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에서 캡쳐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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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걸 보면 달인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면 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이어서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의 몫을, 사람의 분복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누릴 복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땅히 누릴 보상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마땅히 누릴 복이 될까요?

 

먼저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가장 공의와 정의로워야 할 재판장에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는 법망을 피해가고,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피해를 입더라는 거죠. 여기서 인간의 부패한 죄성이 불의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3)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법과 제도가 보안된다고 악이 그칩니까? 기술과 지식과 교육이 발전된다고 세상에 죄가 없어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게 옳은 일일까? 남들은 다 거짓말로 속여 빼앗고,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고, 어떤 짓이라도 해서 재물을 쌓고 떵떵거리는데, 나만 홀로 바보처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전도자는 이것을 기억하라! (17)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 (새번역)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어 바르게 사는 자들이 오히려 조롱을 받고, 불법과 악을 저지른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인 우리는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가 최선을 다해 사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뜁니다. 상대편에서 떠 밀고 태클을 걸어 넘어져도 싸우지 않고 열심히 뜁니다. 왜죠? 심판이 있기 때문이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타락한 세상이지만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며 즐거워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판자가 있으시기 때문이죠.

 

두 번째, 사람이 창조주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이란게 사실 짐승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요.

 

(19)에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겨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짐승과 같다는 것이죠.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측면에는 운명이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1) 둘 다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짐승의 영혼은 아래로 내려가 소멸되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던 사람은, 그가 했던 일도 죽으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창조자의 뜻과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당연히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짐승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그의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헛된 인생 살지 말고,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22)에서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결국 불의한 세상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인데,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어떤 삶이란 뭘까요?

지혜자인 전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기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할 일과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곧 건강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뜻과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 하십시오. 달인처럼 더 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더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해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을 잘하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그러나 나의 일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는 일이 된다면 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잘 한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이 일을 통해 창조주로부터 놀라운 상급을 얻을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축복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가 즐거움의 자리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일과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상급이 될 것입니다. 헛된 인생 헛되게 끝나지 않고, 헛된 인생을 참되고 영원한 인생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고, 이 세상에 파송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일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는 인생이 아니라, 선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일만하다 죽는 허무한 일생이 아니라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을 살리며,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가족들을 일으키고, 신앙의 가문을 세워가는 복된 일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대로 인도하는 별과같이 빛나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xp3xlo2NUwA

 


성능이 좋은 자동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성능이 재앙이 됩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죄에 대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할뿐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박히고 맙니다.

고장난 인간의 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 간데 없이 타락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타락과 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시편 36편은 지독하게 부패한 인간의 죄성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거짓없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높이시고 악인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1-4절)까지 인간의 부끄러운 죄성을 거짓없이 폭로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눈이 어두운 짐승같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뭣하러 두려워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죠.

눈빛은 죄를 짓고도 뻔뻔해져서 ‘불법은 드러나지 않고, 미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악과 속임수 뿐이고, 잠자리를 누울 때마다 흉계를 꾸미며, 길거리에서 제멋대로 설칠 뿐 아니라, 불장난을 하면서도 누가 화상을 입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마음은 더 이상 회개의 자리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굳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심장처럼, 이제 스스로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영적 타락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5-12절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드러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드높고, 그분의 성실하심은 끝이 없다.

그분의 목적대로 원대하고, 그분의 평결 드넓다.

광대하시되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시니

사람도, 생쥐 한 마리도 그분께는 소외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피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4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 무진장의 인자를 지니신 하나님

둘째, 범할 수 없는 진리의 하나님

셋째, 이론의 여지가 없으신 하나님

넷째, 인간이 감히 탐색할 수 없는 지혜와 모략에 뛰어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입에서 찬송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생명의 원천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복락의 강수로 마시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주님을 아는 자들에게서 주의 인자하심을 끊어지지 않고 계속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11-12)은 교만한 자가 맞이할 최후입니다.

