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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즈킨트의 단편소설집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에 한 젊고 촉망받는 여류 화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는데, 어느 한 평론가에게 당신의 작품은 훌륭하지만 깊이가 없다.”라는 비평을 듣습니다. 그 이후 이 평론가의 말이 실렸고, 사람들은 뒤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깊이가 없을까?” 고뇌하며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녀는 피나는 노력을 해 봅니다. 도대체 깊이가 무엇일까? 어디에서, 어떤 기준으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에 메달립니다. 그러다 결국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라고 결론을 내리죠. 자신이 깊이가 없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외출도 안 하고, 방문도 거부하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모든 것을 방치합니다. 한 때 유능한 젊은 예술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모든 그림을 찢어버리고 텔레비전 방송탑에 올라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단편집은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의 위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큰 배를 작은 키로 움직이게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도 그런 영향력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말보다는 비판적이고, 비평하는 말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부정적이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그 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관대한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인내할 줄 알게 되고, 격려의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높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5~6)에서 작은 불씨가 많은 것을 태우는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이요, 불처럼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8)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엄청난 파괴력과 자생력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스스로 제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복있는 혀를 갖고, 복있는 말을 하며 살 수 있을까요?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고 금방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영어를 배우고 써 먹고, 활용해야 잘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되게 말을 잘하고,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말에 절제를 하려면 자꾸 훈련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훈련받아야 할까요?
우선 야고보 사도는 (1)에서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이 있으므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무도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 뜻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행함없이 남만 가르치려고 하는 말선생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은 줄줄이 알고, 남을 잘 가르치면서 자신은 정작 말로만 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복된 말을 하고 살 수 있을까요?
(9~12)까지는 예수 믿고 나서도 한 입으로는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는 저주를 퍼붓는 자가 되지 말라!
그렇게 이중적인 말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온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이 없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럼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면 주님을 닮게 될 것이요, 주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처럼 말하게 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따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말을 하는데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기분나쁜 말이 들려왔을 때, 첫째,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먼저 확인해야 하고, 객관적인 사실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 아니라면 일부러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말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대부분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꼭 해주고 싶고, 콕 찔러서 가르치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곱씹어 보다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것이 사실이고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됩니다.
(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지존파 검거,1994년9월21일.


 예전에 끔찍한 살인 기계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존파 멤버중에 김기환 씨가 있었는데 그는 사형장으로 가기 위한 최후 법정 진술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습니다. 1977년 창 밖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던 한 겨울날 교실에서 크레파스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무시당하고 욕을 듣고, 따귀까지 맞고 벌을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은 크레파스를 살 형편도 아니었는데, 그런 모욕을 받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미웠고, 다 죽이고 싶었다.”고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한마디가 한 소년의 마음을 멍들게 해서, 결국 처참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 버린 것입니다.

루빈스타인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폴란드에 한 소년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소년은 노력해서 겨우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나 교수로부터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네 손가락은 너무 짧고 굵다. 유연성도 부족하다. 다른 악기를 배우도록 하라.” 그래서 다른 악기를 배워 보았으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만찬회장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연주가 끝난 뒤 한 노신사가 다가오더니 너는 피아노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 열심해 노력해 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노신사가  루빈스타인이라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소년을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그가 바로 피아노 천재로 불리는 잔 파라데우스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향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베드로 였지만 그는 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담긴 이 한 마디의 말에 감명받아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6FIw6_NlU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게서 오늘 할 말을 입에 담아주십시오. 대신 하지 말아야 할 때는 굳게 입술을 닫는 절제가 있게 하옵소서.






 

 

(461)

 

