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old C. Harvey

 (찬 412장)

 

 어느 인생에게나 사는 동안 기뻐할 일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라고 건면하는 이유는 그 비결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관용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은 포용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한 것입니다.
 바울도 목회자로서 여러 동역자들과 성도와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맨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같이 다른 지체에게 약점과 문제가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을 때 우리는 그들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라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은 누구나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조건과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염려와 걱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아버지 이 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라라고 했는데요.
보통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 감사하지만 기도 응답의 확신 가운데 미리 감사함으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샬롬)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이 평강은 세상에서 사람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평강이 아니지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7절~9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하는 이 평강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이유로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천국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재철 목사님의 ‘사명자 반’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목회할 때 단군교 교주가 등록 교인이 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잠실의 본부 건물과 강화도의 수련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교주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신도들 앞에서 밝히고 자신이 창시한 단군교를 스스로 해체하였다. 그리고 잠실 본부 건물 맨 위층에 있던 단군교 성전을 폐쇄하기 위한 예배를 드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단군교 성전을 찾은 나는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재단 앞에서 단군교 성전이 주님의 집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나더러 재단에 걸려있는 단군 초상화를 떼어 옥상에서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한 일에 내가 단군교 성전을 방문할 때까지 여러 주가 지났지만 그는 그때까지 두려움으로 인해 단군 초상화를 스스로 떼내거나 폐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단 중앙에 걸려 있던 단군 초상화를 떼어낸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그에게서 건네받은 라이터로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 천연색 초상화는 한동안 푸른 불꽃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재로 변했다.

그의 바짓가랑이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초상화가 완전히 제가 되고 난 다음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군 초상화를 떼어내 불태우는 내게 혹시 무슨 화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제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족자에 진하지 않는 그 그림을 그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그동안 그의 시선이 그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시작하여 정해진 시간마다 그 그림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였으면서도 그 그림으로부터 혹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그토록 두려워한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에 따라서 두려워할 수도 있고

염려로 휩싸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니 이 말씀을 가슴에 못 박듯이 깊이 새겨 넣으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https://www.youtube.com/watch?v=ON-K0M4KGMQ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넓고 위대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래는 성도로 살겠습니다.

성령님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도록 오늘 또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고요하게 하시고 평강이 있게 하시며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하루를 승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Claude Monet



(
찬 324장)

 

인간이 쌓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생활하고, 절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치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살지만 사관생도가 되면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어 주신 부활사건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던 그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한마디로 우리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성취를 알기에 자신은 부활에 대해 이미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말이죠. 아닙니다. 원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삶의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마치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으면, 차표만 간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는 서울역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순종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데 이 부활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자신은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이 땅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사탄의 세력과 전쟁중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이 상을 받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듯이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지만 부활의 소망에 동참한 이후로부터는 고난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본받아 복음과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예수님을 본으로 삼아 겸손히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일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출생과 업적,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며 교만히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결말은 (19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둘째 그들은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자들이다. 셋째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움을 받을 자들이요, 넷째는 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본삼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바울과 성도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이기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요, 그 예수님은 우리의 낮은 몸도 자기 영광의 광채와 같이 변하게 하실 분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이게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빌려 말씀하는 요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원수들과 세상의 운명은 반드시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바울과 초대교회와 같이 성도들은 원수 사탄의 공격대상이 되고, 세상에서 비난과 놀림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옹졸하며 편협적이며,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종교단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기독교야 말로 척결해야 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종교집단이라고 여기고 혐오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원수가 너희 집안에 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단순한 눈총에서부터 심각한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요,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과 통치에서 나온 것이요, 확정된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또 개인적으로 저 천국에 입성할 날을 고대하면서 세상에서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어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바울은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육체를 가진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1S0_-WVg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하늘에 시민권자이지만 아직 우리는 육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계속적으로 죄와 싸우고, 타락한 문화와 싸우고, 사탄과 영적 전쟁을 치루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달려 간 것처럼 우리도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직도 일어나 달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하고,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터이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싸우며, 근신하고 깨는 일에도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려서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를 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여정에 낙오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싸워 기필코 부르심의 상을 받은 승리자들이 됩시다. 함께 이 위대한 여정에 동역하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바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낮은 자일 수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자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와 영적 전쟁도 치러야 하고, 우리 삶에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야 하는 책임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 힘을 주소서! 강건함을 주소서!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시고,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하소서. 그래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부르심의 상을 받는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월요일

  
   
