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어떤 사람은 신념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신앙으로 삽니다. 신념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는데요, 신앙은 신념과 다르게 자신이 틀릴 수 있으며, 항상 옳은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게 만든 것은 이성의 판단이지요. 그러나 이성이란 바람앞에 촛불처럼 불안전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이성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며, 확실하게 확정된 것 같은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모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분의 지혜는 온전합니다. 그래서 성도인 우리는 이성에 기반한 내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복이요, 삶의 성공 비결입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도자는 (15~18)에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나 우매자가 되지 말라고 조언하며 지나침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미지근하게 대충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에 빠지거나, 지나치게 악에 빠져 넘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완전한 의인의 삶이란 이 땅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를 추구하며 살더라도 항상 자신은 죄인이기에 실수와 허물이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남의 허물이나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은 남의 허점이나 실수를 보면서 냉소하거나, 비판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자신은 더욱 오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19)에서 한 사람의 지혜가 많은 권력자보다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자 자신이 수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경험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지식이나 총명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안목을 의미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전도자는 (21~22)에서는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거나 저주하는 말도 마음에 두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평가하는 판단에 민감하기 마련이죠. 자신이 좋아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욱 예민해 지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웃거나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잘못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며, 그 평가가 다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죠.

 

전도자는 살면서 많은 노력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지혜는 더 멀어졌고, 이제는 한계를 절감했다고 고백합니다(23). 또한 전심으로 인생을 돌이켜 살피고 연구한 끝에 세가지 현실을 절감했다고 말합니다. 죄와 유혹이 죽음처럼 치명적이라는 것, 세상에서 지혜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어리석게 산다는 점입니다(15~29).

 

이러한 전도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전도자의 가르침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하며, 이뤄내야 보다 행복하고 멋진 성도의 삶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이지요, 그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옳다는 신념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요, 옳으신 분이라는 인정을 더 자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실수나 실패를 더 많이 줄이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오는 참된 지혜를 자꾸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가 인생을 결정지는 중요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 되도록 빨리 가기 위해 자주 시간을 확인하고, 좀더 빠른 경로를 탐색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곳에 좀 더 빨리, 정확하게 도달하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빛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을 아예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가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지,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줄 것이 아닙니다. 연세드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연연하다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고,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고 탄식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되,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되, 진리안에서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을 창조주로 삼고, 그분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산다면, 신념으로 사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되고 가치있는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3)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새번역에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자꾸 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말씀이 몸의 보약이 되며, 상처가 낫고, 아픔이 사라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살아내는 일에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보호하시고 은혜주시는 성령님 오늘 우리 속마음을 당신께서 다 아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겠습니다. 주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을 더욱 묵상하며 우리의 자리를 잘 지키려고 합니다. 성령하나님 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혜와 명철함과 판단력을 주옵소서. 우리 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 살도록 오늘도 이끌어 주시옵서.

https://www.youtube.com/watch?v=AYRR9XrbmHU

 

(찬 407)

 

살아볼수록 인생은 허무하죠. 과연 인생의 허무는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의미있는 인생이 살아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을 경외를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내용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물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찾으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3)을 해석하며,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뜻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중히 살피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자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에 극에 달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고 말씀하셨고,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16,1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 시대나, 이사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더 둔감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못하면 즉시 치셨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기에 더 죄를 가벼히 여기고, 더 만홀히 여깁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참된 경외와 경건의 자세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본문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여기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앞에두고 하는 말도 천박하거나 경박하면 모독이 되는데,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죄요, 입술로 범죄하는 악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허물은 점점 늘어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랍시고 아무 말이나 막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하며, 인도하심을 구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하는 것보다, 자주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는 보배로운 향기와 같습니다.

(58)에 보세요.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8)에 보면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들과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외형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러 말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뱉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실수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말을 되도록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향연을 더 많이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얼마나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실수가 많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외적 경건을 기본으로 두고, 내적 경건함이 더해지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따라서 감정이나 기분으로 말하기 보다 믿음으로 말하고, 또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향기로운 향기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성령님, 할 말을 우리 생각과 입에 담아주시옵소서.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생활의 달인'에서 캡쳐한 사진



(
496)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걸 보면 달인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면 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이어서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의 몫을, 사람의 분복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누릴 복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땅히 누릴 보상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마땅히 누릴 복이 될까요?

