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재판

 

 

 (찬 144장)

 

우리가 경기에서 심판에게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정입니다. 역시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혹 홈팬들의 함성과 야유에 압도당해서 공정하지 못한 판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판사도 뇌물이라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판정을 굽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빌라도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공정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정함보다 군중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먼저 본문 (15~19절)까지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십자가형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땅은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견한 총독 빌라도만이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고발과 거짓 증언에도 그저 침묵을 지키셨는데요.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죄 없는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고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도 그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며 남편 빌라도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신속히 정의로운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너무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알량한 안위를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20~23절)에 보면 군중의 압력이 계속되는 내용인데요.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를 사면해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결백을 발견한 이상 특별 사면권을 곧장 예수님께 사용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의식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군중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악명 높았던 죄수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가 재차 군중에게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모습에 실망했고 그 실망은 분노로 번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군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정치적 메시아, 즉 나를 번성하게 해주고 잘되게 해주고, 형통하게 해주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나의 삶 가운데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고, 또 그 낙심과 실망이 곧 분노로 바뀔 수도 있죠.
또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있는 이 군중들의 모습은 얼마든지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일 수도 있고요.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1881년작 ‘이 사람을 보라’. 문카치가 그린 ‘예수 3부작’ 중 하나.


 (24~26절) 말씀은 빌라도가 결국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정의와 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휩쓸렸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자손들에게 돌리라며 저주를 자처하기도 했는데요.

빌라도는 사회의 정의가 깨지는 것보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마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일에 무지하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그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면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고,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주님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또 성도라고 하는 근본적인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명이라는 책임을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또한 직분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또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내에서 잘못된 많은 문제와 비리와 사건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치와 진리의 존귀함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라도 내가 지켜야 할 사명의 책임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성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빌라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발당해 잡혀 온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할 놀라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의보다 정치를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 권세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이 세대에서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의 모습과 성난 군중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것처럼 내가 바로 빌라도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이 아닐까 적용해 보면서 오늘 또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ecwYFct3tY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빌라도 같은 자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과 같은 자인데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억울한 누명을 쓰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의 사명의 길을 가셨나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지키게 하옵시고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는 성도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오늘 또 인도하시고 교회를 지켜주시며
당신의 나라 안에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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