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279장)

 

오늘부터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첫 시작은 “슬프다”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에카’인데, ‘아이고!’라는 뜻입니다. 고통과 슬픔, 놀라움을 표현하는 감탄사죠. 예레미야애가는 이 슬픔의 감탄사속에 전체 내용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과부로 비유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과부는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데요, 예루살렘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뽐내서 많은 나라에 존경을 받던 공주와도 같았는데, 이제는 과부처럼 처참한 신세로 떨어졌다는 것이죠. 유다는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 죽도록 수치를 당하며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노래지요. 그래서 슬픈 노래, 애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슬픈 애가의 무대 역할을 하는 첫장으로, 비참한 예루살렘의 현 모습과 참상을 당하게 된 이유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비탄속에서도 가져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처참하게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장을 여러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자가 과부로 표현되고, 공주가 강제 노동자로 전락한 격입니다. 삶의 환경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깨져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이 가슴을 치며 울어도 위로하는 이 하나 없고 전에는 절친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럽던 이스라엘의 도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성전에서 드리던 절기 제사들도 끊어졌고, 집도하던 제사장들도 탄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것도 단절되었으니, 예루살렘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 처한 것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저 울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대적들에게 짓밟히고 조롱거리가 된 것은 유다백성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악해서’였습니다. 그 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곤고함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힘없이 도망치는 백성들을 사냥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런 절망적이고, 패망적이고, 기운이 쭉 빠지는 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과 여호와의 돌보심을 간청했습니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망해버린 예루살렘성과 무너져 내린 성전 잔해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돌보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망해버린 남유다의 상황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시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한 자는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되며,

성도는 하나님의 품 외에는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죄악의 길은 처음에는 넓으나 마지막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며,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누리던 모든 축복과 영광도 동시에 사라지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가 평안한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 삶에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즉시,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혔을 때부터,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친밀하게 하고,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종교생활만 될 것이요, 아무 유익이나 성장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복을 다 받게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주는 샘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장27절)


https://www.youtube.com/watch?v=RLNmfDkAl-Q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친밀하게 사귐을 갖는 것이 성도에게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의 슬픈 노래를 보면서, 새 희망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 449장)

 

바른 교훈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바른 교훈이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이란 교회 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자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왜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했을까요? 교회안의 성도들이 각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고, 건강한 가정이 이뤄지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안의 다양한 부류의 성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요청했습니다. 먼저 나이가 든 남자들에게는 절제와 경건과 인내를, 젊은 남성들에게는 신중함을, 나이많은 여성도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고 경건한 몸가짐을 갖추는 것을, 젊은 여성도들은 잘 훈련받아 집안을 돌보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성도들이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 당시 복음과 상반되는 거짓된 교리로 성도들을 오염시켰는데요, 그들은 성도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보다 그저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고, 건강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고 작은 일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성도들은 일반 성도들을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행함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어떤 본을 보이라고 했을까요? 디도에게 책잡히지 않는 건전한 언어생활과 모든 선한 행동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을 먼저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교회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첫째는 목회자요, 둘째는 평신도 사역자와 교사들입니다.

그들이 바른 교훈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교회는 그저 말만 무성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요, 그들이 가르치려는 성경도 보잘것 없는 허접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일전에 기독교 신문에서 요즘 청년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조사한 통계를 봤는데요. 그 첫번째는 어른 성도들의 모순된 신앙생활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기독교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해 보니 부모나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삶이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믿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염증을 느낀 것이죠.

 

특히 요즘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야 할 정도의 삶은 되지 않게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이 귀중하다고 외쳐도, 성도들의 삶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는다면 복음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테니까요.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한다면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죠. 믿음과 행함은 따로 있지 않고 수레바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의 바퀴가 크고 행함이 적다든지, 행함은 크고 믿음은 적다든지 이건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약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성도는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고,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실함을 드러내지요. 그런데 믿음이 있다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이게 야고보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도에게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배우면 행할 것이다! 그럴 때 가정과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며,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도 바른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 교훈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 실천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뭐죠? 바로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네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 사랑이 곧 바른 교훈입니다.