       송정수



아침은 추워

나가기 이르다

첫 날은
더 쌀쌀하고 적당하지 않았다

꿈 같았던
주말은 허무하게 끝났고

생활 전장에
투입되라 떨어졌다

초침은 
가라가라 하는데
나서기 이르다

늘 그랬듯
한 걸음 떼면

한 주가 시작되고
기회가 열렸다

한 걸음만 떼자

오늘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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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 94장)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증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소서’같은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이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고, 나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자랑하길 원하는데, 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자랑만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육체는 곤고하고, 마음이 지쳤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썼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어떤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미 큰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커가는 것을 보고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자녀의 존재는 곧 부모의 기쁨인 것이죠. 그런데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힘든 인생 길도 견딜만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를 사고, 얻으면 잠시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 같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안에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직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1~3)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을 경계하라고 거듭 당부하며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을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며,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4~8)까지는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조건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조건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무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랑할만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해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가장 귀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죠. 거기에 견줄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바울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이기에 율법으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야라는 자랑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에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자랑스러워 하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탁월한 신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에 보면 바울 자신이 받은 의롭다는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중에 하나가 뭐죠? 바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보면 내 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는지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죄를 사했다는 쪽으로 가야 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실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서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8hjU_6z73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자신보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인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그분을 자랑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육체와 환경만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예수 그리스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로 사십시오. 그것이 복이요, 그것이 참된 승리의 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찬양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자랑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신실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Greatest in the Kingdom

 

(455)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교회가 있고, 내형적 교회가 있지요. 외형적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지만 내형적 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일 수 있지만 진짜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말이 많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된 교회는 사랑과 권면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쫓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교회는 하나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으며, 지역의 교회들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경쟁하기 바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한 마음을 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라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한 마음을 품고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겸손함으로 한 마음을 품으라(1~4).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안에서 진짜 교제가 이뤄지고, 서로 끈끈하게 삽겹줄로 하나되려면 권면, 사랑, 긍휼 이 세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한 마음만 되면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며, 또 엄청난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각자의 은사와 성품,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툼과 허영입니다. 사탄이 성도를 다툼과 허영을 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이기심에서 비롯되고, 그 이기심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직 겸손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다른 지체의 일까지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이 교회를 진짜 건강하게 만듭니다(4).



 둘째,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5~8).

신앙생활에서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과 겸손입니다. 교만하기는 너무너무 쉽습니다. 본성이니까요. 그러나 겸손은 정말 어렵고 힘듭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려는 것이 겸손입니다. 매일 연습해도 겸손함을 유지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마치 외줄타고 균형을 잡는 것만큼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헤를 주시고, 복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인 교만으로는 교회가 절대로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목회자만도 아니고, 성도만도 아니라 모두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죠.

교만하기는 목회가 늘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교만하기 십상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안의 직분자들이나, 오래 출석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나 예외없이 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 말씀안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이 타락한 땅에 태어나신 것만해도 기가막힌 일인데, 심지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서 가장 천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거친 강보에 쌓였고, 말밥통에 뉘실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낮아지심에 대해 한마디도 하나님께 불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의 겸손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하면 모든 신앙생활의 헛것이요, 모든 기도가 시간낭비요, 모든 헌신과 예배가 엉망진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왔으나, 가장 비참하게 하나님을 섬긴 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겸손의 교과서가 되어 주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영원한 샘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8qR13UzM8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겸손하기를 힘쓰십시오.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 곧 경건생활이고, 겸손이 곧 성품으로 나타날 때 예수님이 전해지며, 겸손하게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훈련보다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가 이렇게 예수님처럼 겸손하기를 힘쓰고 집중할 때, 교회가 하나되고 반석위의 교회처럼 강건해 집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겸손할 때, 가족 식구들이 은혜를 받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존중해 줄 것입니다.

오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겸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령님께서 겸손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오늘도 겸손하여 가장 귀하게 쓰임받는 멋진 제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가장 쉬운 것은 교만이고, 교만은 사탄에게 속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성령님, 겸손하게 하소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겸손한 종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고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 자신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영광과 존귀를 허락하소서.

