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425장)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성공은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 하는 속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가느냐 하는 방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조금은 더디 가더라도 그 인생길에서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으며 성공적인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도자는 우매한 자로 인해서 폐해와 그 결과의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우매와 지혜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이 은혜로운 반면에 우매자의 말은 자신을 삼키는데 시작은 우매이고 결말들은 미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자의 말은 타인에게 유익한 좋은 열매를 맺지만 우매자의 말은 스스로 망치며 해치고 타인에게도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매자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인데 남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은 결국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자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주심으로 미래를 대비해 유익을 얻게 하시지만 우매자에게는 아무도 미래의 일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자는 구매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다고 진술합니다.

그들이 성읍에 들어갈 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요 상식적인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는 우매자들이 끼치는 해악을 잘 기억해 그 해악을 피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게으르고 우매한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전도자는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에 화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어리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를 뜻하는데요.

그리고 아침부터 잔치하는 대신들은 어리석은 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쾌락과 욕심을 추구하는 간신들을 가리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왕과 대신들이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좋아한다면 나랏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일이 없겠지요.

전도자는 게으른즉 석가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 즉 집이 샌다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나라와 공동체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으르고 무능하고 부패한 왕과 대신들의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성도는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가정과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마음속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라도 부자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저주하는 소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질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죠.

왕과 권세자들이 자신을 향한 저주의 소리를 들었을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저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과 권세자뿐 아니라 타인을 저주하는 것은 여러 모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특히 성도는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에 권세자들을 저주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개인의 입장을 떠나서 공동체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이 지혜롭게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력을 바르게 사용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할 때 자신도 평안한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오늘 말씀의 결론인데요. 어리석고 우매한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스스로 망하는 길로 치달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깨뜨리고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 언제나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요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 있고 유익하며 하나님이 쓰시는 멋진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서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 나와 가족과 직장과 교회를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오늘 우리는 전도자의 말을 잘 기억하고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우매자의 말과 행동이 없게 하시고 바른 말 복된 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줄 아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모든 자리를 털고 비우고 떠나갈지어다! 성령 하나님 우리 입술에서 복된 말 지혜로운 말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혜자로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고 지존한 주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484)

 

이런 속담이 있어요.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 큰 둑도 작은 개미 구멍으로 무너진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9)의 마지막 절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작에 여겼던 일이 결국 큰 낭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바로 우매한 사람의 결말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우매자'인데요. 전도자는 우매자가 권력과 힘을 가졌을 때 촉발하는 현상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폐해를 가져다 주는지 설명합니다.
(1~3)의 내용은 죽은 파리가 썩은 냄새를 나게 하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이 지혜와 명예를 망가뜨리며, 지혜자와 반대로 우매자는 잘못된 쪽으로 마음이 쏠리며, 길을 가다가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자는 오른쪽, 즉 좋은 쪽을 주로 살피지만, 우매자는 왼쪽, 즉 잘못된 쪽에 더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모든 것을 볼 때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지만, 우매자는 부정적인 면을 보고 비판하고 낮춘다는 것이죠.

 

이어서 (4~7)에서는 주권자, 즉 권세나 힘이 있는 자가 지혜자의 분을 일으킬 정도로 어리석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혜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손한 자세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자가 떠나면 그곳은 더 큰 재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주권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상식이 무너지는 사태가 나타나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자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명철한 자를 내어 쫓으며, 종들이 말을 타고 다니고, 왕자들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뒤죽박죽한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자를 멀리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여 온 나라를 혼란에 빠트려, 결국 여로보암이 10지파를 싹 데리고 나가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 (5~7)까지는 우매한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무리해서 큰 건축이나 토목공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큰 공사를 하게 하고, 쉼없이 일을 하도록 몰아붙인다는 것이죠. 본문 (11)에서 지혜자를 술객, 마술사에 비유하면서 주문을 걸기도 전에 뱀에게 물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뭐죠? 지혜자가 지혜를 베풀기도 전에 어리석은 주권자에게 미움을 받고 배제를 당하게 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왕이 되고, 어리석은 자가 CEO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신앙공동체의 리더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가장이 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오늘 전도자가 독자인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전도자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아라!’는 것이죠. 설령 우매자의 밑에 있다고 할지라도 떠나거나 도망치는 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곳을 지혜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자의 행동이라는 것이죠.

