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254장)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은 추락하며 떨어질 때보다 승승장구하며 올라갈 때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짜 큰 죄는 승승장구할 때 범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가 점점 더 부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다윗과 백성들은 영적으로 게을러 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성공에 취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한참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매서운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깨닫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1절)은 말씀합니다. 정확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승승장구하다 보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라의 총 인구조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격동시키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윗은 결심한 대로 군대장관 요압을 불러 전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이 백 배나 더하게 하실 백성의 수를 왜 헤아립니까?’라고 반대했지만, 왕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따라 9개월 20일간 인구조사를 한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에서 칼을 뺄 수 있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남유다 사람이 오십만명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야 자책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10절)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그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년 기근과 석달 동안 대적에게 쫓기는 것과 사흘 동안 전염병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손에 쫓기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이 복이 될까요?
여러가지로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왜 다윗의 인구조사는 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말씀의 적용이 명확해 집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예전에도 여러번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다윗의 인구조사가 하나님의 재앙을 불러왔을까요?


사실은 인구조사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실체의 핵심은 다윗의 교만입니다.

다윗은 나라가 든든히 서고, 왕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고, 전쟁마다 이기고, 자신이 명령을 받드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신앙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잘 했으니 이 정도가 됐지?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업적을 이루었겠는가?’ 내심 이런 자만이 차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의 속내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대입시켜 다윗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게 하고 징계하시고자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길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고 자신을 높이는 영웅심리에서 내려오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로 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다윗왕



 우리도 살다보면 어떤 신자는 큰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는 듯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평안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에 인색하고, 봉사도 안 해도 하는 일만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작은 죄를 지은 것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사사껀껀 간섭하시고 들어오십니다. 목회자가 보기에 이런 죄들은 회개했으니까 그냥 넘어가셔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냉혹하게 다루십니다.

어떤 신자는 왜 큰 죄에 빠져도 그냥 넘어가시지만, 어떤 신자는 여러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징계하실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다른 나라들은 타락해도 하나님께서 촘촘하게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족속도 그들의 죄가 차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에게는 혹독하십니다. 광야 40년을 보면 물없다고 원망하면 징계하시고, 모세에게 불평하면 징계하시고, 조금만 잘못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는 타락해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게서 태어나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나라들을 이끄는 영적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다른 나라면 몰라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위태롭습니다. 실로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왕의 지팡이가 내려가서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nPprpefnc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다고, 하나님의 징계가 많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타락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고, 당신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할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고 많은 것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미운 아이에게는 떡하나 주지만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댄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지만 내 자식이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이와 같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고, 어려움이 많다면, 하나님께서 작은 죄라도 심상히 여기지 않는다고 여기신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낮추시고 훈련하시고, 징계하신다면 다윗의 사명이 있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며, 주님의 복음을 지켜야 할 등불의 사명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등불의 사명이 있음을 알고,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찬 304장)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언약 커버넌트는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 인격적으로 맺어진 약속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커버넌트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신실하고 철저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언약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중히 여기고 신실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은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년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다급해진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는데요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아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진멸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으므로 진멸당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부역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언약을 위반하고 기본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약속은 소중하고 무겁게 다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결코 인생을 가볍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2)에 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을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열심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민족적 배타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열심으로 훼손한 것입니다.
이 열심은 사울이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 나아가 후손에게까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의도가 좋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의도와
유익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이어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사울의 죄를 속죄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집안 사람 일곱을 요구했고, 다윗은 이에 응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안의 작은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들을 존중히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약에 따라 구원받은 성도는요 약속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본 덕목으로 갖추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보면,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기억해서 므비보셋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특별히 므비보셋을 아꼈는데, 언약에 따르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다윗은 맹세를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의 대상인 므비보셋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마지 못해서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사명을 이루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가 처형당한 자들의 시신을 밤낮으로 지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름으로써 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겁게 여기는 마음과 함께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민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요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신의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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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병태 저자의 하나님의 퍼즐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바이텍 시스템 이백용 회장은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크고 놀라운 약속만 바라보고 좋아서 쾌재를 부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백용 회장은 덧붙여 말한다.
어떤 분이 선물로 복에 관한 성경 말씀이 적힌 나무패를 주셨는데, 구절이 참 좋았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다음 구절인 15절에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줄은.
우리가 범했던 실수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한 약속만 보고 들떠 있던 우리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곳도 주목하라고 하신다. 참을성 없는 우리에게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을 첨언하고 계신다.
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복된 약속을 주셨지만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훈련 과정 없는 축복은 해가 될 수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과정인 간과의 영광은 변색될 우려가 짙다. 누구나 고난의 터널을 지나 약속을 받는다. 훈련의 과정을 거쳐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건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이 승리의 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인생 퍼즐을 풀어가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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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풀어가는 현장은 바로 고난의 터널을 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고, 인내를 거쳐서 그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거는 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Xm0FX_Oas

