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310장)

 

 누가 강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 있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대지 않았는데 오늘 십 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엔게디 광야에서는 다윗의 사울을 피해 숨어 있었지만 십 광야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5절) 말씀까지 보면 사울은 이미 엔게디에서 다윗에게 항복을 선언했지만 십 사람들이 십 광야 앞 하길라산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광야를 샅샅이 다 뒤져서라도 다윗을 잡겠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더 이상 이전처럼 숨어있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정탐꾼을 보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울의 진영에 침투해서 정탐까지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아니라 사울에게 맞서는 왕이 되었고 군대와 군대 나라와 나라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다윗의 영토인 십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자기 군대가 다윗의 군대보다 규모만 클 뿐 사실상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이스라엘이 왕이 된 다윗은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나라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울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도피 경로


 이어서 (6~8절)까지 보면 다윗은 직접 적진에 침투해서 정탐하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아비새와 같은 용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의 군대의 용맹성입니다. 다윗의 군사는 약 600명 정도 되었는데요.
3천 명이나 되는 사울의 군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군대를 얕보아서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잠들었습니다. 군대 장관 아브넬과 군사들 역시 전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비새는 적진 중앙까지 들어가 창호로 사후를 땅에 꽂아 죽일 수 있다며 다윗에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우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다윗은 이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과 아비새


 왜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사울을 쳐서 죽게 하실 권한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시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사울을 죽여 원수 갚을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시험대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도록 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당하는 당사자임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상황을 인식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신앙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를 상고하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앞두시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하신 기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성도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요 성도는 강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약한 자이지만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함이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과정에는 정치적인 모략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두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쓰임받는 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oFAz1UHRI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의 뜻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주님, 우리도 오늘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한 믿음과 강한 생각과 강한 생각을 허락하여 주셔서 이길 수 없는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로 호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찬 218장)

살다 보면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억울함을 이유로 모든 상황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억울한 상황에서도 참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승리의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사 3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잡기 위해서 들염소 바위까지 갔습니다. 다윗은 고작 600명의 군사로 사울의 군대를 맞서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는 위기는 마치 이런 상황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요나단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의 구원은 어떠한 조건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상 14장 6절) 요나단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처럼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홀로 굴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곳에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잘랐습니다.
다윗은 지금 얼마든지 사울을 죽이고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기회를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최우선적으로 행동해야 하지요. 평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극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거룩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는 기회를 이기심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않게 합시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뵌 것을 심하게 자책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군사들에게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말하며 그를 해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경애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종을 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숙한 믿음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으며 원수 갚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엔게디 광야


다윗은 굴에서 나아가 사울을 “내 주 왕이여”라고 부릅니다. 엎드려 절하며 억울함까지 호소합니다.
특별히 사울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사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사울을 여전히 왕으로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상대를 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 그를 용서하고 품어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은 개와 한 마리 벼룩같이 미천한 존재이니 자신을 죽이려 추격하는 것은 무익한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판결하실 것을 호소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처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자신의 모습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겸손함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들어 쓰십니까?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자금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 앞에 겸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고백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대희 저자의 ‘다윗처럼 기도하라.’ 책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나는 오래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유대 광야 아래쪽의 엔게디 황무지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른 땅 밖에 없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기도하며 지세웠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하룻밤을 지냈을 장소에서 텐트를 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밤을 보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적이 나타나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때 나는 여기서 나를 보호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구나 그냥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정말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예측 불허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날씨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 한순간에 광야의 폭풍이라도 불어온다면 또한 광야의 야수나 뱀들이 잠자는 텐트를 둘러싼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광야는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널려 있는 곳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다윗이 숨은 곳이 바로 그런 광야였다. 다윗은 그 속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 나는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하룻밤의 광야였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었다. 하룻밤을 지내는 상황이 나와는 전혀 달랐다.
광야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눈을 뜨고 영적으로 맑아지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가 감추어져 있는 곳이 광야다 불안함과 고결함이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늘에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광야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광야를 허락하셔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합력하여 선이 되고 승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다윗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거나 누구에게 원수 갚아 줄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해야 되고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바라보고 또한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기 이것은 바로 다윗의 겸손해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다면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원수나 대적이라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 모두 다윗처럼 행동합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허락된 일이라고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합시다 자기가 부당하고 억울할 때 그것을 공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을 처리할 때 겸손하게 상대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마음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게 보시고 갚아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기도하며 지혜롭게 맞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biAsdLpSyY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오늘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울왕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이런 넉넉한 마음이 있게 하시고 넓은 그릇의 마음이 있게 하소서 또한 겸손히 있게 하시고 인정하고 존중해 줄 줄 아는 인격이 있는 성도가 되게 하시며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기도하며 주님 앞에 의로움으로 추구하며 해결할 때 하나님 이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뜻에 누가 되지 않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성령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오늘 또 영원한 지혜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50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한은 헛되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세워져 갔습니다. 그는 또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무리가 춤추며 다윗에 대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그들 앞에서 미친 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의 침을 흘렸습니다. 아기스는 자기에게 미치광이를 데려왔다 하며 신하들을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집안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는데 그 외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어느새 그들의 수장이 되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위로와 회복이 넘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모압 출신 증조모 룻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새에 있을 때 부모는 모압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최선을 다해 부모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요새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 수풀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다윗에게 도피 생활은 연단의 과정이었고 목적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과감하게 유다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도는 방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단의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Saul angry with David,Antoni Brodowski,1815