교만한 자의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게 하셔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이 시편을 읽다보면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과연 독자인 나는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그늘아래 피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좋아도,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없다면, 아무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이 복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인자, 헤세드 안에 들어오라고,

당신의 보호아래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복락의 생수를 마시고,

주님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인자인 헤세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적) 여러분은 살면서 죽을 뻔한 위기나, 매우 위험한 곳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경험이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씩은 겪는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우도 있고, 한 발자국만 더 나갔더라도 큰일 날 뻔한 자리, 납치당할 뻔한 위기, 체온이 1도만 더 올랐어도 생명이 위독해지고, 조금만 삐끗했더라면 큰 낙사사고를 당할 뻔했던 경험등....

사실 잠깐의 차이 때문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무사히 지나가기도 하며, 살기도 하고, 죽게도 됩니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빼면 해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명이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입고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오늘 시편 36편이 달라 보이고,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한 것이 달라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편 기자의 찬송을 내것으로 만들어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지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너무나 오묘하고 기가막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우리 함께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John Atkinson Grimshaw, 'Thro the Wood '.


 살아남기는 영어로 서바이벌입니다
. 한 때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시리즈’ 책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곧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구도입니다. 특히 세상의 순리대로 살면 트러블이 없지만, 성도가 성경대로 살고자 할 때, 부딪쳐야 하는 역풍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만큼이나 피조물이 창조주를 몰아내는 역사는 뿌리 깊고 오래됐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과학의 급속적인 발전과 지식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는 점점 더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줄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도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가 벼랑 끝에 선 자처럼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지키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고, 이것을 보고 어떤 신학자는 구원받을 사람은 신앙인의 50%도 안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채 10%도 안 될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악인이 점점 더 득세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대라고 해서 만만했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항상 악인들이 있었고, 영적 부랑아들, 파괴자들, 원수들이 득세하고 있었고, 그들은 어서 빨리 다윗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윗뿐 아니라, 다윗이 믿는 신앙을 포함한 영적인 파괴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그 악인들을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사람의 일을 넘어 배후에 있는 사탄을 겨냥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최전방의 격전지에서 포격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신호처럼 보입니다. 어느 지역, 어느 좌표를 찍어주며 집중포화를 날려달라는 식으로 구원요청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눈에 띄는 기도는 반복되는 말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소원성취하지 못하게 하시며, 나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낭패당하게 하시며,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자신이 어떻게 다 방어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입까지 다스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구원요청기도가 더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탄은 잠도 안자고 부지런하게 일하고, 끈질기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을 파괴하려 모략(謀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영적 싸움이 있고, 직장에 나가도 시험거리가 늘 발에 걸리적 거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진리를 물타기해서, 교묘하게 불신자로 만드는 문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신앙을 지키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험난하게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인 우리들은 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성경적으로 볼 때 종말의 때요, 영적 전쟁이 치열한 때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득세를 하고, 사람들의 타락이 점점 일반화되어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직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큐티생활도 꼼꼼히 지도해야 합니다.

다른 것 보다 신앙생활이 무너지면, 우리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을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도, 결국 가치관이 다르면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천국에서도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세상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항상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불신앙이 문화가 되어 번지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으려면 다윗의 구원요청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내면에서부터 역사하는 수많은 죄악된 생각들과 싸워 이기고,

밖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요소들을 이겨내려면

먼저 주님으로 채워지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성령님으로 승전하십시오! 


https://studio.youtube.com/video/xgdwBe5tCxQ/edit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찬 373장) 고요한 바다로

 

