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15) 말씀은 나발과 아비가일의 대조적인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비가일 같이 분노를 잠재우는 지혜로 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구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을 찾아온 아비가일이 땅에 엎드려 모든 죄악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간청한 내용을 보면

내 주여 원하건데 이 죄악을 나 곧 네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아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처럼 아비가일은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그 집안을 대표해서 다윗에게 사죄함으로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습니다. 나발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집단 남자들이 다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비가일은 잃은 집안 사람들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 나발이 이름의 뜻대로 미련한 자이므로 다윗이 복수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비가일의 사죄로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녀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기가 속한 집에서 일어난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고 사죄한 것은 그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의 범죄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중보자로서 사죄를 구함으로 이스라엘을 멸망해서 구원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겸손함으로 사죄하여 임박한 진노로부터 공동체를 구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나 다윗 스스로를 위해 선한 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보복을 멈추게 설득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어떤 이유든 이스라엘 백성을 학살하는 것은 나쁜 이미지로 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도망자의 처지이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에 걸맞는 처신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다윗을 설득했습니다.
다윗도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흥분하여 실수를 저지를 뻔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이 복수하는 일을 막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스라엘을 집멸하시려는 하나님을 설득한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분명한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57) 말씀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이 성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자 우리가 오늘 아비가일이 나발의 죄를 대신해서 다윗에게 사죄하여 집안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낸 것은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류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대속 행위로 많은 사람이 생명이 죽음에서 건짐받는 원리입니다.
다니엘도 보면 이스라엘의 민족의 죄를 마치 자기의 죄인 양 금식하며 간구하여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 많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영적 책임을 느끼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모든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파해 생명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들이 주님 앞에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중보해야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원수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중보자의 역할이 뭡니까 바로 다리를 놓는 사람 역할이죠.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중보자 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받으며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가일의 역할이고 신약 시대 성도가 맡은 복음 전령자의 역할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가 바로 아비가일처럼 우리를 통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될 불쌍한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일에 복음 전도자로 쓰임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아비가일처럼 사람을 살리는 중보자로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용서를 받으며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잘 놓아줄 수 있는 중보자로 우리가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아비가일처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할 수 있는 일에 지혜롭게 쓰임받는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의 가는 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감동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오늘도 주님 안에서 귀한 사명 잘 감당해 나아가는 승리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218장)

살다 보면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억울함을 이유로 모든 상황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억울한 상황에서도 참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승리의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사 3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잡기 위해서 들염소 바위까지 갔습니다. 다윗은 고작 600명의 군사로 사울의 군대를 맞서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는 위기는 마치 이런 상황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요나단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의 구원은 어떠한 조건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상 14장 6절) 요나단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처럼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홀로 굴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곳에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잘랐습니다.
다윗은 지금 얼마든지 사울을 죽이고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기회를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최우선적으로 행동해야 하지요. 평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극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거룩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는 기회를 이기심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않게 합시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뵌 것을 심하게 자책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군사들에게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말하며 그를 해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경애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종을 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숙한 믿음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으며 원수 갚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엔게디 광야


