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212- 35)

자아정체감 (égo idèntity)’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제적인 느낌을 말합니다. 즉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전체 느낌이죠.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나요? 그 느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1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두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각처에 퍼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14)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하고, 항상 이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때, 즉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의 승리의 행진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향기를 자신이 있는 곳에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에나나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16,17)은 누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으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안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실제로 복음을 믿고 순전하게 전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면 우리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로 각국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 꼭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시작합시다!

기회를 잡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저들에게 있는 죽음의 독가스를 몰아내고,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시다.

착한 일과 섬김을 통해 참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퍼트리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www.youtube.com/watch?v=T1Hmjiv6z68

 

www.youtube.com/watch?v=Gx78Fe2Rfe0

 

(고후 123-211)

사랑이란 적절한 행동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랑은 끝없는 신비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안에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123,24)인데, 바울은 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은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찾아갔다면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문하는 것을 참고, 잘못 가르쳤거나 동조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더 크게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지만, 성도들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안에서 자랄 단계라고 보았고, 그래서 억지로 성장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분은 (1-4)인데, 과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재차 고린도교회를 방문한다면 서로 상처를 더 받고 신앙적으로도 도움이 될 게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방문대신 눈물의 편지를 쓰는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5-11)인데, 바울은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교회는 징계를 했고, 그들에게 벌 받는 기간을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피해를 입힌 그들은 그 징계를 수용했고, 일정기간동안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간을 갖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충분히 깨달았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조심스럽게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사랑일까요?

무조건 다가가고,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성급히 찾아가서 권면하거나, 무조건 용서한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찾아갈 때가 아니라 기다려 줄 때이고, 스스로 교인들이 성장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또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더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라 생각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주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회를 주는 것에 동의했고, 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해 주자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적용)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신중한 행동과 절제, 용서를 위한 단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양육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지만, 장성할수록 점차 스스로 하도록 가르쳐 주고,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거죠.

 신앙생활이 얼마 안 된 초신자는 성도들이 더 세심하게 돌보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스스로 성장할 단계에 있는 신자에게는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몸과 키가 자라면 그것에 맞는 훈련을 하여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죠. 무조건 돌봐주는 것은 의지 장애자를 만드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세심하게 돌 볼 사람은 누구이고,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또 나의 신앙단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돌봄이 많이 필요한 단계인지, 스스로 일어나야 할 단계인지, 이제 어린 성도를 돌보고 케어해야 할 단계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은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모두 겨자씨가 자라 새들을 깃들이게 하는 큰 나무처럼 성장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 여러 영혼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선생이 됩시다. 그래서 바울이 멋지게 살다 간 거처럼, 우리도 그 위대한 인생의 뒷걸음을 따라봅시다.

 

 매우 작은 자 하나와 같은 우리도, 힘을 합쳐 연합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에 함께 손잡는 영적 군사들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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