오늘도 바른 교훈을 따르십시오. 이 교훈은 우리를 살릴 것이고, 가정을 든든히 세우며, 교회를 강하게 세우고,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것입니다.

인생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이 생명 살리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오늘도 바른 교훈, 즉 복음을 받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t6rZ46PC4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의 나이, 우리의 직분, 우리의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가정과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 전에 우리들이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를 바른 교훈을 실행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래서 가정을 든든히 세우고 교회를 강하게 세워가는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생명의 안내자가 되게 하옵소서.

 

 


(찬 320장)

 

오늘부터 디도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두 명이 제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디모데요, 하나는 디도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젊은 동역자로서 디도서는 그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고 안디옥교회 출신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레데교회와 고린도교회를 맡겼을 정도로 신실했는데요.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할 때 바나바와 디도를 데려갈 정도로 가까운 동역자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지만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후에 디도를 그레데섬 감독으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디도가 얼마나 신실한 동역자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디도서의 중요 내용은 무엇일까요?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그 올바른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디도서를 통해 ‘올바른 가르침인 복음을 정확히 가르쳐야, 올바른 믿음이 생기고, 세상의 모범이 되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입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매력적인 교회를 세우려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디도서를 읽을 때,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내가 바로 교회를 지키는 디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적용하며 말씀을 읽을 때, 바울의 메시지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음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데요, (1절)에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인 나 바울은’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쓴 서신에 나타난 특징인데요, 바울은 여기서도 자신에 대한 바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의 자격을 설명하는데요,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고,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데요, “대접을 잘 하고,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이렇게 바른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쳐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지도자가 건강하게 세워질 때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으니까요.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바울이 있었고, 제자들이 있었고, 디도가 있었고, 그들이 교회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각자가 바로 교회를 세워야 할 디도입니다.
우리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십시오.

요즘 얼마나 우리나라에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습니까? 또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들이 벌떼처럼 왕왕거리며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공격하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가 바로 디도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잘 세워서, 다음 세대에게 아름답게 물려줍시다. 진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320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임을 알고, 우리의 신앙을 잘 지키도록

매일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지켜야 할 신실한 디도들이여, 오늘도 여러분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나가십시오. 저도 말씀과 기도로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 건강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보존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지켜온 교회를 주님 손에 올려드립시다.

오늘 디도되어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심지가 견고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는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오늘도 샬롬의 평안이 함께 하며,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결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sUZoPQLRY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시대에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단에게 영혼들이 꾐에 빠지고, 사탄의 세력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신앙을 전수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건강하게 일어나야 할 교회들이 여러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교회를 보존하게 하소서. 복음적인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소서. 또한 성도인 우리가 교회임을 알고, 건강한 신앙을 지켜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소서. 부족하지만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모두가 연합하게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304장)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언약 커버넌트는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 인격적으로 맺어진 약속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커버넌트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신실하고 철저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언약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중히 여기고 신실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은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년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다급해진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는데요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아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진멸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으므로 진멸당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부역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언약을 위반하고 기본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약속은 소중하고 무겁게 다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결코 인생을 가볍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2)에 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을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열심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민족적 배타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열심으로 훼손한 것입니다.
이 열심은 사울이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 나아가 후손에게까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의도가 좋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의도와
유익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이어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사울의 죄를 속죄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집안 사람 일곱을 요구했고, 다윗은 이에 응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안의 작은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들을 존중히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약에 따라 구원받은 성도는요 약속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본 덕목으로 갖추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보면,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기억해서 므비보셋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특별히 므비보셋을 아꼈는데, 언약에 따르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다윗은 맹세를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의 대상인 므비보셋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마지 못해서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사명을 이루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가 처형당한 자들의 시신을 밤낮으로 지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름으로써 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겁게 여기는 마음과 함께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민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요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신의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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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병태 저자의 하나님의 퍼즐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바이텍 시스템 이백용 회장은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크고 놀라운 약속만 바라보고 좋아서 쾌재를 부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백용 회장은 덧붙여 말한다.
어떤 분이 선물로 복에 관한 성경 말씀이 적힌 나무패를 주셨는데, 구절이 참 좋았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다음 구절인 15절에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줄은.
우리가 범했던 실수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한 약속만 보고 들떠 있던 우리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곳도 주목하라고 하신다. 참을성 없는 우리에게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을 첨언하고 계신다.
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복된 약속을 주셨지만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훈련 과정 없는 축복은 해가 될 수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과정인 간과의 영광은 변색될 우려가 짙다. 누구나 고난의 터널을 지나 약속을 받는다. 훈련의 과정을 거쳐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건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이 승리의 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인생 퍼즐을 풀어가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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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풀어가는 현장은 바로 고난의 터널을 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고, 인내를 거쳐서 그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거는 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Xm0FX_Oas