 우리 기독교인에게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이냐 어딜 갈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요 죽느냐 사느냐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처럼 중요한 주제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무 유익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본다면 귀신들도 한 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한다고까지 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에 무용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허탄한 사람인지 꼬집어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함을 통해 믿음을 온전하게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모든 것인 이삭을 바치는 행함을 통해 온전하게 열매 맺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바알과 아세라보다 높은 신임을 믿은 라합은 하나님께 운명을 맡긴 행함을 통해서 살아있는 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의 구주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고백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고백을 드러내는 행함이 없다면그 믿음은 구원을 주지 못한다(14)’, 유익이 없다. (16), 헛것이다(20), 또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24), 죽은 것이다(26)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서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고요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행위로 증명되는 참된 믿음만이 주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믿음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고백한 믿음이 오직 행함과 순종으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진짜 살아있는 믿음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럼 믿음과 행함을 볼 때 무엇이 먼저일까요?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중요하죠 믿음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행함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믿음 만큼은 아니지만 그 믿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그것을 쌓아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알려면 행함을 보면 그 믿음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가짜 믿음인지 포장만 그럴 듯 한지 실제적인 믿음인지 행함을 통해서 그 믿음은 증명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에 따르는 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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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김병삼 저, ‘치열한 도전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989224일 뉴질랜드로 가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기가 호놀룰루 공항을 이륙했다.
이 보잉 747기가 높은 상공에 이르렀을 때 화물칸에 옆문이 뜯겨 나가며 항공기 옆구리에 크게 구멍이 났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승객 9명이 허공으로 빨려나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났다. 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던 기장은 데이비드 크로닌이었다.
그 긴박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기장 크로닌은 38년 비행 경험과 지혜를 짜내야 했다 고장 난 두 엔진의 추진력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비행 속도를 결정해야 했다.
장거리 비행에 맞춰 연료까지 많이 실은 상태였고 비행기 속도를 낮추는 윙플랩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로닌 기장은 믿기 어려울 만큼 기적적으로 매끄럽게 항공기를 무사히 착륙시켰다.

얼마 뒤 기자들이 처음. 화물칸 문짝이 날아간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승객을 위해 잠깐 기도한 뒤 곧바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코로닌 기장은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쳤다.
일터를 사역지로 가꾸는 것은 맡은 일을 탁월하게 해냄으로써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이웃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교의 지도자이자 비즈미스맨인 윌리엄 딜러의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주일 아침에 하는 일과 주중에 하는 일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일종의 이중생활을 이어가는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일상생활 중에 하는 바로 그 활동들이 곧 영적인 일이며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이어준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영성은 일이 곧 기도라고 속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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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활동들이 곧 영적인 일이다.”

여기서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준다라고 하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믿음에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지요.
죄의 본성을 거슬러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맞게 내 뜻을 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죄와 이기심에서 떠나기로 결단합시다

 

성도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행함으로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uPyAm7IYLw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돼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믿음이 먼저고 믿음이 우선이지만 행함이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요, 무용하다고 하는 이 귀한 진리를 잘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 삶의 자리에서 일상에서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오늘 또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증명되는 그런 가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 인도하시고 감동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12)

 

우리 삶은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의 삶이 온통 문제 투성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인생이 복잡하게 꼬일 때 우리는 신년에도 당황하고 분노하고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삶이 뜻대로 안 되고,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올 때, 이렇게 하라고 오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맏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사람들이 시험은 안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두 종류죠. ’Temptation(유혹)‘이 있고, 유혹은 사탄의 욕심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Testing(시험)라 불리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테스팅을 허락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받는 여러가지 시험은 시련일까요, 유혹의 시험일까요?

오늘 (3)에서 이렇게 정리해 주십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이든 유혹이든 결국 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죠. 믿음을 성장시키는 시련이 된다는 것이죠.

 

(2)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원어: 당할 때마다의 뜻이다)

영어성경 IF(만약)을 쓰지 않고 whanver(언제든지, 아무때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너희가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마다, 닥칠 때마다"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련은 파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덮쳐오는 큰 파도 같은 것이라는 거죠.

때로는 경제적 문제, 가정의 문제, 관계의 관계, 자녀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건강문제나, 또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타인의 잘못 때문에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련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어떻게 하면 이 시험과 시련이 믿음의 시련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당신에게 오는 시련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2) “형제들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련이 기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기뻐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요? 여기 중요한 단어가 여긴다입니다.

시련가운데, 기뻐할 수 없지만 기쁘게 여기라”, , 그렇게 간주하라, 그렇게 결정하라 마음으로 정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할 수 없지만 기쁨으로 여겼던 경우가 있을까요?

(5)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전하다가 시련을 당했는데, “사도들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공회앞을 떠나니라(41)“ 고난, 핍박가운데, 시련가운데 있었지만 오히려 기뻐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 빌립보 감옥에서 갖혀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라고 가르쳤습니다.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새해에도 시련을 올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오지만,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이것은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왜 믿음의 시련이 복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시련이 저절로 축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인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고생을 해야 합당한 계급장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인내가 없이는 성장도 없고, 성숙도 없어요. 성장과 성숙이 없는데 복이 주어지고 환경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죠? 감당하지 못하니까요.

