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Gx78Fe2Rfe0

 

(고후 123-211)

사랑이란 적절한 행동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랑은 끝없는 신비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안에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123,24)인데, 바울은 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은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찾아갔다면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문하는 것을 참고, 잘못 가르쳤거나 동조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더 크게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지만, 성도들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안에서 자랄 단계라고 보았고, 그래서 억지로 성장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분은 (1-4)인데, 과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재차 고린도교회를 방문한다면 서로 상처를 더 받고 신앙적으로도 도움이 될 게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방문대신 눈물의 편지를 쓰는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5-11)인데, 바울은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교회는 징계를 했고, 그들에게 벌 받는 기간을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피해를 입힌 그들은 그 징계를 수용했고, 일정기간동안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간을 갖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충분히 깨달았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조심스럽게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사랑일까요?

무조건 다가가고,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성급히 찾아가서 권면하거나, 무조건 용서한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찾아갈 때가 아니라 기다려 줄 때이고, 스스로 교인들이 성장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또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더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라 생각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주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회를 주는 것에 동의했고, 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해 주자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적용)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신중한 행동과 절제, 용서를 위한 단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양육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지만, 장성할수록 점차 스스로 하도록 가르쳐 주고,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거죠.

 신앙생활이 얼마 안 된 초신자는 성도들이 더 세심하게 돌보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스스로 성장할 단계에 있는 신자에게는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몸과 키가 자라면 그것에 맞는 훈련을 하여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죠. 무조건 돌봐주는 것은 의지 장애자를 만드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세심하게 돌 볼 사람은 누구이고,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또 나의 신앙단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돌봄이 많이 필요한 단계인지, 스스로 일어나야 할 단계인지, 이제 어린 성도를 돌보고 케어해야 할 단계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은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모두 겨자씨가 자라 새들을 깃들이게 하는 큰 나무처럼 성장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 여러 영혼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선생이 됩시다. 그래서 바울이 멋지게 살다 간 거처럼, 우리도 그 위대한 인생의 뒷걸음을 따라봅시다.

 

 매우 작은 자 하나와 같은 우리도, 힘을 합쳐 연합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에 함께 손잡는 영적 군사들이길 바랍니다.

 

 

 

 

www.youtube.com/watch?v=ed03V3NErU8

 

 

(고후 112-22)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와 아멘이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16개월동안 머물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교회교인들을 특별히 생각했고,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바울의 사도직분도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인격도 못 믿을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해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12(원어성경)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해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되지 않게 행동했다는 뜻이에요.

좀더 자세히 풀어보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으로 행동했다고 했는데,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거룩함을 단순함, 솔직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정직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실함으로 행하였다고 했는데, 여기 진실함은 햇빛에 비춰보아도 투명하다는 뜻으로, 성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동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관점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명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진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 더 방문할 계획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오히려 그들에게나 바울 자신에게도 더 유익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23) 이 결정은 사람들에게 변덕쟁이이라는 비난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에서였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긋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어긋난 계획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아멘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성도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하고 달려가면, 하나님은 모든 문제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오해도 있어 해명도 해야 하고, 자신과의 사이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고린도교회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든 관계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아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대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 이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어떻게 행동하며 살라고 교훈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함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무엇을 하든지, 그게 가정일이든, 학교나 회사일이든, 사역을 하는 것이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투명하게 일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떳떳하고 성실했어도 오해하는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도 오해를 받았고, 심지어 예수님처럼 깨끗한 분도 오해를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어도 오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신앙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고 옳은 일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적극 해명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행함으로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을 오해하여 비난하거나, 뒷담화까는 사람이 있어도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낙심하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십시오. 바울처럼 계속해서 믿음의 선을 행하고,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움으로 직진하십시오.

오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계획의 변동이나 수정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와 아멘이 됩니다.

사람의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죠. 때로는 뜻이 어그러지고, 어쩔 수 없이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뜻대로 안된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의 수정안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계획의 수정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예와 하멘으로 화답하며 기도하며 나간다면, 지금 어긋난 계획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계획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계획대로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가지십시오. ‘아멘, 예 그렇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신 계획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와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사단에게 밀리지 말고, 이겨내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적 승리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FbHoJ1Zb9OQ

 

(고후 11-11)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입니다. 내용은 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신앙적인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그 교회안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내용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퍼트린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들이 떠돌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력한 빛으로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충분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정확한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시작부분으로써 서론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첫째는 위로의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선순환이란 좋은 순환이란 뜻이니까, 나쁜 일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되게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난이 선은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바울은 그것이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속에서 위로라는 선을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위로받음으로서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기독교의 영성작가는 상처입은 치유자, 더 원디드 힐러(the Wounded Heal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상처입은 치유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가르켜요.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것이죠.

역시,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고난으로 큰 아픔을 겪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그 아픔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가 침몰하여 자녀를 잃은 큰 고통을 당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이에요.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이 고통을 우리가 겪게 하심으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위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의 끝을 경험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너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가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도 나처럼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지 않겠니?’라고 물어오십니다.

이 귀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의 사역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의 가르침은 초죽음으로 몰고가는 큰 고통의 문제는 이것을 겪는 사람에게도 큰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죠.

사실 이런 고통은 주요 사역자들에게 있었던 고통이에요.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 죽음 직전을 경험했고, 모세도 (11)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였으며, 예레미야는 (20)에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형선고와 같은 고통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때,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런저런 고통을 다 겪은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바울의 말이 실감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하셨습니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저에게도 사형선고와 같은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하는 공격에 뭇매를 맞고, 소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그게 항상 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다시 멋지게 우리를 살려내셨고, 오늘자기 이르게 하셨습니다.

악한 마귀는 성도인 우리를 괴롭혀 죽이려고 덤벼들고, 어떤 사람들도 그것에 동조하여 문제로 위협하고 얼토당토없는 말들로 성도인 우리들을 공격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까?
도리어 그 고통의 문제들이 성도인 우리를 겸손하게 했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가장 처절한 상태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붙잡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동의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마음에 간직합시다.

두 가지를 가르쳤는데요, 첫째는 고통중에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둘째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는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오늘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김이 빠져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기가막힌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종결자이십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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