그럼 어떤 사람이 지혜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모르는 것이 우매함이죠. 학식이 높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우매한 자요, 학식이 낮아도 하나님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우매한 자요, 결국 그 우매함이 자기를 망치고, 자기가 있는 곳을 파괴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하듯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도 최고의 지혜시오, 명철함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함이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기도를 통해 쉼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취나는 인생이 아니라, 향취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상식이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님에게 지혜와 능력과 할 말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좋은 일, 선한 일이 연달아 부흥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우리안에 거주하시는 성령하나님, 우리를 지혜자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사를 볼 때 우매자의 부정적인 안경이 아니라, 지혜자의 긍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악하고 더러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신경이 쓰이며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소속된 가정과 직장과 교회을 영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9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윗사람이나 권세자들을 따라야 할까요? 그들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항거해야 할까요? 오늘은 전도서 8장 말씀을 통해 권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침 받겠습니다.

1절은 8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인데요.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기를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라고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알기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이치에 맞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스테반 집사가 하늘을 우러러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하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마음에 샬롬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얼굴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미소가 있고,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79)의 말씀대로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합니다.”
지금 일어난 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노를 발한다고 말씀합니다.

 

(2)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왕이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29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백성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말하는데요,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질서요,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으면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질서요,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에 보세요. 새번역 왕이 싫어하는 일은 고집하지 말고, 왕 앞에서는 물러나거라
자기 상식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해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급히 물러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요?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당시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여탈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복형이었던 아도니아가 제단 뿔을 잡고 살려 달라고 해서 살렸는데, 아버지 다윗왕을 모셨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하죠. 이것은 반역의 있는 행동이었죠. 그래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처단합니다.

이처럼 당시 왕의 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알지요.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잘 지킵니다. 지혜로운 자는 왕의 명령이 거북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요, 왕을 배반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안전하고, 화를 당하지 않으며,
(5) 보세요.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신하가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 바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5절 하반부)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잘 분별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이죠.
지혜롭게 왕의 명령을 분별했던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는데,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의 제사에서 온 것을 알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부하죠? 열흘동안 채식과 물을 먹으며 시험을 해보라 합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윤택한 것을 보고 넘어가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대처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6)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7)을 봅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하죠.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 시므이가 온갖 악독한 말로 다윗의 심장을 찢어놓습니다. 시므이를 다윗은 용서해주었지만, 솔로몬 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 죽임을 당합니다. 시므이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입니다.
시므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할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사람을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까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대처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소결론은 (9)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무시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때는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권세를 인정하고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권세자의 권위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 시대에는 왕이 없는데 말이죠.

보세요. 하나님은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를 세우셨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권위를 주셨며, 직장에 가면 사장에게 권위가 주셨으며, 교회에 가면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자녀가 보기에 부모가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사장님, 심지어 목회자도 부족한 점을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전도자는 부모를 거역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머리위에 기름을 바르셔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십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자를 따르십시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주안에서 따르십시오.

 

 나라의 지도자든지, 교회의 지도자든지, 가족의 어른이든지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이며,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도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모요, 윗 사람이 되었다면, 그 권위를 가지고 함부러 남용하거나, 기만을 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직위를 주셨을 때, 선한 기회인 줄 알고 잘 사용해서, 옳은대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에 광채가 빛나게 하시고, 만사에 시기와 때가 있음을 알고 잘 분변하게 하시며, 권위아래 있으면 순응하고 잘 따르는 자 되게 하시고, 권위를 가진 자가 되었으면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어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6iSM1X9dKZk

 

 

 

(찬 407)

 

살아볼수록 인생은 허무하죠. 과연 인생의 허무는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의미있는 인생이 살아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을 경외를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내용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물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찾으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3)을 해석하며,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뜻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중히 살피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자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에 극에 달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고 말씀하셨고,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16,1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 시대나, 이사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더 둔감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못하면 즉시 치셨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기에 더 죄를 가벼히 여기고, 더 만홀히 여깁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참된 경외와 경건의 자세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본문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여기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앞에두고 하는 말도 천박하거나 경박하면 모독이 되는데,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죄요, 입술로 범죄하는 악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허물은 점점 늘어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랍시고 아무 말이나 막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하며, 인도하심을 구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하는 것보다, 자주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는 보배로운 향기와 같습니다.

