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Harold C. Harvey

 (찬 412장)

 

 어느 인생에게나 사는 동안 기뻐할 일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라고 건면하는 이유는 그 비결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관용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은 포용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한 것입니다.
 바울도 목회자로서 여러 동역자들과 성도와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맨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같이 다른 지체에게 약점과 문제가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을 때 우리는 그들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라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은 누구나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조건과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염려와 걱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아버지 이 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라라고 했는데요.
보통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 감사하지만 기도 응답의 확신 가운데 미리 감사함으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샬롬)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이 평강은 세상에서 사람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평강이 아니지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7절~9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하는 이 평강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이유로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천국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재철 목사님의 ‘사명자 반’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목회할 때 단군교 교주가 등록 교인이 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잠실의 본부 건물과 강화도의 수련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교주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신도들 앞에서 밝히고 자신이 창시한 단군교를 스스로 해체하였다. 그리고 잠실 본부 건물 맨 위층에 있던 단군교 성전을 폐쇄하기 위한 예배를 드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단군교 성전을 찾은 나는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재단 앞에서 단군교 성전이 주님의 집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나더러 재단에 걸려있는 단군 초상화를 떼어 옥상에서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한 일에 내가 단군교 성전을 방문할 때까지 여러 주가 지났지만 그는 그때까지 두려움으로 인해 단군 초상화를 스스로 떼내거나 폐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단 중앙에 걸려 있던 단군 초상화를 떼어낸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그에게서 건네받은 라이터로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 천연색 초상화는 한동안 푸른 불꽃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재로 변했다.

그의 바짓가랑이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초상화가 완전히 제가 되고 난 다음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군 초상화를 떼어내 불태우는 내게 혹시 무슨 화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제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족자에 진하지 않는 그 그림을 그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그동안 그의 시선이 그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시작하여 정해진 시간마다 그 그림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였으면서도 그 그림으로부터 혹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그토록 두려워한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에 따라서 두려워할 수도 있고

염려로 휩싸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니 이 말씀을 가슴에 못 박듯이 깊이 새겨 넣으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https://www.youtube.com/watch?v=ON-K0M4KGMQ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넓고 위대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래는 성도로 살겠습니다.

성령님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도록 오늘 또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고요하게 하시고 평강이 있게 하시며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하루를 승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411)

오늘 (4)에서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라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싸움의 종류는 달라도 모든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한 단어 때문이다. ‘정욕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탐스럽게 보인 것이 뭐냐? 바로 정욕인 것이죠. 죄가 정욕을 타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깨보면 결국 정욕의 문제요,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욕과 탐욕을 부린다고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게 될까요?

야고보 사도는 (2)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과 탐욕이 다툼을 낳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첫째,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한다. 둘째, 살인하고 시기해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셋째, 그래서 다투고 싸운다.

그러니까 탐욕을 채워보려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욕과 시기가 생겨, 결국 다툼과 같은 싸움판이 벌어져, 악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탐욕을 채워보려 하는데, 싸움만 일어나고 얻지 못하는 것이죠.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3)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위해 기꺼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추구하며 살아도 될 텐데, 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기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서 구하는 것을 기도만이라고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의 삶의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뭐하는 거죠? 뭔가를 추구하며 사는 겁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지 않는다.’ 광야 40년 생활처럼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참 가난하고 헐벗었죠.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다 보니까 절실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실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부자가 되어버린 거죠.

성도 여러분, 진짜 복이 어떤 것인줄 아세요?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보다 정말 귀한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16)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시인의 고백이 나와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진짜 복이 있는 상태는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기도 밖에는 할 게 없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죠.