 반면에 사울의 모습을 보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셀나무 아래에서 손에 꼭 쥐고 있는 단창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울은 다윗이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며 신하들을 질책하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요.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눈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악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도액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견고한 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힘을 키워야 합니다.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악한 세력을 공동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뿌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서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메어 달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극심한 기근에 처하게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서 갔잖아요? 즉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와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오직 그의 아내인 나오미만이 겨우 살아서 모압에서 얻은 자부 룻만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돌아와서도 나오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궁극적인 기쁨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우리를 품으심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39, 40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란 때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데살로니가전서 33)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모든 일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선지자의 제안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반면에 사울은 불안함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도엑 같은 악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과 그렇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유연했지만 사울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담대한 성도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오늘 하루도 잘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오늘 이 하루도 넉넉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91)

 

 인간관계에서는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도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견고한 우정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깊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가진 조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학식이나 재력 때로는 외모나 성격을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을 보고 맺은 관계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소원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다윗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요나단의 신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위용에 매력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우정은 다윗이 형통할 때나 힘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나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진 지위를 사용해 도왔습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 견고한 이유는 조건과 형편을 초월한 순수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이 가진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천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우리 지체와 이웃들을 또한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 안에서 맺어진 우정관계야말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결코 인간적인 호감으로만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가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요나단은 다윗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울의 가문이 아니라 다윗과 그 가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인자를 자신의 집 안에 베풀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견고한 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한 집안 주인과 머슴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되자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장로 후보가 되었고 머슴 이자익에게 먼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 조덕삼은 자기의 이자익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머슴이 자신보다 먼저 장로로 선출된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자익을 교회 지도자로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덕삼은 이후에 이자익을 신학교에 유학 보냈으며 목회자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의 섬김으로 이자익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처럼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존 오토버그>, ‘선택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나는 30년간 알고 지낸 두 부부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모여 며칠간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관계의 열린 문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여러 번 추진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오자 그들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도 친밀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끔 당신은 친밀함을 강요합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게 놔두지 않고 자꾸만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관한 말도 너무 많이 합니다. 당신이 대화의 중심에 서려고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모두 내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부부는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다섯 친구를 새로 사귀해야겠군.’
나중에 이 일에 관해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약간 옥신각신 했고 어느 순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도 당신 친구들이 좋아요. 하지만 가끔 당신은 자신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세상으로 들어와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면서 당신은 내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죠.“
그 순간 내가 말로는 진실과 정직 진정성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나에 관한 진실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용기 있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나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린 문의 모험으로 부르신다. 그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이 친구가 있다는 뜻이요, 진정으로 복을 받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서로 인정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성장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며 만나는 관계는 상황에 따라 깨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인간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의 관계는 감정과 조건을 넘어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진정한 우정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영적 친구와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통치를 인정하고 맺어진 관계는 오래된 나무처럼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우정의 관계가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로 우리 모두의 관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님 이 세상은 참으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주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좋은 우정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도록 좋은 친구를 허락하여 주시고 내가 또한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며 참된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게 해 주십시오 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와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오늘 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로 저희를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악한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원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댈만한 예수님



(
86)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또 낙심해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면 매우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친구에 대한 명언을 몇 가지 조사해 봤는데요. 명심보감에 열매가 없는 과일 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가 없는 친구는 사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잘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라고 조언했고, 조지 오버트 목사님은 오래된 친구가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요즘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때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친밀한 우정을 우리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친밀한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쫓기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토로했는데요.