 

 

         
     겨울비


                    송정수

 


새벽 미명

비가 내린다

 

정월 비라니

 

눈이 아니라 다행이야

 

낭만보다 치울 걱정하니
늙나보다

 

비는
시커먼 얼음덩일 녹이고
허연 쓰레길 밀쳐

개운한 아침

선사할게다

 


이상하다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겨울엔
하얗게 흩날리길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 맘을 몰라

떠날 생각만했다니

야속한 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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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351장)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고민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22,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나은지, 사는 것이 나은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사는 것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위해서는 자신이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개인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 즉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은 하나님나라 천국백성으로써 천국의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음으로 서 있다라는 표현은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앞둔 군사들이 우와 열을 맞춰 전쟁터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협력하다’를 NIV성경에서 컨텐딩 애즈 원 맨 contending as one man’.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되어 함께 싸우는 모습이 천국 백성의 합당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리더는 바울이죠. 그런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사로 잡혀간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경제적 문제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감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습관에 잡혀 있습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오늘도 집요하게 사로잡힐 만한 문제들로 단단히 결박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마귀가 바라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힘을 잃고 더 이상 일어나길 포기하길 원합니다. 기도생활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간계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마귀를 대적하여서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나가 되어 싸우라는 것입니다.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둘째, 무슨 일에든지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28)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마귀가 성도들을 가장 잘 넘어지게 하는 비결은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두려움일 것입니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술은 뭘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죠.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요? 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겁을 먹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이긴 것이나 진배가 없게 되겠죠.

우리가 자주 환경을 바라보고, 내 약한 몸을 바라보고 한숨이 터져나오고, 이제 무엇을 하겠나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려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하겠나 주저 앉고 싶을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어느 것도 하기 싫을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요,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입니다.

(14)에서 홍해 앞에서 두려워 하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본문 (2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믿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

또 이 부분을 새번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kQ3Z6w3_U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어떻게 하면 고난이 특권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질병이 있습니까? 그 질병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가난이 있습니까? 역시 그 가난이라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실패가 있습니까? 역시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돼죠? ”주님,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즉 싸우는 것이다. 이단들과 세상의 헛된 지식과 타락한 문화와, 우리를 사로잡고, 두렵게 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협력합시다. 그리고 당당히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함께 하실 것이요, 우리를 당신의 오른 팔로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바울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만났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뜨거움을 주시고, 협력하는 마음을 주셔서 세상과 마귀와 싸우기 위해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 이미 이긴 싸움이니, 끝까지 밀고 전진하게 하소서.

 

 

 

 

 

(411)

오늘 (4)에서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라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싸움의 종류는 달라도 모든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한 단어 때문이다. ‘정욕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탐스럽게 보인 것이 뭐냐? 바로 정욕인 것이죠. 죄가 정욕을 타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깨보면 결국 정욕의 문제요,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욕과 탐욕을 부린다고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게 될까요?

야고보 사도는 (2)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과 탐욕이 다툼을 낳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첫째,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한다. 둘째, 살인하고 시기해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셋째, 그래서 다투고 싸운다.

그러니까 탐욕을 채워보려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욕과 시기가 생겨, 결국 다툼과 같은 싸움판이 벌어져, 악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탐욕을 채워보려 하는데, 싸움만 일어나고 얻지 못하는 것이죠.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3)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위해 기꺼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추구하며 살아도 될 텐데, 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기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서 구하는 것을 기도만이라고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의 삶의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뭐하는 거죠? 뭔가를 추구하며 사는 겁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지 않는다.’ 광야 40년 생활처럼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참 가난하고 헐벗었죠.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다 보니까 절실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실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부자가 되어버린 거죠.

성도 여러분, 진짜 복이 어떤 것인줄 아세요?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보다 정말 귀한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16)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시인의 고백이 나와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진짜 복이 있는 상태는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기도 밖에는 할 게 없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죠.

자 다음 구절을 보세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적당히 세상과 발맞추어 짝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은 여자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둔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거죠. 세상을 벗삼아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세상과 벗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을 어떨 때 쓰였을까요?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간음한 상태는 한마디로 설명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양다리 걸친 신앙은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입니다. 99% 하나님을 사랑하고, 1%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보세요. '아니 나같은 죄인을, 정말 너무나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시기하까지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잊지 말라! 무엇을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10)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주님 앞에서 높아진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죄를 씻고,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 자신의 죄의 속성 때문에, 탐욕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일으키심을 얻는 과정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럼 겸손이 뭘까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얌전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이지요. 성경에서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뭐죠? 교만이죠.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자 겸손의 모습을 갖추면 특별한 은혜가 임해요.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높이세요. 자신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앞으로 올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세요.

오늘 주님앞에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밖에는 나에게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주님 밖에는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고백하세요. 그리하면 때가 되면 어떻게 높이시던지 주님이 높이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영어 성경에서 “he will lift you up”. 그가 너를 들어올릴 것이다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신다는 거죠. 이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환경으로부터 구원이요, 문제로부터 구원이요,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 잘했다, 잘 살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O7DEH-rf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지만 우리 삶에도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탐욕을 부리고, 정욕으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서 낮추며,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모습임을 압니다. 주님, 우리를 리프트 업하여 주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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