말씀의 결론입니다.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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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언약,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완수하자 비로소 가뭄이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가 응답됐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오래 전 무지개를 바라보며 언약을 기억한 노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도 다윗처럼 언약의 신실하고 철저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사람과 약속도 신실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이요, 경건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과의 약속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함부로 약속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킴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때가 오면 이루어질 것이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은 바로 그 약속의 수종드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수종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귀한 그런 축복의 현장에 반드시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강력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주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기브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특별히 환경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픈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시옵시사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용하소서. 언약의 통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당당하게 하시고, 부유하며 강건하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 충만한 복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은총과 자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 드립니다.

 

 

빌라도의 재판

 

 

 (찬 144장)

 

우리가 경기에서 심판에게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정입니다. 역시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혹 홈팬들의 함성과 야유에 압도당해서 공정하지 못한 판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판사도 뇌물이라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판정을 굽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빌라도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공정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정함보다 군중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먼저 본문 (15~19절)까지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십자가형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땅은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견한 총독 빌라도만이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고발과 거짓 증언에도 그저 침묵을 지키셨는데요.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죄 없는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고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도 그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며 남편 빌라도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신속히 정의로운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너무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알량한 안위를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20~23절)에 보면 군중의 압력이 계속되는 내용인데요.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를 사면해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결백을 발견한 이상 특별 사면권을 곧장 예수님께 사용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의식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군중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악명 높았던 죄수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가 재차 군중에게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모습에 실망했고 그 실망은 분노로 번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군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정치적 메시아, 즉 나를 번성하게 해주고 잘되게 해주고, 형통하게 해주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나의 삶 가운데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고, 또 그 낙심과 실망이 곧 분노로 바뀔 수도 있죠.
또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있는 이 군중들의 모습은 얼마든지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일 수도 있고요.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1881년작 ‘이 사람을 보라’. 문카치가 그린 ‘예수 3부작’ 중 하나.


 (24~26절) 말씀은 빌라도가 결국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정의와 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휩쓸렸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자손들에게 돌리라며 저주를 자처하기도 했는데요.

빌라도는 사회의 정의가 깨지는 것보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마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일에 무지하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그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면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고,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주님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또 성도라고 하는 근본적인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명이라는 책임을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또한 직분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또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내에서 잘못된 많은 문제와 비리와 사건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치와 진리의 존귀함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라도 내가 지켜야 할 사명의 책임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성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빌라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발당해 잡혀 온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할 놀라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의보다 정치를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 권세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이 세대에서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의 모습과 성난 군중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것처럼 내가 바로 빌라도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이 아닐까 적용해 보면서 오늘 또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ecwYFct3tY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빌라도 같은 자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과 같은 자인데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억울한 누명을 쓰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의 사명의 길을 가셨나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지키게 하옵시고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는 성도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오늘 또 인도하시고 교회를 지켜주시며
당신의 나라 안에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만찬의 예수와 제자들

 

