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



(
214)

 

 우리 말 속담에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죠. 나 살기도 벅찬데 남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지금 코가 석 자 정도가 아니라 열 자도 더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 (1~5) 말씀까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나를 구원한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블레셋의 접경 지역에 그일라라는 마을의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그일라 사람들이 일년 내내 수고에 추수하여 타장 마당에 쌓아 놓은 곡식을 블레셋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탈취해 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블레셋을 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을 이길 만큼 수가 많거나 잘 훈련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윗을 말렸어요.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데 블레셋을 치라뇨?”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다시 구하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릴라로 가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전리품까지 챙겨서 오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형편이 좀 나아지면 좀 여유가 생기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면 순종하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지금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그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바로 그것 지금 해야 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도피행로


 이어서 (6~14) 말씀까지는 돌아오는 것은 배신의 쓰라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릴라에 온 사실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좋아했어요.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예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사울은 자기 욕망에 따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드디어 다윗이 성 안에 갇혔다라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성이 지금 블레셋에게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뻐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욕망에 사로잡히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게 됩니다. 자신의 안전 때문만이 아니라 그일라가 사울에 의해서 파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 것이고 그 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일라 주민에게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해코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묵묵히 그 일라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사울도 그 일라를 향한 행진을 멈추고 돌아갔고, 다윗의 선택으로 그일라에도 평안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늘 그를 보호하셔서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을 오늘 (14)에서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https://www.youtube.com/watch?v=WjVqmcl52p0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유익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눈앞에 유익이나 욕심을 쫓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안에 고하십시오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우리 안전을 책임져 주시고 다윗처럼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귀한 시간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기도를 드립니다. 다윗이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저희도 다윗처럼 행동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지금 순종의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여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행할 때 우리 갈 길이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복된 삶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권과 인권과 물권을 허락하여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는 복된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268장)

 세상에는 무모한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모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도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데요.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 가족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도발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도엑과 아비아달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선택했고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 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 봅니다.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도엑

 오늘 우리는 먼저 사울을 택한 도엑을 보겠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작은 호의까지도 자신에 대한 배신 행위로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의중을 알았던 도엑은 사울이 원하는 대로 아이멜렉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도엑게 보고를 듣고 분노가 끌어오른 사울은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해 다윗과 공모한 사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무리 중 누구도 사후를 대적하려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모든 제사장 무리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도엑이 그 명령을 따라 제사장 무리를 학살했습니다.
도엑은 철저히 악한 권력자의 입맛에 자기를 맞춤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편에 섬으로써 앞날의 부귀 영화가 보장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득에만 몰두해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뿐입니다.

 잠언은 ‘악인이 서로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고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을 자랑하는 악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선한 행위로 맞서야 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에게로 도망친 아비아달

 이어서 다윗을 택한 아비아달의 모습을 살펴보겠는데요.
제사장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단 한 사람 아비아달만이 도망쳐 나와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다윗을 찾아갔는데요. 다윗은 사울이 저지른 악행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을 안심시키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겸손함과 배려를 보면서 그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정당성을 갖도록 끝까지 협력했습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왔을 당시 다윗은 큰 세력을 갖춘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라한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다윗을 선택했고 그 결과 진리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참된 성공과 승리하는 삶에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따르라고 교훈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홀로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섬기는 지체와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 서로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받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잠 2장 20~22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아기는 땅에서 끊어지게 했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더 복된 선택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며 함께하고자 합니다. 악한 권력자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도 그를 가까이 하면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은 곧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체들과 함께 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군중의 길이 아니라 바로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믿음의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기도드립니다.
 성령님, 저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령님, 저희를 이끄셔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그들을 잘 따라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땅의 약속과 진정한 성공과 승리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모두 주님의 진정한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오늘 삶에도 어떠한 상황에 서든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시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거룩한 길 끝까지 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보존시켜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50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한은 헛되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세워져 갔습니다. 그는 또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무리가 춤추며 다윗에 대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그들 앞에서 미친 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의 침을 흘렸습니다. 아기스는 자기에게 미치광이를 데려왔다 하며 신하들을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집안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는데 그 외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어느새 그들의 수장이 되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위로와 회복이 넘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모압 출신 증조모 룻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새에 있을 때 부모는 모압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최선을 다해 부모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요새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 수풀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다윗에게 도피 생활은 연단의 과정이었고 목적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과감하게 유다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도는 방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단의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Saul angry with David,Antoni Brodowski,1815

