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Atkinson Grimshaw, 'Thro the Wood '.


 살아남기는 영어로 서바이벌입니다
. 한 때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시리즈’ 책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곧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구도입니다. 특히 세상의 순리대로 살면 트러블이 없지만, 성도가 성경대로 살고자 할 때, 부딪쳐야 하는 역풍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만큼이나 피조물이 창조주를 몰아내는 역사는 뿌리 깊고 오래됐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과학의 급속적인 발전과 지식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는 점점 더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줄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도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가 벼랑 끝에 선 자처럼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지키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고, 이것을 보고 어떤 신학자는 구원받을 사람은 신앙인의 50%도 안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채 10%도 안 될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악인이 점점 더 득세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대라고 해서 만만했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항상 악인들이 있었고, 영적 부랑아들, 파괴자들, 원수들이 득세하고 있었고, 그들은 어서 빨리 다윗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윗뿐 아니라, 다윗이 믿는 신앙을 포함한 영적인 파괴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그 악인들을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사람의 일을 넘어 배후에 있는 사탄을 겨냥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최전방의 격전지에서 포격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신호처럼 보입니다. 어느 지역, 어느 좌표를 찍어주며 집중포화를 날려달라는 식으로 구원요청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눈에 띄는 기도는 반복되는 말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소원성취하지 못하게 하시며, 나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낭패당하게 하시며,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자신이 어떻게 다 방어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입까지 다스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구원요청기도가 더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탄은 잠도 안자고 부지런하게 일하고, 끈질기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을 파괴하려 모략(謀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영적 싸움이 있고, 직장에 나가도 시험거리가 늘 발에 걸리적 거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진리를 물타기해서, 교묘하게 불신자로 만드는 문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신앙을 지키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험난하게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인 우리들은 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성경적으로 볼 때 종말의 때요, 영적 전쟁이 치열한 때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득세를 하고, 사람들의 타락이 점점 일반화되어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직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큐티생활도 꼼꼼히 지도해야 합니다.

다른 것 보다 신앙생활이 무너지면, 우리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을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도, 결국 가치관이 다르면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천국에서도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세상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항상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불신앙이 문화가 되어 번지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으려면 다윗의 구원요청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내면에서부터 역사하는 수많은 죄악된 생각들과 싸워 이기고,

밖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요소들을 이겨내려면

먼저 주님으로 채워지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성령님으로 승전하십시오! 


https://studio.youtube.com/video/xgdwBe5tCxQ/edit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찬 373장) 고요한 바다로

 

여러분은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배신당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을 험담하면서 비웃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 시편 35편은 다윗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대적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식의 시입니다. 시인 다윗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배신하고 악한 행위를 벌였는지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보시고 선악간에 판단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방패, 손 방패, 창과 같은 전쟁 무기를 나열하고 있는데요, 그 만큼 자신의 싸움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 전쟁상황은 아니지만 지금 대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상해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5~6절)에 보면 지금 상황은 대적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그물을 친 것과 같은 상황이고, 들짐승을 잡을 때처럼 함정을 팠다고 고발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 주셔서 그들의 계획을 바람 앞에 겨 같게 날려버리시고, 어둡고 미끄러운 길에 넘어지며, 자기 꾀에 넘어가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까닭 없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은 까닭 없이 공격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맞상대할 정도가 안되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 억울한 상황에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이 되어 주실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무고한 자의 편이며, 부자와 힘있는 자들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편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이어서 시인 다윗은 두 번째 단락(11~18절)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대적들과 얼마나 다르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정확히 판단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죠.