그리고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털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형편을 들은 후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울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과 어려운 형편을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발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진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hen)‘입니다. ’매력, 아름다움, 매력적인 인격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러분과 저에게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고 깨진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구가 될 때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넉넉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영적 친구의 관계가 아름답게 조성되고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9W3XwepXr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좋은 친구 관계로서 함께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친구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이 때에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고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도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찬 523장)
사람은 곤혹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책임 추궁을 당할 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변명을 사용하고 싶어하는데요, 그러나 이런 변명은 잠시의 소나기를 피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변명보다는 차라리 인정과 수용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의 변명과 하나님의 평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 때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그 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타락했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이것은 뭐를 암시하죠? 홍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사울 인생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이 일 때문에 근심하며 온 밤을 부르짖였는데, 정작 사울 본인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고, 사무엘을 만나자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완수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럼 내 귀에 들리는 양과 소의 소리는 무슨 소리냐? 왜 이것을 살려왔느냐”고 추궁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변명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인데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좋은 소와 양을 골라 온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즉 그건 백성이 한 일이지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거죠.

이 사울의 말은 누가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어요. 왜냐하면 정말 사울이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면 길갈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20킬로는 더 가까운 기럇여아림으로 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멜에서 길갈까지는 족히 100킬로 미터는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런 먼 거리를 가축 떼를 이끌고 이동했다는 것은 그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지않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뻔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할 때 처럼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엄숙히 전합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작은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시고, 왕의 길로 보내셔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고 왔나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요, 이 말은 사무엘상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구절이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보고 평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21~22) 함께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두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반복해서 죄를 부인하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위를 빼앗아 다시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의 핵심을 짚어주었는데요. 그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수많은 제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제사는 순종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자 이게 오늘 말씀의 내용인데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을까요?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길 원하실까요?
첫번째, 변명은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자기가 전쟁을 이끄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수하들의 군사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변명했습니다. 그 변명은 알고 보면 자기 합리화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울이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 좋은 가축들을 다 죽이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솔직히 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빕니다“라고 했다면 그는 분명이 용서받았을 것이요, 그의 가문도 멸족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813)에 보세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속죄의 약속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길 원하실까요?

두번째 (17)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는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스스로 낮아지면 높아질 만큼 공간이 커짐을 가르쳐 주신다고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Z8CHPQWXGo

사울이 겸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블레셋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반면 다윗을 보세요. 그가 끝까지 하나님께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언약(David’s Covenant)’를 통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요? 결국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사울은 변명했고, 다윗은 솔직히 시인하고 침상을 띄우는 회개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 둘은 이스라엘의 왕인데, 모두 다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자기 칼에 엎드려 죽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에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결과의 차이는 결국 겸손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뭔가요?
당신은 사울왕이 되려고 하십니? 자신도 모르게, 아니면 다윗왕처럼 살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다 되는 게 아니라 절대로 선택하면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왕의 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변명보다 수용을, 교만보다 겸손의 길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찬 365장)

인생을 살다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울 역시 그러한 순간에 맞닥뜨렸습니다. 그가 맞서야 될 블레셋 군대는 너무나 강력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불순종을 선택함으로써 믿음을 지키는 데 실패하게 되는데요.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다스린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블레셋 위협에 대응해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소집된 군사의 수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이 된 후 첫 번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전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7절)까지 내용을 보면 사울은 상비군을 3천 명 두었는데 그중에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나머지 천 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보냅니다. 요나단이 군대를 데리고 블레셋의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자 블레셋이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주둔하던 길갈에 모여 싸움을 준비했는데 수적으로 열쇠가 너무 극심했습니다.
5절에 보면 블레셋의 군대 규모를 볼 수 있는데요. “병거가 3만(전차가 3만대), 마병이 6천(말을 타는 기병이 6천), 백성은 해변에 모래같이 많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대규모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 온 것입니다.
싸우기 위해 모인 백성은 블레의 군대 위용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굴과 수풀 바위틈과 웅덩이에 숨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길갈 진영에 남았습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큰 일을 목도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단 말입니다.

