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463장)

 여호와의 궤가 다곤 신당에 머무는 동안 다곤 신상은 엎어지다 못해 머리와 두 손이 끊어졌습니다
.
언약궤가 지나갔던 블레셋에 아스돗, 가드 에그론 성읍에는 독한 종기 재앙이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언약궤를 가져왔을 때만 해도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7개월을 머무는 동안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던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에 난 종기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결국 그들은 언약계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는데요.

하나님은 블레셋의 성읍에 언약궤가 머무는 7개월 동안 그들의 우상 숭배와 반역을 꾸짖으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앞에서 블레셋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단지 재앙이 없는 편안한 삶만을 생각하다가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꾸짖으셨듯이 우리 잘못을 징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개인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교훈은 놓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죄 문제로 징계가 받을 때가 있음을 알고 혹시 나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요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 성숙하는 길입니다.

 

 이어서 블레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앙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왕에게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고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도 참된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지요.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두려워하면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언약궤를 빨리 돌려주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을 뛰어넘어 그분이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우리 가운데 적용해보면 우리는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깊어지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있으나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가지라는 뜻이죠.
우리가 주님과 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희근 [날마다 천국을 향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베일리라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도 만났는데 그는 평생 농업공학에 몸을 바친 사람으로서 퇴직 후에 히말리아에서 그 지역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업 기술이 열악해서 식량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일리가 가진 아쿠아 폴리스라는 기술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송어의 분비물을 통과시킨 물을 식물에 공급하고 식물에게 준 물을 다시 회수해 순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어의 분비물에는 질산염이 풍부해서 식물의 좋은 비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질산염을 다 흡수하면 물이 깨끗해져 다시 송어가 그 물을 먹는 방식으로 순환되었습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송어도 많이 키울 수 있고 곡식도 잘 자라서 식량이 풍부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남아프리카 해변에서 멋지게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 제가 가진 기술을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도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모든 선물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영원한 보물을 쌓는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런 곳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런 사람 가운데 살면서 제자를 삼고 목회자를 훈련시키길 원하십니까? 제게 주신 모든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진짜 보물 영원한 보물 끝없는 만족을 주는 보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플랜 목사님의 기도처럼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그러한 경험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현실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소홀히 여긴다면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늘 기도하십시오 생활 속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주실 것이오 또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dXHtNMJ2Oo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늘 블레셋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들의 행동을 보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면하길 원합니다. 늘 기도 시간에도 기도하지만 기도 시간 외에도 생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TWO CHARACTERS Deux personnages.


(
찬585장)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형식적인 신앙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실패 원인을 깨닫고 돌이켜 영적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하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영적 전투에서 패하는 성도의 삶의 원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보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하게 되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이 패하게 하셨는지를 물으며 탄식하게 됩니다. 패배 이유는 뭘까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리와 비느하스 때문이었습니다.
 홉리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재물을 강탈한 것과 희망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한 죄로 인해서 그들이 한 날에 죽을 것을 하나님이 예고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귀중히 여겨 그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죄를 물어 그 가문의 저주를 내리실 것이고 홉리와 비느하스의 죽음이 그 표정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성 전투 때도 아간의 범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패배했었지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영적 전쟁은 하나님 앞에 죄가 있으면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원리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에스겔 18장 31,32절)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회개하고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키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서 죽고자 하지 말고, 살고자 하는 인생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살아라. 그리하면 용서해 주겠다.
 회개하고 살아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죄를 사해주겠다.
 회개하고 살아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형통하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내 안에 있는 죄가 없는지 생각해 보고 회개합시다. 회개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는 여러분과 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Jerusalem - The Holy City

