 다윗인지도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군대 장관으로서 아브넬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다윗도 아브넬이 사울을 수행하는 군대 장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명 아브넬은 용사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능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할 만한 자였습니다(15절)
그런데 그가 모시는 왕 사울을 지키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는 죽음으로서 책임을 져야 마땅한 큰 잘못이라고 다윗이 말했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용사였던 아브넬이라고 해도 사울을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유능하고 강하다고 해도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그 생명을 유지하고 승승장구했지만 사람을 의지했던 사울은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도 이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17~20절)까지 보면 아브넬과 달리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곧장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다윗이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엔게디 사건과 유사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헤아려 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야 옳겠지만 이것이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십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찾아 나선 것이므로 다윗이 지적한 대로 사울왕은 사람의 말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람들의 말을 따라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를 죽이려는 시도를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을 듣고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패망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1~25절)까지 보면 사울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다시는 그 생명을 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또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을 돌려주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생명을 다윗의 처분 아래 두셨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다윗 편에 서 계시기에 다윗은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겼듯 하나님도 자기 생명을 중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24절)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던 다윗은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 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야말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Wq47o1-mI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몇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현직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힘과 평판을 의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왕이 결코 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오늘 또 내가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될 그 뜻은 무엇인지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또 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 귀한 삶에 승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살아계신 우리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사람을 따르는 사울왕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사람이 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주님,저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사람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과 역할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또 기뻐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입으며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축복된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찬 310장)

 

 누가 강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 있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대지 않았는데 오늘 십 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엔게디 광야에서는 다윗의 사울을 피해 숨어 있었지만 십 광야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5절) 말씀까지 보면 사울은 이미 엔게디에서 다윗에게 항복을 선언했지만 십 사람들이 십 광야 앞 하길라산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광야를 샅샅이 다 뒤져서라도 다윗을 잡겠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더 이상 이전처럼 숨어있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정탐꾼을 보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울의 진영에 침투해서 정탐까지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아니라 사울에게 맞서는 왕이 되었고 군대와 군대 나라와 나라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다윗의 영토인 십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자기 군대가 다윗의 군대보다 규모만 클 뿐 사실상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이스라엘이 왕이 된 다윗은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나라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울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도피 경로


 이어서 (6~8절)까지 보면 다윗은 직접 적진에 침투해서 정탐하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아비새와 같은 용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의 군대의 용맹성입니다. 다윗의 군사는 약 600명 정도 되었는데요.
3천 명이나 되는 사울의 군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군대를 얕보아서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잠들었습니다. 군대 장관 아브넬과 군사들 역시 전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비새는 적진 중앙까지 들어가 창호로 사후를 땅에 꽂아 죽일 수 있다며 다윗에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우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다윗은 이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과 아비새


 왜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사울을 쳐서 죽게 하실 권한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시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사울을 죽여 원수 갚을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시험대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도록 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당하는 당사자임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상황을 인식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신앙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를 상고하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앞두시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하신 기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성도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요 성도는 강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약한 자이지만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함이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과정에는 정치적인 모략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두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쓰임받는 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oFAz1UHRI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의 뜻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주님, 우리도 오늘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한 믿음과 강한 생각과 강한 생각을 허락하여 주셔서 이길 수 없는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로 호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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