말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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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언약,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완수하자 비로소 가뭄이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가 응답됐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오래 전 무지개를 바라보며 언약을 기억한 노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도 다윗처럼 언약의 신실하고 철저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사람과 약속도 신실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이요, 경건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과의 약속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함부로 약속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킴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때가 오면 이루어질 것이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은 바로 그 약속의 수종드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수종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귀한 그런 축복의 현장에 반드시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강력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주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기브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특별히 환경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픈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시옵시사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용하소서. 언약의 통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당당하게 하시고, 부유하며 강건하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 충만한 복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은총과 자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 드립니다.

 

 

 

삼상 29장


 (
찬 397장)

‘위기가 곧 기회다’라고 하는 말이 있죠.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도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용병 노릇을 했던 다윗은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지요.
블레셋의 편에 서지 않으면 생존 위협을 받을 것이고 블레셋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우면 자기 동족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다윗에게 피할 수 없는 크나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스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신하였던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다윗의 참전을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또한 방백들은 오래전에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상기시켰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던 그 노래 가사를 아기스에게 이야기하면서 방백들은 다윗이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 노래 가사를 들었을 때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그 노래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다윗의 인생에 이렇게 구겨지고 힘든 순간들이 많아졌던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방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윗을 세 번이나 인정했습니다. 이제까지 다윗에게 허무를 본 적이 없었고(3절)에 정직하여 악을 찾을 수 없었고(6절)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하다고(9절)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의 강력한 항의로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라고로 돌아가게 되지요.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블렛의 진영의 군사로 참여하지 않게 되고 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과 맺은 언약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뜻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그저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위기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길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위기 때마다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오래전에 불렀던 여인들의 노래가 다윗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되었지만, 오늘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뼈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또 우리가 만났던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서 별처럼 빛나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로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해서 안전을 도모하려 했고 또 오늘 본문에서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 속에서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 불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윗을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다윗처럼 여러분의 상황도 막막하거나 답답하십니까 우리가 이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이십니다.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희에게 넘쳐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H7qH7LrRg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위기 어려움의 위기 질병의 위기 문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불의하고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문제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조합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을 간절히 바라며 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391)

 