 

여러분도 수없이 주변에서 감당할 수 없는데 재물이 주어져서 타락하고, 가정이 깨지고, 더 탐욕적인 사람이 되고 허망하게 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어야 복이 됩니다. 건강이든, 직위든, 명예든 말이죠.

 

공기의 저항없이 독수리가 날 수 없고, 부력이 없이 배가 물위에 뜰 수 없듯이, 온순한 바다에서 노련한 뱃사람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깝게 하시고,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불만족이 아닙니다. 성숙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이것을 알 때 시련을 성숙의 기회로 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함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시련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여기 인내는 우리가 과거에 알던 참을 인()자 세 개를 쓰는 무조건 참는 뜻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으면 홧병이 돼요.

본문의 인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나를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ㅎ의 시간과 방법에 나를 맡기고 그 은혜가운데 붙잡힌 바 된 것을 인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포기하지 말라! 붙잡고 메달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인내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syaying power’ 머물러 있는 힘, 쓰러지지 않고 머물러 있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운동회에서 단체 줄다리기 할 때, 있는 상대편이 잡아 당길 때,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잡고 버티고 있어야 하죠. 이게 바로 syaying power입니다.

이게 인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때는 자신만만한 때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은 없다를 외치며 산의 정상가운데 서서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힘들어하나? 조금만 더 참고 올라오면 나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가르쳤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미끄러졌고 자신이 골짜기의 구렁텅이에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이 구렁텅이를 벗어날 수가 없는 환경과 점점 용기를 잃어가는 자신의 상태를 봅니다. 정상에 서서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는 줄을 단단히 붙잡고 syaying power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결국 그 줄이 당신을 당겨낼 것입니다.

모세에게 만약 미디안 광야 40년의 훈련과정이 없었다면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40년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의 불평을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지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밧줄이 자신을 끌어 당길 때까지 기다린 것이죠.

하나님의 때가 오자, 요셉은 형들의 큰 실수를 용서해주는 큰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살기등등한 위협가운데서도 그렇게 도망다니며 인내하는 광야생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편에 기자가 되어 깊은 묵상으로 많은 사람의 심령을 울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야고보 사도를 통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이룸을 통해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당하는 시련도 기쁘게 여기라!‘

 

새해에도 시련은 오고, 유혹도 오고, 연단도 옵니다. 꽃길만 걷는 것은 없어요. 꽃길만 걸으면 사람 망칩니다.

하지만 신발 밑창에 꽃을 깔면 밟는 곳마다 꽃길이 됩니다.

우리의 발 밑창에 깔아야 할 것은 바로 시련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인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저 말씀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syaying power를 한다면, 주님은 그 줄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주십니다.

올 한 해 시련이 없다고 믿는 미숙한 신앙이 아니라, 시련속에서도 성장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O_voKGggjE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아버지시오, 창조자시오, 목자가 되시며, 동행자 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시련과 시험과 유혹속에서도 성장하고 익어가는 성숙한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말씀을 통해 깨닫고, 바로잡고, 온전히 세워지는 강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어떤 복도 능히 감당해 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찬 449)

지금까지 전도자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실제로 인생은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지요. 아니 한 시간, 단지 5분이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안정할 만한 직장이나 직업이 없어지는 세상이다보니 계획을 세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이처럼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본문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돕고 나누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마치 빵을 물위에 던지는 것과 같이 추후에 내게 전혀 보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선을 베풀어라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그렇게 한다면 여러날 후에 도로 찾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일을 일곱이나 여덟명에게 나눠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언제, 어떤 재앙이, 어떻게 임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

