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279장)

 

오늘부터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첫 시작은 “슬프다”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에카’인데, ‘아이고!’라는 뜻입니다. 고통과 슬픔, 놀라움을 표현하는 감탄사죠. 예레미야애가는 이 슬픔의 감탄사속에 전체 내용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과부로 비유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과부는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데요, 예루살렘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뽐내서 많은 나라에 존경을 받던 공주와도 같았는데, 이제는 과부처럼 처참한 신세로 떨어졌다는 것이죠. 유다는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 죽도록 수치를 당하며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노래지요. 그래서 슬픈 노래, 애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슬픈 애가의 무대 역할을 하는 첫장으로, 비참한 예루살렘의 현 모습과 참상을 당하게 된 이유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비탄속에서도 가져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처참하게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장을 여러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자가 과부로 표현되고, 공주가 강제 노동자로 전락한 격입니다. 삶의 환경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깨져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이 가슴을 치며 울어도 위로하는 이 하나 없고 전에는 절친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럽던 이스라엘의 도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성전에서 드리던 절기 제사들도 끊어졌고, 집도하던 제사장들도 탄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것도 단절되었으니, 예루살렘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 처한 것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저 울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대적들에게 짓밟히고 조롱거리가 된 것은 유다백성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악해서’였습니다. 그 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곤고함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힘없이 도망치는 백성들을 사냥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런 절망적이고, 패망적이고, 기운이 쭉 빠지는 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과 여호와의 돌보심을 간청했습니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망해버린 예루살렘성과 무너져 내린 성전 잔해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돌보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망해버린 남유다의 상황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시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한 자는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되며,

성도는 하나님의 품 외에는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죄악의 길은 처음에는 넓으나 마지막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며,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누리던 모든 축복과 영광도 동시에 사라지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가 평안한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 삶에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즉시,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혔을 때부터,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친밀하게 하고,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종교생활만 될 것이요, 아무 유익이나 성장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복을 다 받게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주는 샘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장27절)


https://www.youtube.com/watch?v=RLNmfDkAl-Q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친밀하게 사귐을 갖는 것이 성도에게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의 슬픈 노래를 보면서, 새 희망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 449장)

 

바른 교훈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바른 교훈이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이란 교회 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자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왜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했을까요? 교회안의 성도들이 각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고, 건강한 가정이 이뤄지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안의 다양한 부류의 성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요청했습니다. 먼저 나이가 든 남자들에게는 절제와 경건과 인내를, 젊은 남성들에게는 신중함을, 나이많은 여성도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고 경건한 몸가짐을 갖추는 것을, 젊은 여성도들은 잘 훈련받아 집안을 돌보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성도들이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 당시 복음과 상반되는 거짓된 교리로 성도들을 오염시켰는데요, 그들은 성도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보다 그저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고, 건강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고 작은 일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성도들은 일반 성도들을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행함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어떤 본을 보이라고 했을까요? 디도에게 책잡히지 않는 건전한 언어생활과 모든 선한 행동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을 먼저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교회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첫째는 목회자요, 둘째는 평신도 사역자와 교사들입니다.

그들이 바른 교훈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교회는 그저 말만 무성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요, 그들이 가르치려는 성경도 보잘것 없는 허접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일전에 기독교 신문에서 요즘 청년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조사한 통계를 봤는데요. 그 첫번째는 어른 성도들의 모순된 신앙생활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기독교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해 보니 부모나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삶이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믿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염증을 느낀 것이죠.

 

특히 요즘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야 할 정도의 삶은 되지 않게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이 귀중하다고 외쳐도, 성도들의 삶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는다면 복음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테니까요.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한다면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죠. 믿음과 행함은 따로 있지 않고 수레바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의 바퀴가 크고 행함이 적다든지, 행함은 크고 믿음은 적다든지 이건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약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성도는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고,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실함을 드러내지요. 그런데 믿음이 있다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이게 야고보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도에게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배우면 행할 것이다! 그럴 때 가정과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며,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도 바른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 교훈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 실천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뭐죠? 바로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네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 사랑이 곧 바른 교훈입니다.

오늘도 바른 교훈을 따르십시오. 이 교훈은 우리를 살릴 것이고, 가정을 든든히 세우며, 교회를 강하게 세우고,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것입니다.