다윗은 굴에서 나아가 사울을 “내 주 왕이여”라고 부릅니다. 엎드려 절하며 억울함까지 호소합니다.
특별히 사울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사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사울을 여전히 왕으로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상대를 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 그를 용서하고 품어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은 개와 한 마리 벼룩같이 미천한 존재이니 자신을 죽이려 추격하는 것은 무익한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판결하실 것을 호소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처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자신의 모습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겸손함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들어 쓰십니까?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자금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 앞에 겸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고백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대희 저자의 ‘다윗처럼 기도하라.’ 책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나는 오래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유대 광야 아래쪽의 엔게디 황무지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른 땅 밖에 없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기도하며 지세웠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하룻밤을 지냈을 장소에서 텐트를 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밤을 보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적이 나타나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때 나는 여기서 나를 보호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구나 그냥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정말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예측 불허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날씨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 한순간에 광야의 폭풍이라도 불어온다면 또한 광야의 야수나 뱀들이 잠자는 텐트를 둘러싼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광야는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널려 있는 곳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다윗이 숨은 곳이 바로 그런 광야였다. 다윗은 그 속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 나는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하룻밤의 광야였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었다. 하룻밤을 지내는 상황이 나와는 전혀 달랐다.
광야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눈을 뜨고 영적으로 맑아지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가 감추어져 있는 곳이 광야다 불안함과 고결함이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늘에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광야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광야를 허락하셔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합력하여 선이 되고 승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다윗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거나 누구에게 원수 갚아 줄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해야 되고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바라보고 또한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기 이것은 바로 다윗의 겸손해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다면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원수나 대적이라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 모두 다윗처럼 행동합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허락된 일이라고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합시다 자기가 부당하고 억울할 때 그것을 공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을 처리할 때 겸손하게 상대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마음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게 보시고 갚아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기도하며 지혜롭게 맞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biAsdLpSyY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오늘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울왕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이런 넉넉한 마음이 있게 하시고 넓은 그릇의 마음이 있게 하소서 또한 겸손히 있게 하시고 인정하고 존중해 줄 줄 아는 인격이 있는 성도가 되게 하시며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기도하며 주님 앞에 의로움으로 추구하며 해결할 때 하나님 이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뜻에 누가 되지 않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성령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오늘 또 영원한 지혜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다윗 왕



(
214)

 

 우리 말 속담에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죠. 나 살기도 벅찬데 남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지금 코가 석 자 정도가 아니라 열 자도 더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 (1~5) 말씀까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나를 구원한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블레셋의 접경 지역에 그일라라는 마을의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그일라 사람들이 일년 내내 수고에 추수하여 타장 마당에 쌓아 놓은 곡식을 블레셋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탈취해 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블레셋을 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을 이길 만큼 수가 많거나 잘 훈련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윗을 말렸어요.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데 블레셋을 치라뇨?”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다시 구하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릴라로 가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전리품까지 챙겨서 오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형편이 좀 나아지면 좀 여유가 생기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면 순종하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지금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그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바로 그것 지금 해야 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도피행로


 이어서 (6~14) 말씀까지는 돌아오는 것은 배신의 쓰라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릴라에 온 사실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좋아했어요.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예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사울은 자기 욕망에 따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드디어 다윗이 성 안에 갇혔다라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성이 지금 블레셋에게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뻐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욕망에 사로잡히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게 됩니다. 자신의 안전 때문만이 아니라 그일라가 사울에 의해서 파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 것이고 그 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일라 주민에게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해코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묵묵히 그 일라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사울도 그 일라를 향한 행진을 멈추고 돌아갔고, 다윗의 선택으로 그일라에도 평안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늘 그를 보호하셔서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을 오늘 (14)에서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https://www.youtube.com/watch?v=WjVqmcl52p0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유익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눈앞에 유익이나 욕심을 쫓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안에 고하십시오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우리 안전을 책임져 주시고 다윗처럼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귀한 시간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기도를 드립니다. 다윗이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저희도 다윗처럼 행동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지금 순종의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여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행할 때 우리 갈 길이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복된 삶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권과 인권과 물권을 허락하여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는 복된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268장)

 세상에는 무모한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모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도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데요.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 가족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도발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도엑과 아비아달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선택했고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 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 봅니다.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도엑

 오늘 우리는 먼저 사울을 택한 도엑을 보겠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작은 호의까지도 자신에 대한 배신 행위로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의중을 알았던 도엑은 사울이 원하는 대로 아이멜렉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도엑게 보고를 듣고 분노가 끌어오른 사울은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해 다윗과 공모한 사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무리 중 누구도 사후를 대적하려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모든 제사장 무리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도엑이 그 명령을 따라 제사장 무리를 학살했습니다.
도엑은 철저히 악한 권력자의 입맛에 자기를 맞춤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편에 섬으로써 앞날의 부귀 영화가 보장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득에만 몰두해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뿐입니다.