여러분은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배신당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을 험담하면서 비웃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 시편 35편은 다윗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대적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식의 시입니다. 시인 다윗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배신하고 악한 행위를 벌였는지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보시고 선악간에 판단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방패, 손 방패, 창과 같은 전쟁 무기를 나열하고 있는데요, 그 만큼 자신의 싸움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 전쟁상황은 아니지만 지금 대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상해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5~6절)에 보면 지금 상황은 대적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그물을 친 것과 같은 상황이고, 들짐승을 잡을 때처럼 함정을 팠다고 고발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 주셔서 그들의 계획을 바람 앞에 겨 같게 날려버리시고, 어둡고 미끄러운 길에 넘어지며, 자기 꾀에 넘어가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까닭 없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은 까닭 없이 공격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맞상대할 정도가 안되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 억울한 상황에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이 되어 주실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무고한 자의 편이며, 부자와 힘있는 자들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편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이어서 시인 다윗은 두 번째 단락(11~18절)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대적들과 얼마나 다르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정확히 판단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죠.

대적들의 행위를 보면, 그들은 죄를 덮어 씌우고,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병들었을 때 시인은 금식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언제나 친구와 형제들을 대하듯이 따뜻하게 대했고, 그들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마치 자신이 모친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인에게 어려움이 찾아오니까 그들의 태도가 돌변하더라는 것이죠. 이제 자신들에게 별 이득이 없겠다 싶으니까, 그들은 시인의 고통을 보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을 당한 것처럼 고소해하며,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며 시인의 마음을 그렇게 찢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시인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주께서 관망하지 마시고, 속히 심판해 주시며, 그들을 벌하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악간에 분별하시고,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믿고 큰 회중 가운데서 감사하며, 많은 백성들 가운데 주를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서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호소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신이 힘이 없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망자 신분이었을 때 그에게는 겨우 400여명의 무리뿐이었고, 그들도 대부분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에게도 뛰어난 장수들이 있긴 해지만 사울 왕의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 주시길 호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울 때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을 아십니까? 미련한 사람은 능력이 안 되어도 객기를 부리며 덤비지만, 지혜로운 자는 누구보다 강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도우십니까? 당신을 의뢰하는 자와 언약을 맺고 계시며, 군사적 동맹을 맺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118)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6~9)

결국 보세요. 누가 승리합니까? 왕인 사울의 군대가 아니라 목동인 다윗 편이 승리합니다.

이런 승리의 결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다윗은 믿고 있습니다. 보세요. 사울왕과 추종자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추격했지만, 다윗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잖아요?

도리어 사울왕이 하나님의 계략에 넘어져 창에 엎어져 죽으면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가장 미워하는 대적자요,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로 악한 마귀와 그 세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실력과 능력으로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고, 대적하여 싸우려 하면 할수록 더 죄를 지을 뿐이고, 우리 손에 피를 묻히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대적하고 미워하더라도 혈과 육으로 대적하며 싸우려 하지 마세요.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록된 말씀이라는 무기로 싸워야 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써 악한 영을 물리쳐야 합니다.

(삼상 17)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성이 나서 달려나오니까, 그걸 보고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도 칼과 실력과 힘의 겨룸이 아니라, 영적 전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를 내게 한다고 혈기로 대적하면 항상 뒤끝이 안 좋습니다. 또한 신앙인으로 덕이 안 됩니다. 혈기와 분노로 싸우면 마귀가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오늘도 사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 위해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벧전 5장 8절) 말씀처럼,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들을 대적하라!“
근신하고 깨어라는 말씀은요? 24시간동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늘 마음을 강하게 하고 사려 깊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쉬운성경 5:8 참고)

 여러분을 함정에 빠트리고, 분노하게 하고, 쑥덕거리며 비난하는 자들을 혈과 육으로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대적하여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게 진짜 싸움이고, 진짜 이기는 싸움입니다. 오늘도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근신하고 깨어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성령 하나님, 참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오늘도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스려 주옵소서. 혈기와 분노로 상대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 편에 서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님께서 하나님 편에 서게 하시고, 근신하고 깨어 말씀의 편에 서게 하소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내가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18t-Cg1u3oM

 
 

 

(501~14) 우리가 남겨야 할 신앙의 유산


(543)

 

어제 농장에 갔다가 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는데요, 자주 오시는 목사님 사모님이 계신데, 그분이 지난 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이는 칠십대 초반이지만 건강해 보이셨고, 항상 밝으셨는데, 불과 몇 주 전에 건강하게 뵈었는데,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기신 유언을 봤는데요. 세 가지였습니다. “장례식을 치루지 말라, 누군가 소식을 알고 조의금을 보내오면 모두 선교지로 보내라, 시신은 대학병원에 기증해라.”였습니다.