인생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이 생명 살리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오늘도 바른 교훈, 즉 복음을 받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t6rZ46PC4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의 나이, 우리의 직분, 우리의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가정과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 전에 우리들이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를 바른 교훈을 실행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래서 가정을 든든히 세우고 교회를 강하게 세워가는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생명의 안내자가 되게 하옵소서.

 

 


(찬 320장)

 

오늘부터 디도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두 명이 제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디모데요, 하나는 디도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젊은 동역자로서 디도서는 그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고 안디옥교회 출신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레데교회와 고린도교회를 맡겼을 정도로 신실했는데요.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할 때 바나바와 디도를 데려갈 정도로 가까운 동역자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지만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후에 디도를 그레데섬 감독으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디도가 얼마나 신실한 동역자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디도서의 중요 내용은 무엇일까요?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그 올바른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디도서를 통해 ‘올바른 가르침인 복음을 정확히 가르쳐야, 올바른 믿음이 생기고, 세상의 모범이 되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입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매력적인 교회를 세우려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디도서를 읽을 때,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내가 바로 교회를 지키는 디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적용하며 말씀을 읽을 때, 바울의 메시지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음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데요, (1절)에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인 나 바울은’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쓴 서신에 나타난 특징인데요, 바울은 여기서도 자신에 대한 바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의 자격을 설명하는데요,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고,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데요, “대접을 잘 하고,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이렇게 바른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쳐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지도자가 건강하게 세워질 때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으니까요.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바울이 있었고, 제자들이 있었고, 디도가 있었고, 그들이 교회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각자가 바로 교회를 세워야 할 디도입니다.
우리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십시오.

요즘 얼마나 우리나라에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습니까? 또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들이 벌떼처럼 왕왕거리며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공격하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가 바로 디도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잘 세워서, 다음 세대에게 아름답게 물려줍시다. 진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320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임을 알고, 우리의 신앙을 잘 지키도록

매일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지켜야 할 신실한 디도들이여, 오늘도 여러분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나가십시오. 저도 말씀과 기도로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 건강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보존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지켜온 교회를 주님 손에 올려드립시다.

오늘 디도되어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심지가 견고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는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오늘도 샬롬의 평안이 함께 하며,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결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sUZoPQLRY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시대에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단에게 영혼들이 꾐에 빠지고, 사탄의 세력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신앙을 전수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건강하게 일어나야 할 교회들이 여러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교회를 보존하게 하소서. 복음적인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소서. 또한 성도인 우리가 교회임을 알고, 건강한 신앙을 지켜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소서. 부족하지만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모두가 연합하게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254장)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은 추락하며 떨어질 때보다 승승장구하며 올라갈 때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짜 큰 죄는 승승장구할 때 범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가 점점 더 부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다윗과 백성들은 영적으로 게을러 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성공에 취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한참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매서운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깨닫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1절)은 말씀합니다. 정확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승승장구하다 보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라의 총 인구조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격동시키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윗은 결심한 대로 군대장관 요압을 불러 전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이 백 배나 더하게 하실 백성의 수를 왜 헤아립니까?’라고 반대했지만, 왕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따라 9개월 20일간 인구조사를 한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에서 칼을 뺄 수 있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남유다 사람이 오십만명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야 자책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10절)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그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년 기근과 석달 동안 대적에게 쫓기는 것과 사흘 동안 전염병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손에 쫓기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이 복이 될까요?
여러가지로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왜 다윗의 인구조사는 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말씀의 적용이 명확해 집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예전에도 여러번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다윗의 인구조사가 하나님의 재앙을 불러왔을까요?


사실은 인구조사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실체의 핵심은 다윗의 교만입니다.

다윗은 나라가 든든히 서고, 왕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고, 전쟁마다 이기고, 자신이 명령을 받드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신앙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잘 했으니 이 정도가 됐지?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업적을 이루었겠는가?’ 내심 이런 자만이 차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의 속내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대입시켜 다윗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게 하고 징계하시고자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길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고 자신을 높이는 영웅심리에서 내려오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로 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다윗왕



 우리도 살다보면 어떤 신자는 큰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는 듯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평안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에 인색하고, 봉사도 안 해도 하는 일만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작은 죄를 지은 것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사사껀껀 간섭하시고 들어오십니다. 목회자가 보기에 이런 죄들은 회개했으니까 그냥 넘어가셔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냉혹하게 다루십니다.