 이어서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됐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단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를 앞세워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으므로 법궤를 앞세우면 자동으로 승리가 따라올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전쟁에서 승리하기는커녕 크게 패배해서 전사자가 3만 명에 이르게 됐고 이스라엘의 언약궤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운다고 하나님이 자동으로 함께하시며 승리를 안겨주시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고요 법궤만 있으면 승리한다는 형식적인 신앙에 빠진 결과입니다.
성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신앙으로 넘어지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승리의 삶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길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만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가 대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 때 하나님께 여쭤보지 않고 나섰다가 패배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먼저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이 아간의 범죄를 해결하고 전투에 나설 것을 명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승리에 대한 확답을 얻은 후에 전투에 나가는 것이 승리의 원칙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교회와 영적 싸움을 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영적 전투를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명하면서 성령 안에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해 구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말씀과 무관한 신앙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은요 미신과 같아서 허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은 부적과 같은 것이 무슨 효험이 있는 줄을 알고 그것을 크게 믿고 의지하다, 자신들의 기대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제야 큰 허무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언약궤를 의지했던 이스라엘이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과 무관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아무리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고, 종교적 의식에 열심히 참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미신과 같아서 우리 또한 큰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며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할 때 의미가 있고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의 반석이자 기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11uILQJZHI

 (시편 1편) 말씀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여호와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에서는 “갓난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1장 3절) 말씀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기초가 하나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원래 영적 전쟁에서 패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언제 패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십시오. 성령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그 말씀의 검을 휘둘러서 마귀를 물리치고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여러분 가는 길에 형통이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계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길을 여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법궤를 부적처럼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패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형식적이고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주님 저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말씀으로 세상과 싸우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수종을 들어서 말씀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복된 성도 되게 주십시오.

 

 


2015년 중국의 7조원의 재벌이었던  49세 한룽그룹의 회장 류한은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류한은 중국 남서 스촨성 최대 기업 한룽그룹의 회장으로서 전기, 에너지, 금융, 광산, 부동산, 보안 분야의 자회사를 거느린 부호였다. 류한 회장은 재산만 7조원대로, 한때는 중국 부호 148위에 오르기도 했고, 쓰촨성 정협 3선 위원, 상무위원 등으로 정, 재계 유력 인사로도 활동했다. 

 중국 법원은 류씨 형제가 이끄는 한룽그룹이 확고한 위계질서와 조직원, 수입을 갖춘 범죄조직으로 8건의 살인과 총기거래, 공갈, 도박에 연루되었다고 밝혔다. 판사는 류한과 그의 동생을 포함한 5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출처 = TV조선 '뉴스쇼 판' 방송 캡처 출처 : 이코노믹리뷰(https://www.econovill.com)


경찰이 사형 집행을 위해 한룽그룹 류한 회장의 어깨를 잡자
그가 오열하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사형은 집행되었다. 

 

 

출처: 스마트뉴스 캡쳐

류한 회장이 사형집행 직전 남긴 말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 인생,
모든게 잠깐인 것을,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처럼 그냥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 쓰고 소리 지르며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데,

말 한마디 참고,
물 한모금 먼저 건네주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보다듬으면서 살 것을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 보듯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걸 그랬어.

세월의 흐름이
모든게 잠깐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나만 모르고 살았을까?

낙락장송은 말고도 그저
잡목림 근처에 찔레나무 되어 살아도 좋았을 것을

근처에 도랑물  시냇물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도 되는데,
그냥 소나무 한 그루가 되면
그만이었던 것을

무엇을 얼마나 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동안 아둥 바둥 살아 왔을까? 

사랑도 예쁘게 익어야 한다는 것을
덜 익은 사랑은 쓰고 아프다는 것을
예쁜 맘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젊은 날에 나는 왜  몰랐을까?

감나무의 '홍시'처럼 내가 내 안에서 무르도록.. 
익을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아프더라도 겨울 감나무 가지 끝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 지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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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540장)

 

인생이 힘든 이유는 뭘까요? 아무래도 ‘불확실성’이라 아닐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불안과 두려움,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전능한 능력자가 미래 일을 알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불안한 사람들은 미래를 알려준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와 운명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 수 없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사 59장)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고 만 것이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는 제사장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무엘은 소년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1)에 보면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당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도 드물었고, 이상도 많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14번째 사사이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와 군사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2절)”고 소개했는데, 이것은 노안이 온 것 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약 열두살쯤 되는 소년이었고, 엘리 제사장 밑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년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네 번이나 들었지만 엘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께서 동행하셨으나, ‘저희 눈이 가리워 알아보지 못했다(눅24장)’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 교회였던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 역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다(계3: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인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끊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고, 그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엘리가 소년 사무엘에게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지시합니다. 엘리도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이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무엘은 얼마나 든든하고, 확실하게 담대히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주로 직접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졌던 AD 1세기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말씀하셨고,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시대처럼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 일까요? 꿈과 환상과 음성에는 사탄이 끼어서, 변조하여 나타날 수 있고, 잘못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비주의가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성경 자체의 증언이 있습니다.