자 다음 구절을 보세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적당히 세상과 발맞추어 짝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은 여자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둔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거죠. 세상을 벗삼아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세상과 벗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을 어떨 때 쓰였을까요?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간음한 상태는 한마디로 설명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양다리 걸친 신앙은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입니다. 99% 하나님을 사랑하고, 1%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보세요. '아니 나같은 죄인을, 정말 너무나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시기하까지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잊지 말라! 무엇을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10)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주님 앞에서 높아진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죄를 씻고,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 자신의 죄의 속성 때문에, 탐욕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일으키심을 얻는 과정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럼 겸손이 뭘까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얌전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이지요. 성경에서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뭐죠? 교만이죠.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자 겸손의 모습을 갖추면 특별한 은혜가 임해요.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높이세요. 자신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앞으로 올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세요.

오늘 주님앞에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밖에는 나에게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주님 밖에는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고백하세요. 그리하면 때가 되면 어떻게 높이시던지 주님이 높이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영어 성경에서 “he will lift you up”. 그가 너를 들어올릴 것이다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신다는 거죠. 이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환경으로부터 구원이요, 문제로부터 구원이요,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 잘했다, 잘 살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O7DEH-rf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지만 우리 삶에도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탐욕을 부리고, 정욕으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서 낮추며,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모습임을 압니다. 주님, 우리를 리프트 업하여 주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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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속담이 있어요.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 큰 둑도 작은 개미 구멍으로 무너진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9)의 마지막 절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작에 여겼던 일이 결국 큰 낭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바로 우매한 사람의 결말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우매자'인데요. 전도자는 우매자가 권력과 힘을 가졌을 때 촉발하는 현상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폐해를 가져다 주는지 설명합니다.
(1~3)의 내용은 죽은 파리가 썩은 냄새를 나게 하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이 지혜와 명예를 망가뜨리며, 지혜자와 반대로 우매자는 잘못된 쪽으로 마음이 쏠리며, 길을 가다가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자는 오른쪽, 즉 좋은 쪽을 주로 살피지만, 우매자는 왼쪽, 즉 잘못된 쪽에 더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모든 것을 볼 때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지만, 우매자는 부정적인 면을 보고 비판하고 낮춘다는 것이죠.

 

이어서 (4~7)에서는 주권자, 즉 권세나 힘이 있는 자가 지혜자의 분을 일으킬 정도로 어리석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혜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손한 자세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자가 떠나면 그곳은 더 큰 재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주권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상식이 무너지는 사태가 나타나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자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명철한 자를 내어 쫓으며, 종들이 말을 타고 다니고, 왕자들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뒤죽박죽한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자를 멀리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여 온 나라를 혼란에 빠트려, 결국 여로보암이 10지파를 싹 데리고 나가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 (5~7)까지는 우매한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무리해서 큰 건축이나 토목공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큰 공사를 하게 하고, 쉼없이 일을 하도록 몰아붙인다는 것이죠. 본문 (11)에서 지혜자를 술객, 마술사에 비유하면서 주문을 걸기도 전에 뱀에게 물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뭐죠? 지혜자가 지혜를 베풀기도 전에 어리석은 주권자에게 미움을 받고 배제를 당하게 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왕이 되고, 어리석은 자가 CEO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신앙공동체의 리더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가장이 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오늘 전도자가 독자인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전도자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아라!’는 것이죠. 설령 우매자의 밑에 있다고 할지라도 떠나거나 도망치는 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곳을 지혜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자의 행동이라는 것이죠.

그럼 어떤 사람이 지혜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모르는 것이 우매함이죠. 학식이 높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우매한 자요, 학식이 낮아도 하나님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우매한 자요, 결국 그 우매함이 자기를 망치고, 자기가 있는 곳을 파괴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하듯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도 최고의 지혜시오, 명철함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함이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기도를 통해 쉼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취나는 인생이 아니라, 향취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상식이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님에게 지혜와 능력과 할 말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좋은 일, 선한 일이 연달아 부흥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우리안에 거주하시는 성령하나님,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사를 볼 때 우매자의 부정적인 안경이 아니라, 지혜자의 긍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악하고 더러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신경이 쓰이며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소속된 가정과 직장과 교회을 영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89)

 