 반면에 사울의 모습을 보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셀나무 아래에서 손에 꼭 쥐고 있는 단창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울은 다윗이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며 신하들을 질책하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요.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눈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악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도액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견고한 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힘을 키워야 합니다.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악한 세력을 공동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뿌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서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메어 달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극심한 기근에 처하게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서 갔잖아요? 즉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와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오직 그의 아내인 나오미만이 겨우 살아서 모압에서 얻은 자부 룻만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돌아와서도 나오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궁극적인 기쁨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우리를 품으심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39, 40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란 때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데살로니가전서 33)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모든 일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선지자의 제안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반면에 사울은 불안함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도엑 같은 악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과 그렇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유연했지만 사울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담대한 성도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오늘 하루도 잘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오늘 이 하루도 넉넉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91)

 

 인간관계에서는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도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견고한 우정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깊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가진 조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학식이나 재력 때로는 외모나 성격을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을 보고 맺은 관계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소원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다윗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요나단의 신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위용에 매력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우정은 다윗이 형통할 때나 힘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나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진 지위를 사용해 도왔습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 견고한 이유는 조건과 형편을 초월한 순수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이 가진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천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우리 지체와 이웃들을 또한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 안에서 맺어진 우정관계야말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결코 인간적인 호감으로만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가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요나단은 다윗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울의 가문이 아니라 다윗과 그 가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인자를 자신의 집 안에 베풀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견고한 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한 집안 주인과 머슴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되자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장로 후보가 되었고 머슴 이자익에게 먼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 조덕삼은 자기의 이자익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머슴이 자신보다 먼저 장로로 선출된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자익을 교회 지도자로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덕삼은 이후에 이자익을 신학교에 유학 보냈으며 목회자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의 섬김으로 이자익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처럼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존 오토버그>, ‘선택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나는 30년간 알고 지낸 두 부부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모여 며칠간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관계의 열린 문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여러 번 추진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오자 그들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도 친밀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끔 당신은 친밀함을 강요합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게 놔두지 않고 자꾸만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관한 말도 너무 많이 합니다. 당신이 대화의 중심에 서려고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모두 내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부부는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다섯 친구를 새로 사귀해야겠군.’
나중에 이 일에 관해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약간 옥신각신 했고 어느 순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도 당신 친구들이 좋아요. 하지만 가끔 당신은 자신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세상으로 들어와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면서 당신은 내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죠.“
그 순간 내가 말로는 진실과 정직 진정성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나에 관한 진실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용기 있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나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린 문의 모험으로 부르신다. 그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이 친구가 있다는 뜻이요, 진정으로 복을 받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서로 인정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우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성장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며 만나는 관계는 상황에 따라 깨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인간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의 관계는 감정과 조건을 넘어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진정한 우정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영적 친구와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통치를 인정하고 맺어진 관계는 오래된 나무처럼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우정의 관계가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로 우리 모두의 관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님 이 세상은 참으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주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좋은 우정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도록 좋은 친구를 허락하여 주시고 내가 또한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며 참된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게 해 주십시오 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와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오늘 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로 저희를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악한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원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댈만한 예수님



(
86)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또 낙심해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면 매우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친구에 대한 명언을 몇 가지 조사해 봤는데요. 명심보감에 열매가 없는 과일 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가 없는 친구는 사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잘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라고 조언했고, 조지 오버트 목사님은 오래된 친구가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요즘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때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친밀한 우정을 우리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친밀한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쫓기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토로했는데요.