(58)에 보세요.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8)에 보면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들과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외형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러 말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뱉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실수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말을 되도록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향연을 더 많이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얼마나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실수가 많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외적 경건을 기본으로 두고, 내적 경건함이 더해지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따라서 감정이나 기분으로 말하기 보다 믿음으로 말하고, 또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향기로운 향기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성령님, 할 말을 우리 생각과 입에 담아주시옵소서.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생활의 달인'에서 캡쳐한 사진



(
496)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걸 보면 달인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면 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이어서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의 몫을, 사람의 분복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누릴 복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땅히 누릴 보상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마땅히 누릴 복이 될까요?

 

먼저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가장 공의와 정의로워야 할 재판장에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는 법망을 피해가고,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피해를 입더라는 거죠. 여기서 인간의 부패한 죄성이 불의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3)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법과 제도가 보안된다고 악이 그칩니까? 기술과 지식과 교육이 발전된다고 세상에 죄가 없어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게 옳은 일일까? 남들은 다 거짓말로 속여 빼앗고,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고, 어떤 짓이라도 해서 재물을 쌓고 떵떵거리는데, 나만 홀로 바보처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전도자는 이것을 기억하라! (17)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 (새번역)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어 바르게 사는 자들이 오히려 조롱을 받고, 불법과 악을 저지른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인 우리는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가 최선을 다해 사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뜁니다. 상대편에서 떠 밀고 태클을 걸어 넘어져도 싸우지 않고 열심히 뜁니다. 왜죠? 심판이 있기 때문이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타락한 세상이지만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며 즐거워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판자가 있으시기 때문이죠.

 

두 번째, 사람이 창조주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이란게 사실 짐승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요.

 

(19)에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겨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짐승과 같다는 것이죠.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측면에는 운명이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1) 둘 다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짐승의 영혼은 아래로 내려가 소멸되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던 사람은, 그가 했던 일도 죽으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창조자의 뜻과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당연히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짐승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그의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헛된 인생 살지 말고,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22)에서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결국 불의한 세상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인데,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어떤 삶이란 뭘까요?

지혜자인 전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기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할 일과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곧 건강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뜻과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 하십시오. 달인처럼 더 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더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해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을 잘하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그러나 나의 일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는 일이 된다면 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잘 한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이 일을 통해 창조주로부터 놀라운 상급을 얻을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축복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가 즐거움의 자리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일과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상급이 될 것입니다. 헛된 인생 헛되게 끝나지 않고, 헛된 인생을 참되고 영원한 인생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고, 이 세상에 파송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일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는 인생이 아니라, 선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일만하다 죽는 허무한 일생이 아니라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을 살리며,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가족들을 일으키고, 신앙의 가문을 세워가는 복된 일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대로 인도하는 별과같이 빛나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xp3xlo2NUwA

 


(찬
435)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이 오늘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까?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면 행복할까?’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런 것에 행복이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현대시대에서 사람들은 에고이즘(egoism),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꾀하며 살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것도 역시, 인생을 헛사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한번 뿐인 인생을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얻고, 더 즐거운 쾌락을 갈망합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지혜와 수고를 아끼지 않지요. 직장생활하는 사람의 목표는 뭡니까? 승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심을 내어 성과를 내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면서 승진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전도자는 권고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결국 죽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걸 놓고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여 기존의 창고가 모자랄 정도의 부를 쌓고는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자며 즐기자라고 기분 좋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 너의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너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거야 말로 허무 아닌가요?