 (딤후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모든 성경이란 완성된 66권을 가르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경(正經), 영어로는 ’캐논(Canon)‘입니다. 표준 성경이란 뜻이죠.

이 정경인 66권 안에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개인의 문제든, 질병의 문제든, 사회문제든, 인간관계나 신앙적인 해답이 다 성경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심령안에 들아와 성경말씀을 듣거나 읽고 묵상할 때, 조명하여 깨닫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감동을 주어 깨우쳐 주십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해 답을 찾기 원할 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분주함을 내려놓고, 정규적으로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갖는 게 유익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꾸준히 가질 때 침묵 가운데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또 성도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처럼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나 확신이 있습니다. 물론 그 깨달음이 성경적이냐를 따져보고 사탄의 음성이냐, 자기 속사람의 음성이냐, 하나님의 음성이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요청하고 부르짖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잠잠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전에 모나미 볼펜 사장님이 부도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하나님의 책망이셨습니다. “너 사업한답시고 주일 잘 지켰냐? 십일조는 제대로 했냐? 성경은 얼마나 읽었냐?” 정곡을 찌를 음성이었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잘 하겠다고 고백하고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21장이 눈에 띄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해변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한 후 많은 고기가 잡히죠. 그 때 잡힌 물고기 수가 153마리입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모나미 153 볼펜을 만든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1자루 이상 사도록 50억 개를 생산할 것을 기도했더니, 그런데 정말 50억 개 목표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사람들을 통해, 목회자의 권면이나, 성도들과 대화중에 깨닫게도 하시고, 은혜받은 것을 나누거나, 복음을 전할 때 깨닫게도 하십니다. 또한 꿈이나 환상, 질병의 치유 체험, 신비한 영적 경험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또는 우리 환경이나 사건, 고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LfFZY8sXk

중요한 포인트는, 이렇게 음성을 들었다 싶을 때는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꾐에 넘어가 미혹당하여 낭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 어렵고 힘든 때에 사람들은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방황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음성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말씀을 묵상하는 큐티를 지속해야 하고, 생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때를 돌파하고, 사탄의 시험과 유혹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사무엘처럼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 들었을 때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적용하면 말씀이 우리를 복되고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좋아지는 복과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생활로 앞으로 전진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찬 321장)

 

사무엘상,하는 한마디로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소견대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대’로를 뜻하는 것인데, (창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 타락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이 쓰여진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소돔성에도 적지만 의인은 있는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말씀을 따라사는 의인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나’라는 여성이죠. 그녀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각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일의 시작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녀가 부각된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심각한 결핍 때문이었죠. 당시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요, 죄악이라 여겼던 시대입니다. 인생에 답이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간구해서 얻는 아들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한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불임중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진짜 믿음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 말씀은 12-17절은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 18-21절은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22-26절은 다시 엘리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B-A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면서 한나와 사무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형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라는 말과 17절에 엘리의 두 아들이 “소년”이었을 떄는 동일한 단어가 쓰였습니다. 엘리의 아들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는 것이죠. 그들을 비교하며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지만 행실이 악한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레위기 7장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 나오는 것을 제사장으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구운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날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가져가라는 제사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혈통에 따라 합법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 바쳐져 성막에서 생활했고,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화려하게 짜여진 옷입니다. 이 옷은 한나가 남편이 순서에 따라 제사일을 하기 위해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지어입힌 옷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바친 엘가나와 한나를 위해 엘리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그들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출산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무명한 사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녀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엘가나와 한나가 그런 복을 받을 만큼 신실하게 살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복된 가문을 세우게 하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아무리 제도적 질서에 의해 부여받은 복과 은혜가 있더라도 그들 자신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무엘처럼 유능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들어 써서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진리는 이미 한나의 찬양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2장 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손에 붙들리어 사는 축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교만한 말과 행동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하나님께서 달아보실 때 말과 행동에 진실함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기도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신앙의 1대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엘가나와 한나가 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가까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죠. 오늘 하나님의 테스트에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교만이나 오만한 말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cb8b36sp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출생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환경이나 가문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과 가문을 변화시킬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유명한 대제사장 엘리보다 무명의 엘가나와 한나의 길을 선택하는 복된 반열을 선택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인도하소서.