그리고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털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형편을 들은 후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울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과 어려운 형편을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발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진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hen)‘입니다. ’매력, 아름다움, 매력적인 인격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러분과 저에게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고 깨진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구가 될 때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넉넉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영적 친구의 관계가 아름답게 조성되고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9W3XwepXr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좋은 친구 관계로서 함께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친구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이 때에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고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도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찬 463장)

 여호와의 궤가 다곤 신당에 머무는 동안 다곤 신상은 엎어지다 못해 머리와 두 손이 끊어졌습니다
.
언약궤가 지나갔던 블레셋에 아스돗, 가드 에그론 성읍에는 독한 종기 재앙이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언약궤를 가져왔을 때만 해도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7개월을 머무는 동안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던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에 난 종기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결국 그들은 언약계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는데요.

하나님은 블레셋의 성읍에 언약궤가 머무는 7개월 동안 그들의 우상 숭배와 반역을 꾸짖으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앞에서 블레셋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단지 재앙이 없는 편안한 삶만을 생각하다가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꾸짖으셨듯이 우리 잘못을 징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개인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교훈은 놓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죄 문제로 징계가 받을 때가 있음을 알고 혹시 나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요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 성숙하는 길입니다.

 

 이어서 블레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앙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왕에게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고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도 참된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지요.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두려워하면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언약궤를 빨리 돌려주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을 뛰어넘어 그분이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우리 가운데 적용해보면 우리는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깊어지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있으나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가지라는 뜻이죠.
우리가 주님과 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희근 [날마다 천국을 향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베일리라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도 만났는데 그는 평생 농업공학에 몸을 바친 사람으로서 퇴직 후에 히말리아에서 그 지역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업 기술이 열악해서 식량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일리가 가진 아쿠아 폴리스라는 기술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송어의 분비물을 통과시킨 물을 식물에 공급하고 식물에게 준 물을 다시 회수해 순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어의 분비물에는 질산염이 풍부해서 식물의 좋은 비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질산염을 다 흡수하면 물이 깨끗해져 다시 송어가 그 물을 먹는 방식으로 순환되었습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송어도 많이 키울 수 있고 곡식도 잘 자라서 식량이 풍부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남아프리카 해변에서 멋지게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 제가 가진 기술을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도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모든 선물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영원한 보물을 쌓는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런 곳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런 사람 가운데 살면서 제자를 삼고 목회자를 훈련시키길 원하십니까? 제게 주신 모든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진짜 보물 영원한 보물 끝없는 만족을 주는 보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플랜 목사님의 기도처럼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그러한 경험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현실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소홀히 여긴다면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늘 기도하십시오 생활 속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주실 것이오 또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dXHtNMJ2Oo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늘 블레셋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들의 행동을 보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면하길 원합니다. 늘 기도 시간에도 기도하지만 기도 시간 외에도 생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찬 312장)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가듯이, 인생에도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머지는 정리할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무적 용건을 다루는데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서 그를 파송한 교회에 감사를 표현하는 편지인데요.
우리는 바울이 이처럼 감사를 표명하면서도 사실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음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먼저 (8~10)까지 말씀 보면 바울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데요.
바울은 결론적으로 바른 삶과 정결한 삶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8,9)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것은 종교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일상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즉 평강을 인사말 쓸 정도로 중시했는데 바울은 이방인이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가 유대인이 되지 않더라도 내 가르침을 따르면 ‘평강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토록 반복하던 기쁨을 또 강조했습니다.


(10) “내가 크게 기뻐함은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빌립보의 성도들의 관심이 다시 싹텄기 때문인데요.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갇혀 있다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빌립보교회와 바울은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기가 전한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빌립보교회가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만나 그동안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신앙의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고 마치 봄에 다시 싹이 올라오듯 그 생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관심은 성도들의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진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11~13)까지는 ‘늘 깨어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들이 후원한 재정에 대해서는 큰 기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쓸 것은 직접 일을 조달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은 적극적으로 독려했지만 자기가 쓸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에 대한 감사 표현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이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신을 잘못 해석해서 ‘지금 많이 궁핍하지만 견디고 있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만이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는 겁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능력은 가난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유할 때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목적이었고 현재 어떤 환경에 처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사역을 못한 적도 없었고부유해서 자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만큼이나 부유함도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가난하다고 비굴하거나 낙심하거나, 자신을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유하다고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그 물질로 헛된 일에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의 균형이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한 태도말이에요.