 

먼저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가장 공의와 정의로워야 할 재판장에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는 법망을 피해가고,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피해를 입더라는 거죠. 여기서 인간의 부패한 죄성이 불의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3)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법과 제도가 보안된다고 악이 그칩니까? 기술과 지식과 교육이 발전된다고 세상에 죄가 없어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게 옳은 일일까? 남들은 다 거짓말로 속여 빼앗고,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고, 어떤 짓이라도 해서 재물을 쌓고 떵떵거리는데, 나만 홀로 바보처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전도자는 이것을 기억하라! (17)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 (새번역)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어 바르게 사는 자들이 오히려 조롱을 받고, 불법과 악을 저지른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인 우리는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가 최선을 다해 사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뜁니다. 상대편에서 떠 밀고 태클을 걸어 넘어져도 싸우지 않고 열심히 뜁니다. 왜죠? 심판이 있기 때문이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타락한 세상이지만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며 즐거워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판자가 있으시기 때문이죠.

 

두 번째, 사람이 창조주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이란게 사실 짐승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요.

 

(19)에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겨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짐승과 같다는 것이죠.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측면에는 운명이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1) 둘 다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짐승의 영혼은 아래로 내려가 소멸되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던 사람은, 그가 했던 일도 죽으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창조자의 뜻과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당연히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짐승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그의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헛된 인생 살지 말고,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22)에서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결국 불의한 세상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인데,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어떤 삶이란 뭘까요?

지혜자인 전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기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할 일과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곧 건강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뜻과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 하십시오. 달인처럼 더 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더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해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을 잘하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그러나 나의 일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는 일이 된다면 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잘 한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이 일을 통해 창조주로부터 놀라운 상급을 얻을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축복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가 즐거움의 자리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일과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상급이 될 것입니다. 헛된 인생 헛되게 끝나지 않고, 헛된 인생을 참되고 영원한 인생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고, 이 세상에 파송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일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는 인생이 아니라, 선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일만하다 죽는 허무한 일생이 아니라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을 살리며,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가족들을 일으키고, 신앙의 가문을 세워가는 복된 일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대로 인도하는 별과같이 빛나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xp3xlo2NUwA

 


(찬
435)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이 오늘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까?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면 행복할까?’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런 것에 행복이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현대시대에서 사람들은 에고이즘(egoism),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꾀하며 살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것도 역시, 인생을 헛사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한번 뿐인 인생을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얻고, 더 즐거운 쾌락을 갈망합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지혜와 수고를 아끼지 않지요. 직장생활하는 사람의 목표는 뭡니까? 승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심을 내어 성과를 내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면서 승진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전도자는 권고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결국 죽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걸 놓고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여 기존의 창고가 모자랄 정도의 부를 쌓고는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자며 즐기자라고 기분 좋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 너의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너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거야 말로 허무 아닌가요?

 

전도자는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지나치게 수고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전도자는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허무한 일이라고 조언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후대에 물려줄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한탄합니다. 자신의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이 쌓은 재물을 물려받는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들이 많습니다. 부보가 쌓은 업적과 재산을 조건없이 물려받았는데, 그것이 결코 복이 되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역시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는 아버지 솔로몬에게 강력한 이스라엘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라를 제대로 경영할 능력이나 지혜가 없었는데다, 연륜이 많은 원로들의 조언보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말만 듣고 행동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게 되었고, 백성의 뜻을 외면함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경고한 것은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 2030 세대에서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흙수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라고 표현하죠. 2030 청춘들이 부모님의 연소득과 가정환경 등 출신 배경을 수저로 빗대 표현하는 방식이죠. 수저론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라는 영어 표현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안락한 금수저의 삶을 주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때로는 자녀의 학업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을 자청하고, 오직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자녀들에게 어떤 집안일도 시키지 않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게 과연 복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녀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로다” (21)

전도자는 자녀들에게 고생없는 편안한 삶을 위해, 가족이 누려야 할 현재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권고합니다.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3)

그럼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만들까요?
(24)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도다.”