참 멋진 유언을 남기고 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남긴 유언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유산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147년의 긴 여정을 애굽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신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요셉은 애도하는 기간을 거친 후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가나안 땅에 다녀오겠다고 바로왕에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당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굴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레아가 매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에브랏에서 베냐민을 출산하다 죽어서 그곳에 묻혔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막벨라 굴에 묻히게 해 달라고 유언한 것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은 가나안 땅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야곱은 언제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요셉도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해골이라도 메고 올라가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면서 창세가 끝납니다.

야곱과 요셉은 좋은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왕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메고 가나안의 땅 막벨라 굴에 갑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동행했는데요, 장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왜 아버지 야곱이 그곳에 묻히길 원했는지 살펴보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듯이 야곱의 장례식에 참여한 후손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시작이 누구이며, 현재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어느곳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생생한 현장교육이었던 것이죠. 비록 애굽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해야 할 언약의 후손임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기록되었을까요? 야곱의 유언과 성취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첫째, 우리도 야곱처럼 이 땅을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왕에게 자신의 나그네길 인생이 일백삼십년이라고 대답한 것처럼, 야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그네 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문명과 번영의 땅 애굽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살았던 야곱처럼, 우리도 결국 들어가야 할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요, 세상 사람처럼 이 땅에 코 박고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을 헛되고 헛되게 보내지 않고, 의미있고 가치있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야곱의 유언은 우리가 남겨야 할 유산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 안치시켜 달라고 함으로서, 자녀들과 손주들까지 현장감 있는 실물교육을 시켰습니다. 자신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들어 수종들어야 할 언약의 백성인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유언으로 남긴 것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 147년을 살아보니, 모든 것은 헛되더라.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더라.” 이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남길 것은 결국 뭐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모든 것만 남기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남아 자녀들과 후손들의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 가르쳐 줄 이정표가 될 테니까요.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지만 이정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면서 자신은 그저 저 분을 가리키는 이정표에 불과함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이정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한 푼이라도 더 악착같이 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그들의 분복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실 것이요, 그들은 그만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부모로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실생활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즐겁게 살며, 항상 천국을 대망하며 살았던 삶이야 말로, 우리의 가족과 가문을 이끌어갈 진정한 가훈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하루가 유언처럼 살게 되겠지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며, 그분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도 말씀에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나그네처럼 살게 해 주소서.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대망하며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가족과 자녀들에게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물려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수하는 복된 조상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3kXdsvoRz8M 

 


(
549)

오늘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마지막에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NT5cnQqRw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가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고, 세겜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벧엘로 떠나야 했고, 요셉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줌으써,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게 됩니다.

 

(12~16)에는 야곱이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언약의 축복을 전수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 머리에 올리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팔을 교차하면서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위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얹고 축복했습니다.

지금 야곱의 두 손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 축복은 요셉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세상에서 번성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번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변함없이 주셨던 축복이며, 또한 자기가 집을 떠나야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빌어준 복이기도 했습니다.