어떤 신자는 왜 큰 죄에 빠져도 그냥 넘어가시지만, 어떤 신자는 여러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징계하실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다른 나라들은 타락해도 하나님께서 촘촘하게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족속도 그들의 죄가 차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에게는 혹독하십니다. 광야 40년을 보면 물없다고 원망하면 징계하시고, 모세에게 불평하면 징계하시고, 조금만 잘못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는 타락해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게서 태어나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나라들을 이끄는 영적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다른 나라면 몰라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위태롭습니다. 실로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왕의 지팡이가 내려가서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nPprpefnc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다고, 하나님의 징계가 많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타락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고, 당신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할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고 많은 것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미운 아이에게는 떡하나 주지만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댄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지만 내 자식이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이와 같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고, 어려움이 많다면, 하나님께서 작은 죄라도 심상히 여기지 않는다고 여기신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낮추시고 훈련하시고, 징계하신다면 다윗의 사명이 있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며, 주님의 복음을 지켜야 할 등불의 사명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등불의 사명이 있음을 알고,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찬 304장)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언약 커버넌트는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 인격적으로 맺어진 약속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커버넌트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신실하고 철저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언약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중히 여기고 신실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은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년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다급해진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는데요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아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진멸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으므로 진멸당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부역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언약을 위반하고 기본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약속은 소중하고 무겁게 다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결코 인생을 가볍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2)에 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을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열심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민족적 배타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열심으로 훼손한 것입니다.
이 열심은 사울이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 나아가 후손에게까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의도가 좋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의도와
유익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이어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사울의 죄를 속죄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집안 사람 일곱을 요구했고, 다윗은 이에 응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안의 작은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들을 존중히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약에 따라 구원받은 성도는요 약속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본 덕목으로 갖추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보면,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기억해서 므비보셋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특별히 므비보셋을 아꼈는데, 언약에 따르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다윗은 맹세를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의 대상인 므비보셋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마지 못해서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사명을 이루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가 처형당한 자들의 시신을 밤낮으로 지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름으로써 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겁게 여기는 마음과 함께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민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요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신의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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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병태 저자의 하나님의 퍼즐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바이텍 시스템 이백용 회장은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크고 놀라운 약속만 바라보고 좋아서 쾌재를 부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백용 회장은 덧붙여 말한다.
어떤 분이 선물로 복에 관한 성경 말씀이 적힌 나무패를 주셨는데, 구절이 참 좋았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다음 구절인 15절에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줄은.
우리가 범했던 실수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한 약속만 보고 들떠 있던 우리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곳도 주목하라고 하신다. 참을성 없는 우리에게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을 첨언하고 계신다.
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복된 약속을 주셨지만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훈련 과정 없는 축복은 해가 될 수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과정인 간과의 영광은 변색될 우려가 짙다. 누구나 고난의 터널을 지나 약속을 받는다. 훈련의 과정을 거쳐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건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이 승리의 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인생 퍼즐을 풀어가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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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풀어가는 현장은 바로 고난의 터널을 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고, 인내를 거쳐서 그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거는 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Xm0FX_Oas

말씀의 결론입니다.

 

- YouTube

 

www.youtube.com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언약,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완수하자 비로소 가뭄이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가 응답됐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오래 전 무지개를 바라보며 언약을 기억한 노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도 다윗처럼 언약의 신실하고 철저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사람과 약속도 신실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이요, 경건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과의 약속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함부로 약속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킴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때가 오면 이루어질 것이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은 바로 그 약속의 수종드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수종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귀한 그런 축복의 현장에 반드시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강력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주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기브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특별히 환경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픈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시옵시사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용하소서. 언약의 통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당당하게 하시고, 부유하며 강건하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 충만한 복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은총과 자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 드립니다.