어떤 사람은 신념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신앙으로 삽니다. 신념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는데요, 신앙은 신념과 다르게 자신이 틀릴 수 있으며, 항상 옳은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게 만든 것은 이성의 판단이지요. 그러나 이성이란 바람앞에 촛불처럼 불안전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이성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며, 확실하게 확정된 것 같은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모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분의 지혜는 온전합니다. 그래서 성도인 우리는 이성에 기반한 내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복이요, 삶의 성공 비결입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도자는 (15~18)에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나 우매자가 되지 말라고 조언하며 지나침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미지근하게 대충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에 빠지거나, 지나치게 악에 빠져 넘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완전한 의인의 삶이란 이 땅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를 추구하며 살더라도 항상 자신은 죄인이기에 실수와 허물이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남의 허물이나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은 남의 허점이나 실수를 보면서 냉소하거나, 비판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자신은 더욱 오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19)에서 한 사람의 지혜가 많은 권력자보다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자 자신이 수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경험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지식이나 총명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안목을 의미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전도자는 (21~22)에서는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거나 저주하는 말도 마음에 두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평가하는 판단에 민감하기 마련이죠. 자신이 좋아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욱 예민해 지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웃거나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잘못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며, 그 평가가 다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죠.

 

전도자는 살면서 많은 노력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지혜는 더 멀어졌고, 이제는 한계를 절감했다고 고백합니다(23). 또한 전심으로 인생을 돌이켜 살피고 연구한 끝에 세가지 현실을 절감했다고 말합니다. 죄와 유혹이 죽음처럼 치명적이라는 것, 세상에서 지혜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어리석게 산다는 점입니다(15~29).

 

이러한 전도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전도자의 가르침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하며, 이뤄내야 보다 행복하고 멋진 성도의 삶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이지요, 그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옳다는 신념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요, 옳으신 분이라는 인정을 더 자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실수나 실패를 더 많이 줄이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오는 참된 지혜를 자꾸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가 인생을 결정지는 중요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 되도록 빨리 가기 위해 자주 시간을 확인하고, 좀더 빠른 경로를 탐색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곳에 좀 더 빨리, 정확하게 도달하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빛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을 아예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가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지,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줄 것이 아닙니다. 연세드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연연하다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고,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고 탄식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되,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되, 진리안에서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을 창조주로 삼고, 그분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산다면, 신념으로 사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되고 가치있는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3)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새번역에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자꾸 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말씀이 몸의 보약이 되며, 상처가 낫고, 아픔이 사라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살아내는 일에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보호하시고 은혜주시는 성령님 오늘 우리 속마음을 당신께서 다 아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겠습니다. 주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을 더욱 묵상하며 우리의 자리를 잘 지키려고 합니다. 성령하나님 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혜와 명철함과 판단력을 주옵소서. 우리 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 살도록 오늘도 이끌어 주시옵서.

https://www.youtube.com/watch?v=AYRR9XrbmHU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생활의 달인'에서 캡쳐한 사진



(
496)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걸 보면 달인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면 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이어서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의 몫을, 사람의 분복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누릴 복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땅히 누릴 보상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마땅히 누릴 복이 될까요?

 

먼저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가장 공의와 정의로워야 할 재판장에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는 법망을 피해가고,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피해를 입더라는 거죠. 여기서 인간의 부패한 죄성이 불의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3)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법과 제도가 보안된다고 악이 그칩니까? 기술과 지식과 교육이 발전된다고 세상에 죄가 없어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게 옳은 일일까? 남들은 다 거짓말로 속여 빼앗고,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고, 어떤 짓이라도 해서 재물을 쌓고 떵떵거리는데, 나만 홀로 바보처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전도자는 이것을 기억하라! (17)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 (새번역)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어 바르게 사는 자들이 오히려 조롱을 받고, 불법과 악을 저지른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인 우리는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가 최선을 다해 사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뜁니다. 상대편에서 떠 밀고 태클을 걸어 넘어져도 싸우지 않고 열심히 뜁니다. 왜죠? 심판이 있기 때문이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타락한 세상이지만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며 즐거워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판자가 있으시기 때문이죠.