 인간관계에서는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도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견고한 우정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깊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가진 조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학식이나 재력 때로는 외모나 성격을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을 보고 맺은 관계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소원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다윗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요나단의 신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위용에 매력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우정은 다윗이 형통할 때나 힘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나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진 지위를 사용해 도왔습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 견고한 이유는 조건과 형편을 초월한 순수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이 가진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천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우리 지체와 이웃들을 또한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 안에서 맺어진 우정관계야말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결코 인간적인 호감으로만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가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요나단은 다윗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울의 가문이 아니라 다윗과 그 가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인자를 자신의 집 안에 베풀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견고한 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한 집안 주인과 머슴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되자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장로 후보가 되었고 머슴 이자익에게 먼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 조덕삼은 자기의 이자익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머슴이 자신보다 먼저 장로로 선출된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자익을 교회 지도자로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덕삼은 이후에 이자익을 신학교에 유학 보냈으며 목회자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의 섬김으로 이자익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처럼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존 오토버그>, ‘선택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나는 30년간 알고 지낸 두 부부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모여 며칠간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관계의 열린 문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여러 번 추진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오자 그들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도 친밀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끔 당신은 친밀함을 강요합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게 놔두지 않고 자꾸만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관한 말도 너무 많이 합니다. 당신이 대화의 중심에 서려고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모두 내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부부는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다섯 친구를 새로 사귀해야겠군.’
나중에 이 일에 관해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약간 옥신각신 했고 어느 순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도 당신 친구들이 좋아요. 하지만 가끔 당신은 자신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세상으로 들어와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면서 당신은 내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죠.“
그 순간 내가 말로는 진실과 정직 진정성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나에 관한 진실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용기 있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나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린 문의 모험으로 부르신다. 그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이 친구가 있다는 뜻이요, 진정으로 복을 받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서로 인정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성장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며 만나는 관계는 상황에 따라 깨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인간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의 관계는 감정과 조건을 넘어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진정한 우정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영적 친구와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통치를 인정하고 맺어진 관계는 오래된 나무처럼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우정의 관계가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로 우리 모두의 관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님 이 세상은 참으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주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좋은 우정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도록 좋은 친구를 허락하여 주시고 내가 또한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며 참된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게 해 주십시오 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와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오늘 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로 저희를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악한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원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댈만한 예수님



(
86)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또 낙심해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면 매우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친구에 대한 명언을 몇 가지 조사해 봤는데요. 명심보감에 열매가 없는 과일 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가 없는 친구는 사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잘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라고 조언했고, 조지 오버트 목사님은 오래된 친구가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요즘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때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친밀한 우정을 우리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친밀한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쫓기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토로했는데요.

그리고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털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형편을 들은 후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울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과 어려운 형편을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발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진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hen)‘입니다. ’매력, 아름다움, 매력적인 인격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러분과 저에게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고 깨진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구가 될 때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넉넉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영적 친구의 관계가 아름답게 조성되고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9W3XwepXr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좋은 친구 관계로서 함께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친구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이 때에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고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도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411)

오늘 (4)에서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라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싸움의 종류는 달라도 모든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한 단어 때문이다. ‘정욕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탐스럽게 보인 것이 뭐냐? 바로 정욕인 것이죠. 죄가 정욕을 타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깨보면 결국 정욕의 문제요,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욕과 탐욕을 부린다고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게 될까요?

야고보 사도는 (2)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과 탐욕이 다툼을 낳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첫째,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한다. 둘째, 살인하고 시기해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셋째, 그래서 다투고 싸운다.

그러니까 탐욕을 채워보려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욕과 시기가 생겨, 결국 다툼과 같은 싸움판이 벌어져, 악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탐욕을 채워보려 하는데, 싸움만 일어나고 얻지 못하는 것이죠.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3)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위해 기꺼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추구하며 살아도 될 텐데, 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기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서 구하는 것을 기도만이라고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의 삶의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뭐하는 거죠? 뭔가를 추구하며 사는 겁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지 않는다.’ 광야 40년 생활처럼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참 가난하고 헐벗었죠.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다 보니까 절실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실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부자가 되어버린 거죠.

성도 여러분, 진짜 복이 어떤 것인줄 아세요?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보다 정말 귀한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16)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시인의 고백이 나와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진짜 복이 있는 상태는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기도 밖에는 할 게 없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죠.