 

마지막으로 (26)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는데요, 우리말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지식과 복을 주시지만 죄인에게는 온갖 노력으로 모으고 쌓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넘겨주게 하신다. 이것 또한 허무하고 뜬 구름 잡는 일이다.”

의인은 하나님께 지헤와 지식과 기쁨을 받고, 악인이 수고로 쌓은 재산은 하나님이 의인에게 넘겨주신다면서, 악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마치 바람을 손에 잡으려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의 앞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물려주려 애쓰십시오. 지혜롭지 못하면 어떤 재물도 그에게 복이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과도하게 일에 메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행복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흘러 넘치는 삶을 위해서인지 말입니다. 흘러넘치는 삶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때 나를 통해 흘러 넘치게 하는 삶입니다. 축복의 금고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지금 누리세요. 감사하세요. 또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흘러 넘치게 보낼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보십시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그 열심히 사는 이유가 불안 때문이라면 얼마나 불안정한 삶이겠습니까? 또 열심히 사는 이유가 나 잘 먹고 잘 사는 이유 때문이라면 역시 얼마나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부자 같겠습니까?
같은 인생을 살아도 헛된 삶이 있고, 가치있는 삶이 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아야 진짜 행복한 결말이 주어집니다. ’내 인생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봅시다. 특히 자녀들에게 하나님 없는 편안한 삶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살도록 신앙전수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에 지혜와 현명한 선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를 통해 주신 지혜로운 삶을 깨달았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누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신앙을 물려주는 깨어있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열심히 살되 행복을 포기할 만큼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주께서 주신 건강도 지키게 하옵소서.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OAtdzlUxNCU

 

 

(찬송가 446)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거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지 이런 허무감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커(Michael Steger)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 질병, 예술 작품, 결혼 등에서 의미를 찾듯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부터 전도서 말씀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전도자는 인생이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처럼 허무함을 부르짖는 전도자의 모습은 마치 세상을 비관하는 회의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의주의에 빠진 불신자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애하는 전도자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평가한 이유가 뭘까요.

 

오늘 말씀은 전도서 11절부터 11절입니다.
우리나라 민속 신앙에는 십장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물상은 해, , , ,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 사슴, 또는 대나무입니다. 이 모두가 장수물이므로 자연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시문이나 그림, 조각 등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요.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장생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장수를 간절히 꿈꿀 만큼 철저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오히려 방증합니다.

전도자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땅은 지속되지만 우리 인간은 계속 죽고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은 머무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월도 화살같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한껏 자신의 젊음을 자랑하던 사람도 돌아서면 어느새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게 되지요.
그리고 한 번 지나가 버린 세대를 그다음 세대가 제대로 기억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왜 이토록 유한한 인간의 허무함을 강조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함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답을 발견하라고 도전하는 메시지인 것이죠.

 

많은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른 채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영생의 진리와 복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자는 묻습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가 도대체 무슨 보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강물이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결코 바다를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죠.
그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로 원하는 사업도 해보았습니다. 궁전도 지어 보고, 포도원도 마련하고, 동산과 정원도 가꿔 보았습니다. 그 수고를 통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고 사람들의 칭송도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그 칭송도 그의 귀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의 수고와 업적 중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하지만 사람들의 엄청난 업적 역시 과거에 누군가가 발견하거나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방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가르쳐 줍니다.
만족 없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삶을 힘있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덧없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와 소망을 일깨워주신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인생이 참 허무하고 너무 빨리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의미를 쫓아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여건과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주신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시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93장)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제 때에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아무리 봐도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인데도 그분은 마치 기도를 전혀 안 들으신 것처럼 침묵해 버리십니다. 이럴 때 의심과 실망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반응하는 아닙니다. 일반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은 그런 자세를 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원어성경 번역본에는 ‘꾸준히’라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를 계속하며 꾸준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어느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셨을 때는 너무나 그 응답이 신속하고 놀라워서 자신을 멸망의 웅덩이와 진흙탕이라는 밑바닥에서 높은 반석위까지 끌어올리셨고, 자주 넘어지는 발걸음을 든든하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응답과정은 마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슈욱하고 올라가는 것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끌어올려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또한 신기한 것은 자신의 입에 올려드릴 new song, 새 노래까지도 하나님이 자신의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꾸준히 기다린 것밖에는 없습니다. 응답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바람한 점는 날 돗대를 올린 뱃사공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는 너무나 강력하여,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도 의지할 마음을 갖게 하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에서 이렇게 결론을 미리 내립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NIV 영어성경에서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who turn aside to false gods”