 

 



(찬 31장)

세상에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배우고 사람들을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네 가지가 있어요.
엎질러진 물, 시위를 떠난 화살, 흘러가 버린 시간, 내뱉은 말입니다.
특히 이 가운데 말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말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은 한 무명의 여인의 말을 통해서 성읍 백성이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서론이 되는 전반부를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베냐민 출신의 불량배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대적해서 일어났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이 세바를 따르게 됩니다. 다윗이 아마사에게 3일 이내에 유다 사람을 소집하게 했는데, 그 일이 지체되자 아비새에게 세바를 쫓게 합니다. 요합은 개인적 감정으로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인 후, 동생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쫓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바는 이스라엘 무리를 모아 벧마아가 아벨로 갑니다.
요압과 함께한 백성이 성벽을 헐려고 하자,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러 성을 멸하려는 이유를 묻습니다.
요압이 세바만 내주면 성을 헐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여인은 아벨 백성과 의논해서 세바의 머리를 배워서 요압에게 던진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3~14절)에서 요압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아마사를 죽이는 사이, 세바가 이스라엘 지파들 지역을 다니며 선동을 해서 무리를 모아 아벨성에 이르게 됐습니다.
세바가 ‘다윗과 나눌 분깃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는 연설로 다윗과 백성들을 이간질하자, 적지 않은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세바의 관심사는 나라의 평화와 백성이 하나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그저 자신의 분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를 따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동체 교회 안에서 우리의 말은 우리의 얻을 이익과 상관없이 정직하고 일관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15~16절)까지 내용은 요압은 아벨 성으로 가서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 성벽 밖에 성보다 더 큰 토성을 쌓았습니다.
토성을 통해서 성벽을 공격하고 성읍 안으로 진입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곧 진압 작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아벨 벤마가에서 협상 전문 여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인은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그 여인을 그저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소개했는데요 당시 모든 상황이 지혜롭지 않은 어리석은 것임을 고발하는 듯한 어감을 풍기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요압의 군대가 쳐들어올 수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여인이 나섰다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분별할 지혜와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에 보면,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매우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자신을 ‘여종’으로 낮추면서 대화를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지혜로운 말에는 바른 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청하는 자세, 오해없이 전하기 위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의 습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 성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벨성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요압은 자신은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다고 거듭 반복하며 부정하는데요.
여인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의 성을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을 삼키는 것이라고 신앙적 차원에서 설득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아벨 성을 공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요압 장군은 역모자 세 발을 내주면 성벽에서 떠나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여인은 백성을 설득해서 세바의 머리를 잘라 요압에게 던져 주었고, 요압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성은 협상의 기술 또는 화술를 뜻하는 ‘지혜 있는 여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성경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했지만, 이 여성은 진압군의 지휘관 요압에게 매우 논리적으로 평화적인 해결안을 제시하고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그녀는 세바의 반란군 때문에 아벨벧마가를 멸망시킨다면, 결국 다윗 왕정의 통일성에도 균열이 가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요압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요압은 이 여성의 설득에 동의하고 세바만 넘겨달라고 요구했죠. 이 여성은 다시 아벨벧마아가 백성을 설득하는 과제를 떠안고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렇게 중재 협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 그녀는 그 일을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결국 그녀의 설득이 통했고, 세바의 수급을 요압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동족 간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 여성은, 이야기의 전면에서 나서서 온갖 욕심과 속임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남성 등장 인물들보다 독자들인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벨성 백성 앞에 오직 지혜를 가지고 나아갔다”라고 돼 있는데요 그 지혜는 요압의 군대보다 강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진리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말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야 될 주님의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박영선 저자의 ‘인격의 제자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생각과 말입니다. 생각은 말을 결정하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말은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먼저 하는 행동입니다. 몸으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나타나는 첫 번째 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우리의 생각과 말에서 분명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고 박윤선 목사님은 자신을 찾아온 목사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목사님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기침을 하셨답니다. ‘하지 말라’ 이거죠 그러면 목사님들이 ‘싫어하시는구나’하고 말을 잊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다시 험담ㅇ을 하면 박윤석 목사님은 돌아앉으신답니다. 대단하죠? 그렇다고 여러분은 박 목사님의 이야기를 본받아 기침을 하거나 돌아앉고 그러지 마세요. 험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하지 마십시오.
“점심 먹었어?” 이런 식으로 지혜롭게 화제를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어가는 생명도 하나님 앞에 돌이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서 보면 지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요 특히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낮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내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또 (잠 4장 7절)에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내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라”