(8~9절)까지는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무엘이 길갈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이레를 기다리라고 했고 사울은 그의 말을 따라 급박한 가운데서도 이레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도착이 지체되자 백성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칭 제사장이 되어 번제를 번재를 드리고 맙니다. 이 상황만 보면 사울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마저 드는 대목입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울은 그 모든 상황에서 순종보다는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패하면 패하리라 또는 죽으면 죽으리라 이런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때인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10~11절) 섣부른 변명을 하는 사울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오늘 공교롭게도 사울이 번제를 바친 바로 그때 사무엘이 도착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고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왜 그랬는지를 해명하게 되는데요. 백성은 겁을 먹고 흩어지고 사무엘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고 블레셋의 공격은 임박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번죄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 상황 윤리를 적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란 무엇일까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각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맞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신속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이 사울의 상황 논리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3RBHWXVKg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진리는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상황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 순종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끝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지하고

융통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도우시리라는 그릇된 믿음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길을 여쭙고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상황 윤리가 아니라 주님의 절대적 진리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도 적용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융통성은 순종이 아닙니다.

융통성을 하나님 말씀 앞에 발휘하지 않게 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순종하며 주님께서 나아가실 때 우리의 길을 여시고 복된 삶을 펼쳐줄 것을 믿습니다.
오늘 또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63장)

 여호와의 궤가 다곤 신당에 머무는 동안 다곤 신상은 엎어지다 못해 머리와 두 손이 끊어졌습니다
.
언약궤가 지나갔던 블레셋에 아스돗, 가드 에그론 성읍에는 독한 종기 재앙이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언약궤를 가져왔을 때만 해도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7개월을 머무는 동안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던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에 난 종기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결국 그들은 언약계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는데요.

하나님은 블레셋의 성읍에 언약궤가 머무는 7개월 동안 그들의 우상 숭배와 반역을 꾸짖으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앞에서 블레셋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단지 재앙이 없는 편안한 삶만을 생각하다가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꾸짖으셨듯이 우리 잘못을 징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개인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교훈은 놓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죄 문제로 징계가 받을 때가 있음을 알고 혹시 나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요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 성숙하는 길입니다.

 

 이어서 블레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앙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왕에게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고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도 참된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지요.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두려워하면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언약궤를 빨리 돌려주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을 뛰어넘어 그분이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우리 가운데 적용해보면 우리는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깊어지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있으나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가지라는 뜻이죠.
우리가 주님과 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희근 [날마다 천국을 향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베일리라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도 만났는데 그는 평생 농업공학에 몸을 바친 사람으로서 퇴직 후에 히말리아에서 그 지역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업 기술이 열악해서 식량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일리가 가진 아쿠아 폴리스라는 기술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송어의 분비물을 통과시킨 물을 식물에 공급하고 식물에게 준 물을 다시 회수해 순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어의 분비물에는 질산염이 풍부해서 식물의 좋은 비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질산염을 다 흡수하면 물이 깨끗해져 다시 송어가 그 물을 먹는 방식으로 순환되었습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송어도 많이 키울 수 있고 곡식도 잘 자라서 식량이 풍부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남아프리카 해변에서 멋지게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 제가 가진 기술을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도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모든 선물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영원한 보물을 쌓는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런 곳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런 사람 가운데 살면서 제자를 삼고 목회자를 훈련시키길 원하십니까? 제게 주신 모든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진짜 보물 영원한 보물 끝없는 만족을 주는 보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플랜 목사님의 기도처럼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그러한 경험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현실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소홀히 여긴다면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늘 기도하십시오 생활 속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주실 것이오 또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dXHtNMJ2Oo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늘 블레셋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들의 행동을 보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면하길 원합니다. 늘 기도 시간에도 기도하지만 기도 시간 외에도 생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