자 다음 구절을 보세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적당히 세상과 발맞추어 짝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은 여자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둔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거죠. 세상을 벗삼아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세상과 벗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을 어떨 때 쓰였을까요?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간음한 상태는 한마디로 설명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양다리 걸친 신앙은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입니다. 99% 하나님을 사랑하고, 1%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보세요. '아니 나같은 죄인을, 정말 너무나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시기하까지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잊지 말라! 무엇을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10)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주님 앞에서 높아진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죄를 씻고,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 자신의 죄의 속성 때문에, 탐욕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일으키심을 얻는 과정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럼 겸손이 뭘까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얌전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이지요. 성경에서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뭐죠? 교만이죠.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자 겸손의 모습을 갖추면 특별한 은혜가 임해요.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높이세요. 자신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앞으로 올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세요.

오늘 주님앞에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밖에는 나에게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주님 밖에는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고백하세요. 그리하면 때가 되면 어떻게 높이시던지 주님이 높이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영어 성경에서 “he will lift you up”. 그가 너를 들어올릴 것이다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신다는 거죠. 이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환경으로부터 구원이요, 문제로부터 구원이요,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 잘했다, 잘 살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O7DEH-rf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지만 우리 삶에도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탐욕을 부리고, 정욕으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서 낮추며,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모습임을 압니다. 주님, 우리를 리프트 업하여 주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시옵소서.



 

 

(484)

 

이런 속담이 있어요.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 큰 둑도 작은 개미 구멍으로 무너진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9)의 마지막 절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작에 여겼던 일이 결국 큰 낭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바로 우매한 사람의 결말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우매자'인데요. 전도자는 우매자가 권력과 힘을 가졌을 때 촉발하는 현상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폐해를 가져다 주는지 설명합니다.
(1~3)의 내용은 죽은 파리가 썩은 냄새를 나게 하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이 지혜와 명예를 망가뜨리며, 지혜자와 반대로 우매자는 잘못된 쪽으로 마음이 쏠리며, 길을 가다가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자는 오른쪽, 즉 좋은 쪽을 주로 살피지만, 우매자는 왼쪽, 즉 잘못된 쪽에 더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모든 것을 볼 때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지만, 우매자는 부정적인 면을 보고 비판하고 낮춘다는 것이죠.

 

이어서 (4~7)에서는 주권자, 즉 권세나 힘이 있는 자가 지혜자의 분을 일으킬 정도로 어리석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혜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손한 자세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자가 떠나면 그곳은 더 큰 재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주권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상식이 무너지는 사태가 나타나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자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명철한 자를 내어 쫓으며, 종들이 말을 타고 다니고, 왕자들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뒤죽박죽한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자를 멀리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여 온 나라를 혼란에 빠트려, 결국 여로보암이 10지파를 싹 데리고 나가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 (5~7)까지는 우매한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무리해서 큰 건축이나 토목공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큰 공사를 하게 하고, 쉼없이 일을 하도록 몰아붙인다는 것이죠. 본문 (11)에서 지혜자를 술객, 마술사에 비유하면서 주문을 걸기도 전에 뱀에게 물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뭐죠? 지혜자가 지혜를 베풀기도 전에 어리석은 주권자에게 미움을 받고 배제를 당하게 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왕이 되고, 어리석은 자가 CEO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신앙공동체의 리더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가장이 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오늘 전도자가 독자인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전도자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아라!’는 것이죠. 설령 우매자의 밑에 있다고 할지라도 떠나거나 도망치는 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곳을 지혜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자의 행동이라는 것이죠.

그럼 어떤 사람이 지혜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모르는 것이 우매함이죠. 학식이 높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우매한 자요, 학식이 낮아도 하나님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우매한 자요, 결국 그 우매함이 자기를 망치고, 자기가 있는 곳을 파괴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하듯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도 최고의 지혜시오, 명철함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함이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기도를 통해 쉼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취나는 인생이 아니라, 향취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상식이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님에게 지혜와 능력과 할 말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좋은 일, 선한 일이 연달아 부흥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우리안에 거주하시는 성령하나님,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사를 볼 때 우매자의 부정적인 안경이 아니라, 지혜자의 긍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악하고 더러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신경이 쓰이며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소속된 가정과 직장과 교회을 영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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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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