(찬 265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속죄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순종의 길을 가시는데요.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약하여 말만 앞세웁니다. 오늘 세 사람을 보여주는데, 사리사욕을 위해 수년 동안 함께한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 의리와 충성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 그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극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26~30절)까지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무교절 첫날 저녁에 만찬을 여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제자들은 그 밑에서 뭔가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과 희생을 다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눠주셨듯 곧 자신의 살을 생명으로 주실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포도주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잔을 비운다면 더 예수님과 함께 잔을 나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만찬이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상에서는 마지막 잔이 될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 새 포도주로 성도들과 함께 마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1 ~ 33절)까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기뻐하며 함께 찬양까지 부르며 신이 났습니다. 그 후 장소를 강람산으로 옮겼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은 스가랴의 선지자의 말씀까지 인용하며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제자들은 꽤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반응하는데요. “나는 결코 줄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이 맹세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의 다짐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우리 신앙도 지속해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4~35절)까지 보십니다.
베드로는 호기롭게 자신의 충성심을 예수님께 내세웠는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먼 훗날도 아니고 한 달 후도 아니고 바로 ‘이 밤이 다 지나기 전에 베드로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결심과 다짐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의리를 다짐하고 내세웠지만, 그 의리는 금방 무너지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의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싸움을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진심 어린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연약함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려면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을 붙들어 인도하도록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나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가 있습니다.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또 그 언약의 피 안에서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zBDvYObj8I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의지와 신앙과 절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다가도 의심하고 변개하는 저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언약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님에 인도하심을 구하오니 오늘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또 신앙생활에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제자로 당당히 우리 자리에 서서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루벤스, 향유를 부은 여인

 

(찬 214장)

예수님은 절대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신앙적 행동을 통해서 성도들이 예수님께 보여야 하는 가장 합당한 태도와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틀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그것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자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제자들은 낭비라고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많은 말씀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 신앙이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만,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길 때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선험적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선험적 지식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시 향유는 당시에 매우 값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판단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이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일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바친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으며 사람들 앞에 그녀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실이 전해지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한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예배하고 예물을 드릴 때 예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그 모든 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반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행하는 모든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봉사와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큐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향유를 보인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낭비라 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놀라운 헌신을 기억하시고 높여 주셨듯이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사랑과 헌신도 언제나 기쁘게 받으시며 영원히 기억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가장 값진 것을 들림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입술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우리의 헌신과 예물과 우리의 정성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정말로 기뻐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더욱더 복되고 전기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k3rVVE6D0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의 죽음을 향유를 통해서 표현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귀한 것을 깨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행동과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향한 마음에서 동기가 되어 행동하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무엘상 28장


(찬송가 543장)


(27장)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갔고, 아기스 왕 아래에서 평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28장)에서 아기스 왕이 함께 이스라엘을 쳐서 공을 세우면 큰 보직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 때 사울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으며 크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가 거룩한 전쟁임을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물었는데, 첫째는 꿈이요, 둘째는 제사장을 통해 듣는 우림이었고, 마지막은 선지자를 통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진짜 잘못된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무엘이 죽었을 때 내쫓았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이 엄격하게 금하는 주술로라도 확신을 찾으려 집착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 과도한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를 자행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합니까?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분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과욕을 부리며 살더니,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사실 사울 왕에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현실적인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사울은 아직까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황이 지금 불리하긴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전보다 불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의 과거 행적을 살펴 본다면 이 정도 상황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음식조차 끊어버리고 이렇게까지 절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까지 절망했을까요?결국 답은 사울왕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만을 뛰어난 존재로 여기고,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나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곳에서도 도움을 기대하거나 요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에 쓰러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성도가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교만하게 되면 사울처럼 왕임에도 일반 백성보다 못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스스로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만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못하여 결국 파멸의 길로 갔던 사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 내 뜻, 내 마음대로 안 되어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안 되었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허락하시고, 정말 그러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겸손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최선이 기도라면 기도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사랑이라면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일이라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역사를 바꾸려 하지 말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이 우리에게 본보기와 거울이 되어, 우리 행동과 마음가짐에 영향을 끼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운에 맡기지 말고, 힘들고 어렵다고 점치는 자에게 묻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성도의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가는 길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Z7YZy4wvg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저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려운 일은 오지만 사울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님에 감동되어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미래가 밝은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우리 갈 길을 밝히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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