(17~22)의 내용은 야곱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잘못 알고 손을 올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른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에브라임을, 왼손에 므낫세를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만한데도 그의 지혜는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장자로 선택하셨고, 라반보다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먼저 선택하여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므낫세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인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같고 므낫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했으며, 두 손자의 후손 역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떠나지 않으셔서, 때가 차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세겜 땅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야곱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나, 실현되었고요, 이후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을 좀 보세요. 어릴적이나 청년 시절에 지혜가 없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기회를 낭비했던 모습은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을 통해 징계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성장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영적 혜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과 영적 혜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께 지혜를 얻고, 영적 혜안이 열려서,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복된 어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온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와 보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성장해서 마침내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도 반복되는 일상이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에,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도 점점 성장하여 말년에는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어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생명의삶 / 성장큐티] 2022년 11월 16일 수요일 QT 

 

본문 : 창세기 47장 23~31절 

제목 : 성공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

설교 :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찬 327장)

 지금까지 살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고, 듣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며 목표에 도달하지만, 정작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원래의 처음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실적 상황이라는 미명아래 타협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어쩌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맡을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성실함이죠. 오늘 요셉은 우리에게 성공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17세 청소년이었을 때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 드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요셉은 세상의 정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했습니다.

 

  요셉은 과거에 팔렸던 사람인데, 오늘에서 요셉은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렸는데, 이제는 애굽 백성의 몸과 토지를 산 사람이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요셉은 백성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을 보장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요셉은 비록 양식을 주고 그들의 땅을 샀지만,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소출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기만 하면 그 땅에서 그대로 살 수 있는 정책을 폈습니다.

 

  BC 18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농부들이 정부에 3분의 1이나, 심하면 2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요셉이 백성에게 부과한 세율은 무리가 없는 수준입니다. 백성들은 7년 동안 이어진 흉년으로 인해 요셉에게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의 세금만 부담하면 원래 자신의 소유하던 땅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감사를 표하며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까지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요셉의 공정한 리더십으로 인해 당시 애굽을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갖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한 사람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야곱의 70명의 가족뿐 아니라, 애굽에 몰려든 백성들까지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 현대문명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요셉은 우리에게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속에서도 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엇일까요? 바로 욕망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잠 28장 25절)에서는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씀합니다. (민 11장)에서 ’기브롯 핫다아와는 욕심을 낸 백성이 죽은 장소‘를 가르키고요,

 (시 10편 3절)에서는 “악인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약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세상의 모든 죄의 시작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개인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부딪치면 경쟁도 하지만, 하나로 뭉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핵폭탄처럼 번져 나가는 특성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이나 욕심이 적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환경적으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도는 그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의 비밀스러운 사역, 즉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갈 5장)에 보면 거룩하신 성령님의 사역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은 요셉를 도왔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런 삶을 살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령님은 직접 영접한 자의 몸에 들어오셔서 심령에 따뜻한 변화를 일으키게 하십니다. 또한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바라보는 삶도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엡 4장 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여러분과 저를 썩어져 가는 구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성공시킬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안에 들어오시면 육체적이고, 환경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요셉과 함께 하셨던 성령님의 역사가 함께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안에 욕망과 욕심이 있는데, 당신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요셉의 명철과 충성스러움은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였을 줄 압니다. 오늘도 우리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진정한 성공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영적으로 부유한 자 되게 하시고, 우리가 받은 작고 큰 성공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CjS9fcfkHlU 

(찬 330)

 

사람이 한두 번은 성실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실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뛰어난 재능보다 성실함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보면 토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이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요셉에게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기근은 더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생명을 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요셉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요셉은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기근은 고대근동 지역에 임했고,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 곡식 창고의 출입(出入)을 관장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팔았고,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대 왕국 체계에서 토지 국유화를 의미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성읍 여러 곳에 분산시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이 애굽 왕실의 소작농처럼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왕이 모든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우리가 요셉의 일 처리와 그의 태도를 보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은 이 모든 거대한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돌려 자기 배만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 일관적으로 성실했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큰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려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3)”고 하였고,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고(286),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2810).”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6)에서 종들아, 성실하게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고, (3)에서는 윗 사람들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에서 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자기 일에 성실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셉의 성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셉의 성실함을 우리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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