 잠언은 ‘악인이 서로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고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을 자랑하는 악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선한 행위로 맞서야 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에게로 도망친 아비아달

 이어서 다윗을 택한 아비아달의 모습을 살펴보겠는데요.
제사장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단 한 사람 아비아달만이 도망쳐 나와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다윗을 찾아갔는데요. 다윗은 사울이 저지른 악행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을 안심시키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겸손함과 배려를 보면서 그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정당성을 갖도록 끝까지 협력했습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왔을 당시 다윗은 큰 세력을 갖춘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라한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다윗을 선택했고 그 결과 진리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참된 성공과 승리하는 삶에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따르라고 교훈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홀로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섬기는 지체와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 서로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받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잠 2장 20~22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아기는 땅에서 끊어지게 했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더 복된 선택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며 함께하고자 합니다. 악한 권력자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도 그를 가까이 하면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은 곧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체들과 함께 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군중의 길이 아니라 바로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믿음의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기도드립니다.
 성령님, 저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령님, 저희를 이끄셔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그들을 잘 따라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땅의 약속과 진정한 성공과 승리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모두 주님의 진정한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오늘 삶에도 어떠한 상황에 서든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시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거룩한 길 끝까지 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보존시켜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50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한은 헛되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세워져 갔습니다. 그는 또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무리가 춤추며 다윗에 대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그들 앞에서 미친 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의 침을 흘렸습니다. 아기스는 자기에게 미치광이를 데려왔다 하며 신하들을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집안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는데 그 외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어느새 그들의 수장이 되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위로와 회복이 넘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모압 출신 증조모 룻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새에 있을 때 부모는 모압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최선을 다해 부모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요새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 수풀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다윗에게 도피 생활은 연단의 과정이었고 목적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과감하게 유다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도는 방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단의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Saul angry with David,Antoni Brodowski,1815

 반면에 사울의 모습을 보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셀나무 아래에서 손에 꼭 쥐고 있는 단창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울은 다윗이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며 신하들을 질책하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요.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눈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악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도액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견고한 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힘을 키워야 합니다.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악한 세력을 공동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뿌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서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메어 달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극심한 기근에 처하게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서 갔잖아요? 즉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와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오직 그의 아내인 나오미만이 겨우 살아서 모압에서 얻은 자부 룻만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돌아와서도 나오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궁극적인 기쁨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우리를 품으심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39, 40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란 때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데살로니가전서 33)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모든 일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선지자의 제안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반면에 사울은 불안함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도엑 같은 악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과 그렇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유연했지만 사울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담대한 성도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오늘 하루도 잘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오늘 이 하루도 넉넉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337)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간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한 반면 요나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놓고 사울은 죽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4~31)에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한 계획대로 초하루 식사 때에 아버지 사울을 만나 그의 의중을 살폈습니다.
초하루 식사 첫날에 다윗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정한 일 때문에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집안의 제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가길 원했고 자신이 그것을 허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사울 자신의 왕권뿐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왕위도 보장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주장하며 다윗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스스로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막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때부터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회개해야 합니다.

 

 (32~34)은 다윗을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또 한 번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번에는 울분과 격한 감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은 크게 분노해 그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미움을 받는 다윗을 위해 슬퍼합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자기 집안의 왕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해 왕이 될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 두 부자가 보인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 생각하는 바가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여동생 미갈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 않았고 하나님 뜻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그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따지면 사울은 그의 아버지지요, 이해관계로 따져도 다윗은 자신이 당연히 물려받아야 될 왕위를 대신 차지할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요나단은 당연히 사울 편에 서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길 원했고 육신의 아버지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단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삶의 가장 큰 본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이죠?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독일 간호사인 엘리자베스 조안나 쉐핑은 191232세부터 54세에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신음하면서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살피며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희생적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모두 당신의 뜻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켜 나아가실 것입니다.