https://www.youtube.com/watch?v=zI9eNeHpIMY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는 허망한 최후를 맞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말로 하나님 기업의 소중함을 일깨운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성 전체에 생명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또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고 지혜로운 말을 해서 생명을 살리는 성도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밝히시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생명 살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세바가 허망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성읍을 살린 지혜로운 여인의 말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이 여인처럼 지혜롭게 하시고 명철의 지배를 받는 성도로 살게 해주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말과 생각 속에 지혜를 넣어주시고,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복된 말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말 하게 하시고, 남을 비난하거나 흠을 잡는 말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사람을 살리고 살리기 위하여 격려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참된 주님의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지혜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를 주실 것을 믿으며, 그 입술의 말이 지혜롭게 되기를 바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찬 150장)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오전 9시경부터 3시간에 걸쳐서 참기 힘든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역설적이기에도 가장 고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었으며 인류에게 가장 큰 소망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에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에 이미 영혼은 떠났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권한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고난의 과정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오롯이 감당하신 것이지요.

왜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생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아시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며 공감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손톱 밑 가시가 남의 큰 병보다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 그분께 그 고통을 낱낱이 아뢰 보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주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주님이 다 헤아려 주시고 참된 위로로 우리를 지니 만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까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고난이 실패가 아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과 문제만 바라볼 때는 시련을 왜 주셨는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때로는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난 없이 평탄하고 안락한 삶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안락한 삶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아가지요.
하지만 십자가는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섭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아들 예수님께 허용하셨고 고통이 아니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은혜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 습관과 이기적 자아로 인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고난과 실현을 통해서 다듬어 오셨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넓은 폭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문에 낙심할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아름다운 성품을 갖도록 우리를 빚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 보이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 보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상처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권한이 나의 권한이 되었고 십자가의 은혜가 나의 은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그리고 공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까지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문제가 있을 때 상황이 너무 힘들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까지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괴로울 때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모든 고난과 문제를 극복하여 이기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kS_MgZ7NA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해서 위로받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아픔까지도 충분히 공감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신 주님 우리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잘 지고 결국 구원의 승리에 이룰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오늘 또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게 하시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빌라도의 재판

 

 

 (찬 144장)

 

우리가 경기에서 심판에게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정입니다. 역시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혹 홈팬들의 함성과 야유에 압도당해서 공정하지 못한 판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판사도 뇌물이라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판정을 굽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빌라도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공정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정함보다 군중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먼저 본문 (15~19절)까지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십자가형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땅은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견한 총독 빌라도만이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고발과 거짓 증언에도 그저 침묵을 지키셨는데요.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죄 없는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고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도 그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며 남편 빌라도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신속히 정의로운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너무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알량한 안위를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20~23절)에 보면 군중의 압력이 계속되는 내용인데요.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를 사면해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결백을 발견한 이상 특별 사면권을 곧장 예수님께 사용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의식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군중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악명 높았던 죄수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가 재차 군중에게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모습에 실망했고 그 실망은 분노로 번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군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정치적 메시아, 즉 나를 번성하게 해주고 잘되게 해주고, 형통하게 해주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나의 삶 가운데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고, 또 그 낙심과 실망이 곧 분노로 바뀔 수도 있죠.
또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있는 이 군중들의 모습은 얼마든지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일 수도 있고요.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1881년작 ‘이 사람을 보라’. 문카치가 그린 ‘예수 3부작’ 중 하나.


 (24~26절) 말씀은 빌라도가 결국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정의와 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휩쓸렸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자손들에게 돌리라며 저주를 자처하기도 했는데요.

빌라도는 사회의 정의가 깨지는 것보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마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일에 무지하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그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면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고,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주님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또 성도라고 하는 근본적인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명이라는 책임을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또한 직분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또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내에서 잘못된 많은 문제와 비리와 사건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치와 진리의 존귀함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라도 내가 지켜야 할 사명의 책임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성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빌라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발당해 잡혀 온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할 놀라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의보다 정치를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 권세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이 세대에서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의 모습과 성난 군중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것처럼 내가 바로 빌라도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이 아닐까 적용해 보면서 오늘 또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ecwYFct3tY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빌라도 같은 자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과 같은 자인데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억울한 누명을 쓰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의 사명의 길을 가셨나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지키게 하옵시고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는 성도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오늘 또 인도하시고 교회를 지켜주시며
당신의 나라 안에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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