나도 어려운데 누구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렵다는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어서, 가난해도 부자라고 생각하면 베풀 수 있고, 부자라도 가난뱅이라고 생각하면 나눠 줄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약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있고, 또 어떤 형태로든지 내가 베푼 도움이 다시 돌아와 내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인생만사가 예측 불가능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죠. 전도자는 예측가능한 일도 있다고 소개하는데요,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보면 비가 쏟아질 것이 예상되고, 나무가 쓰러져 있으면 그것이 스스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적어도 이런 예측은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할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예상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민만하다가는 결국 세월만 보내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람이 어떻게 불는지 모르지만 파종시에는 씨를 뿌리고, 여인의 배가 불러오면 산달이 가까운 것을 알고 출산준비를 하듯 미래가 불확실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알고,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이것저것 시도하고, 노력하고, 부지런히 행하면 결국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9i6Gj6YpwY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주어진 현실에서 즐거운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전도자는 빛과 어두움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좋고 나쁜 가를 설명합니다. 즉 생명은 좋은 것이고, 기쁨과 즐거움, 젊을 때가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이 좋은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죠. 빛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캄캄한 날이 찾아오고, 여름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겨울이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청년의 날이 좋아서, 마음껏 청년의 날만 살고 싶어하지만 나이가 들고, 허리가 휘고, 무릎이 시린 늙어가는 시간이 오는 법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신이 죽어서 눈감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 날이 있음을 염두해 두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어차피 빨리 흘러갈 세월이니, 어릴 때와 검은 머리가 풍성할 때에 걱정근심하지 말고 즐겁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이고, 향락적인 방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생활을 즐겁게 사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현재(present)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present)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요. 또한 당장 코 앞의 미래도 알지 못하기에 실수하고, 실패하고, 실망합니다. 이런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때 바로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리가 아니라 바로 지혜입니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지혜말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나는 것들을 쌓고 모으기 위해서 악착같이 산들 결국 죽으면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결국 없어질 것들을 위해서만 몰입하고 살지 말고, 우리는 사랑, 평화, 존귀함과 같은 영원한 가치를 얻기 위해 현재를 부지런히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아름다운 세상과, 감사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도 일상에서 일하는 즐거움, 만남의 즐거움, 음식을 먹고 대화를 하는 즐거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음악을 듣는 즐거움, 눈으로 보는 즐거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복된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선물이니까요.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우리는 전도자의 교훈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부요한 사람이라고 믿고 마치 빵을 물위에 더지는 것과 같이 기대나 조건없이 나눠주고 베푸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지런히 맡은 일을 하고, 주어신 현실에서 감사하고 즐거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귀한 말씀대로 오늘 선물로 주신 하루를 살겠사오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나님의 하루를 선물로 받은 우리로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오니, 주님 받아주시옵소서.

 

 

(찬 425장)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성공은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 하는 속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가느냐 하는 방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조금은 더디 가더라도 그 인생길에서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으며 성공적인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도자는 우매한 자로 인해서 폐해와 그 결과의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우매와 지혜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이 은혜로운 반면에 우매자의 말은 자신을 삼키는데 시작은 우매이고 결말들은 미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자의 말은 타인에게 유익한 좋은 열매를 맺지만 우매자의 말은 스스로 망치며 해치고 타인에게도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매자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인데 남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은 결국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자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주심으로 미래를 대비해 유익을 얻게 하시지만 우매자에게는 아무도 미래의 일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자는 구매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다고 진술합니다.

그들이 성읍에 들어갈 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요 상식적인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는 우매자들이 끼치는 해악을 잘 기억해 그 해악을 피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게으르고 우매한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전도자는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에 화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어리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를 뜻하는데요.

그리고 아침부터 잔치하는 대신들은 어리석은 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쾌락과 욕심을 추구하는 간신들을 가리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왕과 대신들이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좋아한다면 나랏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일이 없겠지요.

전도자는 게으른즉 석가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 즉 집이 샌다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나라와 공동체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으르고 무능하고 부패한 왕과 대신들의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성도는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가정과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마음속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라도 부자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저주하는 소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질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죠.