대적들의 행위를 보면, 그들은 죄를 덮어 씌우고,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병들었을 때 시인은 금식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언제나 친구와 형제들을 대하듯이 따뜻하게 대했고, 그들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마치 자신이 모친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인에게 어려움이 찾아오니까 그들의 태도가 돌변하더라는 것이죠. 이제 자신들에게 별 이득이 없겠다 싶으니까, 그들은 시인의 고통을 보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을 당한 것처럼 고소해하며,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며 시인의 마음을 그렇게 찢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시인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주께서 관망하지 마시고, 속히 심판해 주시며, 그들을 벌하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악간에 분별하시고,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믿고 큰 회중 가운데서 감사하며, 많은 백성들 가운데 주를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서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호소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신이 힘이 없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망자 신분이었을 때 그에게는 겨우 400여명의 무리뿐이었고, 그들도 대부분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에게도 뛰어난 장수들이 있긴 해지만 사울 왕의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 주시길 호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울 때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을 아십니까? 미련한 사람은 능력이 안 되어도 객기를 부리며 덤비지만, 지혜로운 자는 누구보다 강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도우십니까? 당신을 의뢰하는 자와 언약을 맺고 계시며, 군사적 동맹을 맺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118)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6~9)

결국 보세요. 누가 승리합니까? 왕인 사울의 군대가 아니라 목동인 다윗 편이 승리합니다.

이런 승리의 결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다윗은 믿고 있습니다. 보세요. 사울왕과 추종자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추격했지만, 다윗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잖아요?

도리어 사울왕이 하나님의 계략에 넘어져 창에 엎어져 죽으면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가장 미워하는 대적자요,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로 악한 마귀와 그 세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실력과 능력으로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고, 대적하여 싸우려 하면 할수록 더 죄를 지을 뿐이고, 우리 손에 피를 묻히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대적하고 미워하더라도 혈과 육으로 대적하며 싸우려 하지 마세요.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록된 말씀이라는 무기로 싸워야 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써 악한 영을 물리쳐야 합니다.

(삼상 17)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성이 나서 달려나오니까, 그걸 보고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도 칼과 실력과 힘의 겨룸이 아니라, 영적 전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를 내게 한다고 혈기로 대적하면 항상 뒤끝이 안 좋습니다. 또한 신앙인으로 덕이 안 됩니다. 혈기와 분노로 싸우면 마귀가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오늘도 사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 위해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벧전 5장 8절) 말씀처럼,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들을 대적하라!“
근신하고 깨어라는 말씀은요? 24시간동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늘 마음을 강하게 하고 사려 깊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쉬운성경 5:8 참고)

 여러분을 함정에 빠트리고, 분노하게 하고, 쑥덕거리며 비난하는 자들을 혈과 육으로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대적하여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게 진짜 싸움이고, 진짜 이기는 싸움입니다. 오늘도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근신하고 깨어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성령 하나님, 참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오늘도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스려 주옵소서. 혈기와 분노로 상대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 편에 서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님께서 하나님 편에 서게 하시고, 근신하고 깨어 말씀의 편에 서게 하소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내가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18t-Cg1u3oM

 
 

 

(501~14) 우리가 남겨야 할 신앙의 유산


(543)

 

어제 농장에 갔다가 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는데요, 자주 오시는 목사님 사모님이 계신데, 그분이 지난 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이는 칠십대 초반이지만 건강해 보이셨고, 항상 밝으셨는데, 불과 몇 주 전에 건강하게 뵈었는데,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기신 유언을 봤는데요. 세 가지였습니다. “장례식을 치루지 말라, 누군가 소식을 알고 조의금을 보내오면 모두 선교지로 보내라, 시신은 대학병원에 기증해라.”였습니다.

참 멋진 유언을 남기고 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남긴 유언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유산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147년의 긴 여정을 애굽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신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요셉은 애도하는 기간을 거친 후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가나안 땅에 다녀오겠다고 바로왕에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당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굴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레아가 매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에브랏에서 베냐민을 출산하다 죽어서 그곳에 묻혔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막벨라 굴에 묻히게 해 달라고 유언한 것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은 가나안 땅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야곱은 언제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요셉도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해골이라도 메고 올라가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면서 창세가 끝납니다.