 

 

 

 

 



(찬 382장)

 

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가 자신의 복음역사에 참예한 것을 칭찬하며, 마지막 문안 인사를 나누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고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칭찬을 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칭찬을 하는 걸까요?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의 쓸 것을 헌신적으로 보냈고,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난에도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15)에서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이 상황은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에 그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재정 지원에 동참했다는 것이고요, (16절)에서도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16)라고 한 것으로 보아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지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선교초기부터 바울과 교제하며 기도하고 쓸 것을 공급했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가 된 것은 바울이 선물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라(17)’고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밝힙고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중보기도와 헌금을 통한 복음사역에 동역한 것을 칭찬한 것은 자신이 선물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봉사의 열매가 풍성이 맺히길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열매가 될 것이요, 성도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칭찬으로 인해 더욱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고, 점점 더 복음이 전파되는 선순환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4)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했고요, 그 방법은 사랑 가운데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라고 성장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사도 바울', 렘브란트, 1635.



특히 (18)에 보면 바울이 내게는 모든 것이 풍부한데,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것을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바울만을 위함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전파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것이죠.

자 이제 빌립보서를 닫으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공동체에 축복을 선포합니다.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기서 ‘풍성한 대로’는 ‘그의 풍성을 따라’의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에게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인 거죠.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하셨고(시 24:1). 아까워서 조금씩 주시는 분이 이시요(약 1:5),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고(눅 12:32).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딤전 6:17).

 

자, 바울도 이렇게 축복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풍성하고 넉넉한 삶에 대해 축복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형편이 어렵고, 풍족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면 전도도 하고, 선교도 많이 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사용하면 될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보면, 우리는 더 많이 간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왜 하나님은 그렇게 결과가 뻔한 길이 있는데도, 성도들을 달아보시고, 재어보시고, 훈련하시고 연단만 많이 하실까요?

첫째는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죄성이 무섭고 파괴적입니다. 죄성이란 한마디로 휴발유와 같다고 할 수 있죠. 기존에 불 위에 부으면 확하고 크고 맹렬하게 일어나서 사고를 당하고, 가만히 부어놓고 불을 붙여도 똑같이 무섭게 불이 일어납니다. 죄성은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도 얼마든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타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간교하고 사악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안에 죄성이 가득찬 인간들에게 휴발유가 부어지듯 부어지면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이 타락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못 주시는 겁니다. 물질이나 풍족한 것에 도취되어 타락한 사람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재물을 맡기실 때되면 맡기시고, 사람을 맡기실 때가 되면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과 나라를 다스릴 때가 오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더 복이니까요.

 

왜 하나님은 물질적 풍성함보다 영적 풍성함을 많이 주실까요?

둘째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온실속에 화초란 말이 있지요? 온실속에 자란 화초는 쑥쑥 자라지요. 노지보다 잎사귀가 크고, 키도 크고, 열매도 사시사철 열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죠? 비닐이 벗겨지만 온실안은 정말 난장판이 되잖아요?

식물을 제대로 키우려면 비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뙤약볕과 가뭄을 견디며 자라나야 하잖아요? 맞습니다. 이렇게 노지에서 자란 채소나 곡식을 보면 벌써 향이 다르죠. 찐합니다. 실제로 약효를 조사해봐도 월등한 성분을 갖고 있고, 당도도 훨씬 더 높습니다.

(125)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조카나, 친척 동생쯤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물론 노예도 아니시고 아들도 대우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보세요.