 오늘은 박대영 저자의
디도여, 교회를 부탁하오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제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학을 하러 유학을 갔지만 신학을 바치고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안수를 받지 않은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 무서워서다 어릴 때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그 무서운 책임을 존경스럽게 감당하셨는데 나는 도저히 그분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더 엄중한 책임을 부여하고 더 큰 신뢰와 존경을 보이는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는 참으로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가치관, 행동 양식,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심지어 영원한 미래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그릇 인도하면 함께하는 영혼들을 파멸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부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유능해서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하리라 자신하는 학생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마다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습니다. 전자는 너무 교만해서 실패할 것이고 후자는 목회를 할 때도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상당 부분 지도자들의 과오와 부덕에서 비롯됩니다.
지도자나 성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지도자들이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성도들은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 저자의 말처럼 정말 지도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사울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끝끝내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Eyg5-qv5I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는 사울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아버지이자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복잡한 이해관계 앞에서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뭘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늘 정의롭고 거룩한 편에 속해 있으면 결국 그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살리려는 그 길을 기쁨으로 가십시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고 나를 통해서 어떤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나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멋지게 출발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죽이려는 사울과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내가 살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위로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경청하며 손잡아줘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길에서 우리 각자가 살려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동을 주시고, 그래서 살리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해서 별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복된 성도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91)

 

 인간관계에서는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도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견고한 우정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깊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가진 조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학식이나 재력 때로는 외모나 성격을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을 보고 맺은 관계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소원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다윗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요나단의 신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위용에 매력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우정은 다윗이 형통할 때나 힘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나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진 지위를 사용해 도왔습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 견고한 이유는 조건과 형편을 초월한 순수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이 가진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천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우리 지체와 이웃들을 또한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 안에서 맺어진 우정관계야말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결코 인간적인 호감으로만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가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요나단은 다윗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울의 가문이 아니라 다윗과 그 가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인자를 자신의 집 안에 베풀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견고한 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한 집안 주인과 머슴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되자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장로 후보가 되었고 머슴 이자익에게 먼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 조덕삼은 자기의 이자익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머슴이 자신보다 먼저 장로로 선출된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자익을 교회 지도자로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덕삼은 이후에 이자익을 신학교에 유학 보냈으며 목회자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의 섬김으로 이자익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처럼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존 오토버그>, ‘선택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나는 30년간 알고 지낸 두 부부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모여 며칠간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관계의 열린 문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여러 번 추진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오자 그들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도 친밀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끔 당신은 친밀함을 강요합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게 놔두지 않고 자꾸만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관한 말도 너무 많이 합니다. 당신이 대화의 중심에 서려고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모두 내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부부는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다섯 친구를 새로 사귀해야겠군.’
나중에 이 일에 관해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약간 옥신각신 했고 어느 순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도 당신 친구들이 좋아요. 하지만 가끔 당신은 자신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세상으로 들어와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면서 당신은 내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죠.“
그 순간 내가 말로는 진실과 정직 진정성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나에 관한 진실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용기 있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나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린 문의 모험으로 부르신다. 그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이 친구가 있다는 뜻이요, 진정으로 복을 받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서로 인정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성장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며 만나는 관계는 상황에 따라 깨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인간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의 관계는 감정과 조건을 넘어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진정한 우정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영적 친구와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통치를 인정하고 맺어진 관계는 오래된 나무처럼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우정의 관계가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로 우리 모두의 관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님 이 세상은 참으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주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좋은 우정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도록 좋은 친구를 허락하여 주시고 내가 또한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며 참된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게 해 주십시오 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와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오늘 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로 저희를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악한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원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댈만한 예수님



(
86)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또 낙심해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면 매우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친구에 대한 명언을 몇 가지 조사해 봤는데요. 명심보감에 열매가 없는 과일 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가 없는 친구는 사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잘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라고 조언했고, 조지 오버트 목사님은 오래된 친구가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요즘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때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친밀한 우정을 우리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친밀한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쫓기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토로했는데요.

그리고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털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형편을 들은 후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울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과 어려운 형편을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발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진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hen)‘입니다. ’매력, 아름다움, 매력적인 인격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러분과 저에게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고 깨진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구가 될 때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넉넉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영적 친구의 관계가 아름답게 조성되고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9W3XwepXr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좋은 친구 관계로서 함께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친구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이 때에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고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도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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