야곱과 요셉은 좋은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왕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메고 가나안의 땅 막벨라 굴에 갑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동행했는데요, 장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왜 아버지 야곱이 그곳에 묻히길 원했는지 살펴보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듯이 야곱의 장례식에 참여한 후손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시작이 누구이며, 현재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어느곳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생생한 현장교육이었던 것이죠. 비록 애굽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해야 할 언약의 후손임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기록되었을까요? 야곱의 유언과 성취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첫째, 우리도 야곱처럼 이 땅을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왕에게 자신의 나그네길 인생이 일백삼십년이라고 대답한 것처럼, 야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그네 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문명과 번영의 땅 애굽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살았던 야곱처럼, 우리도 결국 들어가야 할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요, 세상 사람처럼 이 땅에 코 박고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을 헛되고 헛되게 보내지 않고, 의미있고 가치있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야곱의 유언은 우리가 남겨야 할 유산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 안치시켜 달라고 함으로서, 자녀들과 손주들까지 현장감 있는 실물교육을 시켰습니다. 자신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들어 수종들어야 할 언약의 백성인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유언으로 남긴 것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 147년을 살아보니, 모든 것은 헛되더라.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더라.” 이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남길 것은 결국 뭐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모든 것만 남기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남아 자녀들과 후손들의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 가르쳐 줄 이정표가 될 테니까요.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지만 이정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면서 자신은 그저 저 분을 가리키는 이정표에 불과함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이정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한 푼이라도 더 악착같이 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그들의 분복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실 것이요, 그들은 그만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부모로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실생활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즐겁게 살며, 항상 천국을 대망하며 살았던 삶이야 말로, 우리의 가족과 가문을 이끌어갈 진정한 가훈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하루가 유언처럼 살게 되겠지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며, 그분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도 말씀에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나그네처럼 살게 해 주소서.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대망하며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가족과 자녀들에게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물려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수하는 복된 조상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3kXdsvoRz8M 

 


(
549)

오늘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마지막에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NT5cnQqRw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가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고, 세겜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벧엘로 떠나야 했고, 요셉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줌으써,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게 됩니다.

 

(12~16)에는 야곱이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언약의 축복을 전수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 머리에 올리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팔을 교차하면서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위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얹고 축복했습니다.

지금 야곱의 두 손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 축복은 요셉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세상에서 번성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번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변함없이 주셨던 축복이며, 또한 자기가 집을 떠나야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빌어준 복이기도 했습니다.

(17~22)의 내용은 야곱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잘못 알고 손을 올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른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에브라임을, 왼손에 므낫세를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만한데도 그의 지혜는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장자로 선택하셨고, 라반보다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먼저 선택하여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므낫세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인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같고 므낫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했으며, 두 손자의 후손 역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떠나지 않으셔서, 때가 차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세겜 땅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야곱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나, 실현되었고요, 이후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을 좀 보세요. 어릴적이나 청년 시절에 지혜가 없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기회를 낭비했던 모습은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을 통해 징계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성장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영적 혜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과 영적 혜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께 지혜를 얻고, 영적 혜안이 열려서,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복된 어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온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와 보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성장해서 마침내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도 반복되는 일상이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에,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도 점점 성장하여 말년에는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어른이 되게 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CjS9fcfkHlU 

(찬 330)

 

사람이 한두 번은 성실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실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뛰어난 재능보다 성실함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보면 토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이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요셉에게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기근은 더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생명을 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요셉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요셉은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기근은 고대근동 지역에 임했고,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 곡식 창고의 출입(出入)을 관장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팔았고,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대 왕국 체계에서 토지 국유화를 의미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성읍 여러 곳에 분산시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이 애굽 왕실의 소작농처럼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왕이 모든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우리가 요셉의 일 처리와 그의 태도를 보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은 이 모든 거대한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돌려 자기 배만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 일관적으로 성실했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큰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려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3)”고 하였고,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고(286),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2810).”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6)에서 종들아, 성실하게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고, (3)에서는 윗 사람들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에서 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자기 일에 성실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셉의 성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셉의 성실함을 우리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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