왕과 권세자들이 자신을 향한 저주의 소리를 들었을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저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과 권세자뿐 아니라 타인을 저주하는 것은 여러 모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특히 성도는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에 권세자들을 저주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개인의 입장을 떠나서 공동체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이 지혜롭게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력을 바르게 사용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할 때 자신도 평안한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오늘 말씀의 결론인데요. 어리석고 우매한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스스로 망하는 길로 치달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깨뜨리고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 언제나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요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 있고 유익하며 하나님이 쓰시는 멋진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서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 나와 가족과 직장과 교회를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오늘 우리는 전도자의 말을 잘 기억하고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우매자의 말과 행동이 없게 하시고 바른 말 복된 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줄 아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모든 자리를 털고 비우고 떠나갈지어다! 성령 하나님 우리 입술에서 복된 말 지혜로운 말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혜자로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고 지존한 주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484)

 

이런 속담이 있어요.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 큰 둑도 작은 개미 구멍으로 무너진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9)의 마지막 절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작에 여겼던 일이 결국 큰 낭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바로 우매한 사람의 결말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우매자'인데요. 전도자는 우매자가 권력과 힘을 가졌을 때 촉발하는 현상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폐해를 가져다 주는지 설명합니다.
(1~3)의 내용은 죽은 파리가 썩은 냄새를 나게 하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이 지혜와 명예를 망가뜨리며, 지혜자와 반대로 우매자는 잘못된 쪽으로 마음이 쏠리며, 길을 가다가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자는 오른쪽, 즉 좋은 쪽을 주로 살피지만, 우매자는 왼쪽, 즉 잘못된 쪽에 더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모든 것을 볼 때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지만, 우매자는 부정적인 면을 보고 비판하고 낮춘다는 것이죠.

 

이어서 (4~7)에서는 주권자, 즉 권세나 힘이 있는 자가 지혜자의 분을 일으킬 정도로 어리석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혜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손한 자세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자가 떠나면 그곳은 더 큰 재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주권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상식이 무너지는 사태가 나타나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자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명철한 자를 내어 쫓으며, 종들이 말을 타고 다니고, 왕자들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뒤죽박죽한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자를 멀리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여 온 나라를 혼란에 빠트려, 결국 여로보암이 10지파를 싹 데리고 나가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 (5~7)까지는 우매한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무리해서 큰 건축이나 토목공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큰 공사를 하게 하고, 쉼없이 일을 하도록 몰아붙인다는 것이죠. 본문 (11)에서 지혜자를 술객, 마술사에 비유하면서 주문을 걸기도 전에 뱀에게 물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뭐죠? 지혜자가 지혜를 베풀기도 전에 어리석은 주권자에게 미움을 받고 배제를 당하게 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왕이 되고, 어리석은 자가 CEO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신앙공동체의 리더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가장이 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오늘 전도자가 독자인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전도자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아라!’는 것이죠. 설령 우매자의 밑에 있다고 할지라도 떠나거나 도망치는 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곳을 지혜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자의 행동이라는 것이죠.

그럼 어떤 사람이 지혜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모르는 것이 우매함이죠. 학식이 높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우매한 자요, 학식이 낮아도 하나님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우매한 자요, 결국 그 우매함이 자기를 망치고, 자기가 있는 곳을 파괴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하듯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도 최고의 지혜시오, 명철함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함이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기도를 통해 쉼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취나는 인생이 아니라, 향취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상식이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님에게 지혜와 능력과 할 말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좋은 일, 선한 일이 연달아 부흥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우리안에 거주하시는 성령하나님,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사를 볼 때 우매자의 부정적인 안경이 아니라, 지혜자의 긍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악하고 더러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신경이 쓰이며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소속된 가정과 직장과 교회을 영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Green Wheat Field (detail), Vincent Van Gogh.

 

(찬 430장)