 

 오늘은 김의수, 데이비드 서의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아내와 나 김우수는 처음. 결혼할 때 화려하게 출발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학대학에 갔고 약사가 되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나는 결혼할 때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이었으니 조건이 세상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혼집으로 32평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래도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장 최우선으로 보고 서로를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IVF에서 신앙 훈련하는 과정에서 만나 우리의 중심에 늘 하나님을 모셨다. 만약 아내가 세상적인 조건만 보고 나를 선택했다면 결혼 1년 만에 첫 딸이 장애아로 태어난 사건과 곧이어 시댁의 사업이 망해서 쪽방을 전전해야 했던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배달, 풀 뽑기, 전단지 돌리기 등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딸 치료비조차 벌어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을 아내는 격려하며 위로했다. 아내는 아픈 딸을 24시간 돌보느라 어렵게 공부한 약사 자격증을 쓰지 못하는 것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충분히 돈을 벌겠다고 뛰어나갈 만도 한데 아내는 그 좁은 집 안에서 내가 벌어오는 적은 돈에 자족하며 힘든 시절을 묵묵히 이겨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부부 가운데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위에 지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풍파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 위에 결혼해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좋은 스펙으로도 실업자가 될 수 있고 많은 돈도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모든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해 믿음의 반석 위에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가정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본질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그런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군사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상에 맞서는 자들입니다.

경제적 상황이 고려 대상일 수는 있지만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자기가 맡은 보직을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능력과 지혜와 모든 상황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힘들고 어려운 그런 조건에서도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존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도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평강의 샬롬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해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항상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균형을 잘 유지하고 지키는 성도로 살게 해주시옵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오늘 또 말씀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신 모든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나아가는 복되고 충성된 주님의 종들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저에게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Harold C. Harvey

 (찬 412장)

 

 어느 인생에게나 사는 동안 기뻐할 일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라고 건면하는 이유는 그 비결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관용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은 포용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한 것입니다.
 바울도 목회자로서 여러 동역자들과 성도와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맨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같이 다른 지체에게 약점과 문제가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을 때 우리는 그들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라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은 누구나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조건과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염려와 걱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아버지 이 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라라고 했는데요.
보통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 감사하지만 기도 응답의 확신 가운데 미리 감사함으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샬롬)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이 평강은 세상에서 사람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평강이 아니지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7절~9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하는 이 평강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이유로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천국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재철 목사님의 ‘사명자 반’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목회할 때 단군교 교주가 등록 교인이 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잠실의 본부 건물과 강화도의 수련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교주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신도들 앞에서 밝히고 자신이 창시한 단군교를 스스로 해체하였다. 그리고 잠실 본부 건물 맨 위층에 있던 단군교 성전을 폐쇄하기 위한 예배를 드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단군교 성전을 찾은 나는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재단 앞에서 단군교 성전이 주님의 집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나더러 재단에 걸려있는 단군 초상화를 떼어 옥상에서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한 일에 내가 단군교 성전을 방문할 때까지 여러 주가 지났지만 그는 그때까지 두려움으로 인해 단군 초상화를 스스로 떼내거나 폐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단 중앙에 걸려 있던 단군 초상화를 떼어낸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그에게서 건네받은 라이터로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 천연색 초상화는 한동안 푸른 불꽃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재로 변했다.

그의 바짓가랑이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초상화가 완전히 제가 되고 난 다음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군 초상화를 떼어내 불태우는 내게 혹시 무슨 화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제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족자에 진하지 않는 그 그림을 그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그동안 그의 시선이 그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시작하여 정해진 시간마다 그 그림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였으면서도 그 그림으로부터 혹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그토록 두려워한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에 따라서 두려워할 수도 있고

염려로 휩싸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니 이 말씀을 가슴에 못 박듯이 깊이 새겨 넣으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https://www.youtube.com/watch?v=ON-K0M4KGMQ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넓고 위대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래는 성도로 살겠습니다.

성령님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도록 오늘 또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고요하게 하시고 평강이 있게 하시며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하루를 승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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