 

두 번째, 사람이 창조주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이란게 사실 짐승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요.

 

(19)에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겨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짐승과 같다는 것이죠.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측면에는 운명이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1) 둘 다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짐승의 영혼은 아래로 내려가 소멸되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던 사람은, 그가 했던 일도 죽으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창조자의 뜻과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당연히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짐승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그의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헛된 인생 살지 말고,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22)에서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결국 불의한 세상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인데,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어떤 삶이란 뭘까요?

지혜자인 전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기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할 일과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곧 건강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뜻과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 하십시오. 달인처럼 더 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더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해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을 잘하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그러나 나의 일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는 일이 된다면 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잘 한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이 일을 통해 창조주로부터 놀라운 상급을 얻을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축복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가 즐거움의 자리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일과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상급이 될 것입니다. 헛된 인생 헛되게 끝나지 않고, 헛된 인생을 참되고 영원한 인생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고, 이 세상에 파송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일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는 인생이 아니라, 선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일만하다 죽는 허무한 일생이 아니라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을 살리며,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가족들을 일으키고, 신앙의 가문을 세워가는 복된 일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대로 인도하는 별과같이 빛나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xp3xlo2NUwA

 


성능이 좋은 자동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성능이 재앙이 됩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죄에 대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할뿐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박히고 맙니다.

고장난 인간의 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 간데 없이 타락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타락과 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시편 36편은 지독하게 부패한 인간의 죄성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거짓없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높이시고 악인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1-4절)까지 인간의 부끄러운 죄성을 거짓없이 폭로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눈이 어두운 짐승같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뭣하러 두려워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죠.

눈빛은 죄를 짓고도 뻔뻔해져서 ‘불법은 드러나지 않고, 미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악과 속임수 뿐이고, 잠자리를 누울 때마다 흉계를 꾸미며, 길거리에서 제멋대로 설칠 뿐 아니라, 불장난을 하면서도 누가 화상을 입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마음은 더 이상 회개의 자리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굳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심장처럼, 이제 스스로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영적 타락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5-12절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드러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드높고, 그분의 성실하심은 끝이 없다.

그분의 목적대로 원대하고, 그분의 평결 드넓다.

광대하시되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시니

사람도, 생쥐 한 마리도 그분께는 소외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피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4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 무진장의 인자를 지니신 하나님

둘째, 범할 수 없는 진리의 하나님

셋째, 이론의 여지가 없으신 하나님

넷째, 인간이 감히 탐색할 수 없는 지혜와 모략에 뛰어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입에서 찬송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생명의 원천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복락의 강수로 마시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주님을 아는 자들에게서 주의 인자하심을 끊어지지 않고 계속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11-12)은 교만한 자가 맞이할 최후입니다.

교만한 자의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게 하셔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이 시편을 읽다보면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과연 독자인 나는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그늘아래 피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좋아도,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없다면, 아무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이 복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인자, 헤세드 안에 들어오라고,

당신의 보호아래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복락의 생수를 마시고,

주님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인자인 헤세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적) 여러분은 살면서 죽을 뻔한 위기나, 매우 위험한 곳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경험이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씩은 겪는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우도 있고, 한 발자국만 더 나갔더라도 큰일 날 뻔한 자리, 납치당할 뻔한 위기, 체온이 1도만 더 올랐어도 생명이 위독해지고, 조금만 삐끗했더라면 큰 낙사사고를 당할 뻔했던 경험등....

사실 잠깐의 차이 때문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무사히 지나가기도 하며, 살기도 하고, 죽게도 됩니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빼면 해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명이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입고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오늘 시편 36편이 달라 보이고,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한 것이 달라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편 기자의 찬송을 내것으로 만들어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지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너무나 오묘하고 기가막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우리 함께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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