‘거짓 신들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서 내려오고, 거짓된 신들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십시오. 또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탄의 말에 속어 넘어가지 않도록, 늘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유지하십시오. 또한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기도로 아뢰고, 꾸준하게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놀랍도록 응답하시며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시편 기자인 다윗은 (4-10)까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5)에 이 고백의 핵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도무지 헤아려 보거나 세어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눈가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별 중에 하나를 보고 말하는 겄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죠.

 

(적)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 여러분, 구름 뒤에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저편에 가려져 빛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은 믿으면서도 내 현실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섭리의 손길을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꾸준히 기도하고, 꾸준히 겸손하고, 꾸준히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하루인 줄 알고

믿고 기대하며, 힘차고 행복하게 시작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ctp-3tHEM

 


성능이 좋은 자동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성능이 재앙이 됩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죄에 대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할뿐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박히고 맙니다.

고장난 인간의 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 간데 없이 타락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타락과 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시편 36편은 지독하게 부패한 인간의 죄성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거짓없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높이시고 악인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1-4절)까지 인간의 부끄러운 죄성을 거짓없이 폭로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눈이 어두운 짐승같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뭣하러 두려워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죠.

눈빛은 죄를 짓고도 뻔뻔해져서 ‘불법은 드러나지 않고, 미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악과 속임수 뿐이고, 잠자리를 누울 때마다 흉계를 꾸미며, 길거리에서 제멋대로 설칠 뿐 아니라, 불장난을 하면서도 누가 화상을 입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마음은 더 이상 회개의 자리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굳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심장처럼, 이제 스스로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영적 타락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5-12절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드러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드높고, 그분의 성실하심은 끝이 없다.

그분의 목적대로 원대하고, 그분의 평결 드넓다.

광대하시되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시니

사람도, 생쥐 한 마리도 그분께는 소외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피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4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 무진장의 인자를 지니신 하나님

둘째, 범할 수 없는 진리의 하나님

셋째, 이론의 여지가 없으신 하나님

넷째, 인간이 감히 탐색할 수 없는 지혜와 모략에 뛰어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입에서 찬송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생명의 원천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복락의 강수로 마시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주님을 아는 자들에게서 주의 인자하심을 끊어지지 않고 계속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11-12)은 교만한 자가 맞이할 최후입니다.

교만한 자의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게 하셔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이 시편을 읽다보면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과연 독자인 나는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그늘아래 피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좋아도,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없다면, 아무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이 복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인자, 헤세드 안에 들어오라고,

당신의 보호아래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복락의 생수를 마시고,

주님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인자인 헤세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적) 여러분은 살면서 죽을 뻔한 위기나, 매우 위험한 곳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경험이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씩은 겪는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우도 있고, 한 발자국만 더 나갔더라도 큰일 날 뻔한 자리, 납치당할 뻔한 위기, 체온이 1도만 더 올랐어도 생명이 위독해지고, 조금만 삐끗했더라면 큰 낙사사고를 당할 뻔했던 경험등....

사실 잠깐의 차이 때문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무사히 지나가기도 하며, 살기도 하고, 죽게도 됩니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빼면 해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명이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입고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오늘 시편 36편이 달라 보이고,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한 것이 달라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편 기자의 찬송을 내것으로 만들어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지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너무나 오묘하고 기가막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우리 함께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