 

(216)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를 이렇게 칭하십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렇게 존귀한 자들이니, 달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덥석덥석 주시지 않으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처럼 사랑하시니까, 한번 더 훈련하시고, 한번 더 기도하게 하시고, 한번 더 의지하게 하시고, 한번 더 주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훈련방식입니다.
훈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고, 궁창위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며, 부족함이 없어 온전함을 이루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신앙성장을 위해서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빌립보의 관계처럼 주안에서 돈독하고, 서로 돕고, 서로 중보기도하고, 연합하여 영혼구원의 사명을 완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또한 우리 빛을 세상 사람들을 향해 비추어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저들이 예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실제적인 헌신도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이라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당당히 승리해 나간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영혼구원과 함께,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되어야 이 모든 게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주님과 교제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꿔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단지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밀착하여 동행함으로서

바울과 같이 쓰임받고, 빌립보 교인들처럼 협력자가 되는 복과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빌립보서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어려운 중에도 하늘에 창고에 쌓아 하나님의 상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들어와 구원을 얻는 존귀한 일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주님, 승리에 도취되어 희생자의 헌신을 망각하는 자가 안 되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보고 간구하고 훈련받아 존귀하게 쓰임받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찬 312장)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가듯이, 인생에도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머지는 정리할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무적 용건을 다루는데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서 그를 파송한 교회에 감사를 표현하는 편지인데요.
우리는 바울이 이처럼 감사를 표명하면서도 사실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음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먼저 (8~10)까지 말씀 보면 바울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데요.
바울은 결론적으로 바른 삶과 정결한 삶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8,9)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것은 종교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일상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즉 평강을 인사말 쓸 정도로 중시했는데 바울은 이방인이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가 유대인이 되지 않더라도 내 가르침을 따르면 ‘평강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토록 반복하던 기쁨을 또 강조했습니다.


(10) “내가 크게 기뻐함은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빌립보의 성도들의 관심이 다시 싹텄기 때문인데요.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갇혀 있다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빌립보교회와 바울은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기가 전한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빌립보교회가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만나 그동안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신앙의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고 마치 봄에 다시 싹이 올라오듯 그 생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관심은 성도들의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진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11~13)까지는 ‘늘 깨어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들이 후원한 재정에 대해서는 큰 기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쓸 것은 직접 일을 조달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은 적극적으로 독려했지만 자기가 쓸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에 대한 감사 표현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이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신을 잘못 해석해서 ‘지금 많이 궁핍하지만 견디고 있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만이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는 겁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능력은 가난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유할 때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목적이었고 현재 어떤 환경에 처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사역을 못한 적도 없었고부유해서 자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만큼이나 부유함도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가난하다고 비굴하거나 낙심하거나, 자신을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유하다고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그 물질로 헛된 일에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의 균형이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한 태도말이에요.

 

 오늘은 김의수, 데이비드 서의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아내와 나 김우수는 처음. 결혼할 때 화려하게 출발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학대학에 갔고 약사가 되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나는 결혼할 때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이었으니 조건이 세상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혼집으로 32평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래도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장 최우선으로 보고 서로를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IVF에서 신앙 훈련하는 과정에서 만나 우리의 중심에 늘 하나님을 모셨다. 만약 아내가 세상적인 조건만 보고 나를 선택했다면 결혼 1년 만에 첫 딸이 장애아로 태어난 사건과 곧이어 시댁의 사업이 망해서 쪽방을 전전해야 했던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배달, 풀 뽑기, 전단지 돌리기 등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딸 치료비조차 벌어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을 아내는 격려하며 위로했다. 아내는 아픈 딸을 24시간 돌보느라 어렵게 공부한 약사 자격증을 쓰지 못하는 것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충분히 돈을 벌겠다고 뛰어나갈 만도 한데 아내는 그 좁은 집 안에서 내가 벌어오는 적은 돈에 자족하며 힘든 시절을 묵묵히 이겨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부부 가운데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위에 지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풍파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 위에 결혼해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좋은 스펙으로도 실업자가 될 수 있고 많은 돈도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모든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해 믿음의 반석 위에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가정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본질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그런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군사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상에 맞서는 자들입니다.

경제적 상황이 고려 대상일 수는 있지만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자기가 맡은 보직을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능력과 지혜와 모든 상황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힘들고 어려운 그런 조건에서도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존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도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평강의 샬롬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해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항상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균형을 잘 유지하고 지키는 성도로 살게 해주시옵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오늘 또 말씀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신 모든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나아가는 복되고 충성된 주님의 종들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저에게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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