대부분의 동화나 드라마는 권선징악(勸善懲惡, Poetic Justice)으로 끝을 맺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결국 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가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죠. 전도자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라고 가르쳤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악인이 잘 사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호한 세상에서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왕의 명령을 따르는 신하가 지혜로운 신하이듯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사람에게 주어진 영역에 집중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삶의 모호함속에서 살아내기’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를 이야기하면서 악한 왕이 등장하거나 나라의 관리가 백성을 수탈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악행은 시간이 지나서라도 단죄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악행을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그런 악행을 즉시 징벌하지 않으셔서 악한 자들이 거리낌 없이 악행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지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심판인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때 각 사람에게 합당한 심판이 실행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 악인이 징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어서 (12~14)까지는 하나님이 선과 악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전도자가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되고 악인은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다.
즉 살아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리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진리가 실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의인이 징벌을 받기도 하고 악인이 상을 받는 일마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것을 보고 헛되다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왕과 의견이 다른 신하가 왕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선택해야 한다고 (2절)에서 가르쳤던 것처럼 전도자는 자신은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15~17)에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영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전도자는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생애 가운데 수고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결론을 또다시 반복합니다. (2장 24절, 3장 13절, 5장 18절, 9장 7절)에서 반복되는 것인데 여기서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지 알기 위해서 밤낮으로 잠을 안 자며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능히 알아낼 수 없다고 세 번 반복하면서 이 단락을 결론 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형통한 이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사람들은 지혜를 많은 것을 아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참된 지혜는요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과 고유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을 알려고 하기보다 사람에게 허락된 영역에서 삶을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원하는 것이다라고 전도자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5)에서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말 복잡한 세상사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즐기라는 말일까요? 악인들이 번성하는 세상에 질끈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자기 쾌락에만 몰두하며 살라는 말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싸움에 지친 인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악인들이 번성한다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지 말라!‘ 조급증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싸우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잘 돌봐야 된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나날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지금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일까요?
하나님의 선물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요.
악인들이 벌을 받고 선인들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상식은 자꾸만 무너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에 집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생은 모호하게 이를 데 없지만 전도사의 기자는 그 모호한 생에 사로잡혀서 울퉁불퉁 거리지 말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지금을 한껏 살아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저없이 행복을 누리라는 것이죠.
영원의 빛 가운데서 지금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 우리 인생 전체가 보이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오늘 또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이 모호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다 알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왜 악인이 형통한지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알고 오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너무 깊이 고민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고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될 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안에서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행복한 성도로 살게 해주십시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gFRYfLF3fI

 

 

(29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윗사람이나 권세자들을 따라야 할까요? 그들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항거해야 할까요? 오늘은 전도서 8장 말씀을 통해 권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침 받겠습니다.

1절은 8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인데요.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기를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라고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알기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이치에 맞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스테반 집사가 하늘을 우러러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하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마음에 샬롬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얼굴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미소가 있고,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79)의 말씀대로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합니다.”
지금 일어난 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노를 발한다고 말씀합니다.

 

(2)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왕이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29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백성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말하는데요,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질서요,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으면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질서요,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에 보세요. 새번역 왕이 싫어하는 일은 고집하지 말고, 왕 앞에서는 물러나거라
자기 상식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해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급히 물러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요?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당시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여탈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복형이었던 아도니아가 제단 뿔을 잡고 살려 달라고 해서 살렸는데, 아버지 다윗왕을 모셨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하죠. 이것은 반역의 있는 행동이었죠. 그래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처단합니다.

이처럼 당시 왕의 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알지요.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잘 지킵니다. 지혜로운 자는 왕의 명령이 거북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요, 왕을 배반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안전하고, 화를 당하지 않으며,
(5) 보세요.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신하가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 바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5절 하반부)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잘 분별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이죠.
지혜롭게 왕의 명령을 분별했던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는데,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의 제사에서 온 것을 알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부하죠? 열흘동안 채식과 물을 먹으며 시험을 해보라 합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윤택한 것을 보고 넘어가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대처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6)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7)을 봅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하죠.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 시므이가 온갖 악독한 말로 다윗의 심장을 찢어놓습니다. 시므이를 다윗은 용서해주었지만, 솔로몬 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 죽임을 당합니다. 시므이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입니다.
시므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할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사람을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까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대처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소결론은 (9)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무시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때는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권세를 인정하고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권세자의 권위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 시대에는 왕이 없는데 말이죠.

보세요. 하나님은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를 세우셨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권위를 주셨며, 직장에 가면 사장에게 권위가 주셨으며, 교회에 가면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자녀가 보기에 부모가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사장님, 심지어 목회자도 부족한 점을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전도자는 부모를 거역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머리위에 기름을 바르셔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십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자를 따르십시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주안에서 따르십시오.

 

 나라의 지도자든지, 교회의 지도자든지, 가족의 어른이든지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이며,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도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모요, 윗 사람이 되었다면, 그 권위를 가지고 함부러 남용하거나, 기만을 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직위를 주셨을 때, 선한 기회인 줄 알고 잘 사용해서, 옳은대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에 광채가 빛나게 하시고, 만사에 시기와 때가 있음을 알고 잘 분변하게 하시며, 권위아래 있으면 순응하고 잘 따르는 자 되게 하시고, 권위를 가진 자가 되었으면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어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6iSM1X9dK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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