 

전도자는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지나치게 수고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전도자는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허무한 일이라고 조언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후대에 물려줄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한탄합니다. 자신의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이 쌓은 재물을 물려받는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들이 많습니다. 부보가 쌓은 업적과 재산을 조건없이 물려받았는데, 그것이 결코 복이 되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역시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는 아버지 솔로몬에게 강력한 이스라엘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라를 제대로 경영할 능력이나 지혜가 없었는데다, 연륜이 많은 원로들의 조언보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말만 듣고 행동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게 되었고, 백성의 뜻을 외면함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경고한 것은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 2030 세대에서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흙수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라고 표현하죠. 2030 청춘들이 부모님의 연소득과 가정환경 등 출신 배경을 수저로 빗대 표현하는 방식이죠. 수저론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라는 영어 표현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안락한 금수저의 삶을 주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때로는 자녀의 학업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을 자청하고, 오직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자녀들에게 어떤 집안일도 시키지 않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게 과연 복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녀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로다” (21)

전도자는 자녀들에게 고생없는 편안한 삶을 위해, 가족이 누려야 할 현재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권고합니다.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3)

그럼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만들까요?
(24)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도다.”

 

마지막으로 (26)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는데요, 우리말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지식과 복을 주시지만 죄인에게는 온갖 노력으로 모으고 쌓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넘겨주게 하신다. 이것 또한 허무하고 뜬 구름 잡는 일이다.”

의인은 하나님께 지헤와 지식과 기쁨을 받고, 악인이 수고로 쌓은 재산은 하나님이 의인에게 넘겨주신다면서, 악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마치 바람을 손에 잡으려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의 앞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물려주려 애쓰십시오. 지혜롭지 못하면 어떤 재물도 그에게 복이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과도하게 일에 메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행복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흘러 넘치는 삶을 위해서인지 말입니다. 흘러넘치는 삶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때 나를 통해 흘러 넘치게 하는 삶입니다. 축복의 금고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지금 누리세요. 감사하세요. 또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흘러 넘치게 보낼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보십시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그 열심히 사는 이유가 불안 때문이라면 얼마나 불안정한 삶이겠습니까? 또 열심히 사는 이유가 나 잘 먹고 잘 사는 이유 때문이라면 역시 얼마나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부자 같겠습니까?
같은 인생을 살아도 헛된 삶이 있고, 가치있는 삶이 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아야 진짜 행복한 결말이 주어집니다. ’내 인생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봅시다. 특히 자녀들에게 하나님 없는 편안한 삶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살도록 신앙전수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에 지혜와 현명한 선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를 통해 주신 지혜로운 삶을 깨달았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누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신앙을 물려주는 깨어있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열심히 살되 행복을 포기할 만큼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주께서 주신 건강도 지키게 하옵소서.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OAtdzlUxNCU

 

 

(찬송가 446)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거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지 이런 허무감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커(Michael Steger)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 질병, 예술 작품, 결혼 등에서 의미를 찾듯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부터 전도서 말씀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전도자는 인생이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처럼 허무함을 부르짖는 전도자의 모습은 마치 세상을 비관하는 회의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의주의에 빠진 불신자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애하는 전도자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평가한 이유가 뭘까요.

 

오늘 말씀은 전도서 11절부터 11절입니다.
우리나라 민속 신앙에는 십장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물상은 해, , , ,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 사슴, 또는 대나무입니다. 이 모두가 장수물이므로 자연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시문이나 그림, 조각 등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요.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장생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장수를 간절히 꿈꿀 만큼 철저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오히려 방증합니다.

전도자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땅은 지속되지만 우리 인간은 계속 죽고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은 머무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월도 화살같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한껏 자신의 젊음을 자랑하던 사람도 돌아서면 어느새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게 되지요.
그리고 한 번 지나가 버린 세대를 그다음 세대가 제대로 기억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왜 이토록 유한한 인간의 허무함을 강조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함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답을 발견하라고 도전하는 메시지인 것이죠.

 

많은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른 채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영생의 진리와 복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자는 묻습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가 도대체 무슨 보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강물이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결코 바다를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죠.
그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로 원하는 사업도 해보았습니다. 궁전도 지어 보고, 포도원도 마련하고, 동산과 정원도 가꿔 보았습니다. 그 수고를 통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고 사람들의 칭송도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그 칭송도 그의 귀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의 수고와 업적 중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하지만 사람들의 엄청난 업적 역시 과거에 누군가가 발견하거나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방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가르쳐 줍니다.
만족 없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삶을 힘있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덧없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와 소망을 일깨워주신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인생이 참 허무하고 너무 빨리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의미를 쫓아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여건과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주신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시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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