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n8_6yB82ICw

자기 자랑하고 싶을 때
(고전
1010-18절)

 사람들은 자기 PR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낮추거나 숨기는 것은 덕목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홍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남이 이룬 것도 자신이 한 것처럼 속여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려 하다보니, 이런 허무맹랑한 일도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들통나면 뻔히 수치를 당할 일을 이것도 능력이다라고 하며 속여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자기 자랑에 빠진 사람들을 책망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 주변에 자신이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이 이룬 것처럼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신자들도 있었 습니다. 이렇게 마치 자신의 일처럼 꾸며대는 사람들을 바울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비교하니 지혜가 없는 자들이라고 했고, ‘남이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와 금식, 구제등을 할 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데 앞에서만 경건한 척 했지요. 이런 신앙은 껍데기만 남은 신앙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은 이미 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남의 공로를 가지고 자신의 일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만큼 속이 텅빈 사람들이고, 허세로 차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어떤 일이든지 허풍과 허세로 과대포장되어 있으면 걷힐 날이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자랑하려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제가 20대에 대형교회에서 전도사로 유년부를 맡아 섬길 때, 그 교회에 유독, 남이 이룬 사역을 자기 일인 것처럼 담임목사님에게 잘 보고하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늘 그렇게 하다 보니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에게 능력있는 사역자로 보이기 일쑤였고, 왠지 그런 일을 못하는 사람은 어리숙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진실은 드러나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인지 하나님께서 모두 알게 하신 것 같습니다.


(416)에서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성도 여러분, 지금 자신의 말에 허풍이나 허세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남의 일을 가로채거나, 남의 공로를 자기 일처럼 포장한 일이 있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이켜 놓으십시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드러내는 것보다, 진심으로 주님의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요, 실력입니다.

 

 최근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너무 높이고 있는 자신의 행동은 없었는지 돌아보십시오. 자꾸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조용히 주님 앞에 고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나를 낮추고 주님만 높이기를, 사람의 칭찬보다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사모하고, 그렇게 되도록 부단히 자신을 훈련시키십시오. 그럴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님, 오늘도 주님을 따라사는 길에 허풍, 허세와 이별하게 하소서.

말을 하려거든 주안에서 자랑하고, 주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진심이 있게 하소서.

겉에서 보이는 화려함보다, 속 내면이 훨씬더 가득차고 알찬 성도로 주님께 인정받게 하소서.

 

www.youtube.com/watch?v=yHnGAEmmMpI

 

(고후 8 16-24)
교회를 세우는 훌륭한 동역자로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 항상 돈이 모이는 곳에 마가 끼기 마련이죠.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항상 조심해야 것이 돈 문제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을 한 것도, 항상 돈에 대한 탐욕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흩어져 있는 교회들로부터 거액의 헌금을 모금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아 많은 성도들이 흩어졌고, 거기다가 연달아 흉년이 와서 남아있는 성도들은 매우 궁핍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해도, 거액의 헌금을 전달하는 것은 자칫 잘못해서 오해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신중에 신중을 더 했습니다. 특히 돈 문제에 오해가 발생하면 바울의 복음 사역에도 크나 큰 지장 을 초래할 것이 뻔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오해를 피하면서, 선한 일을 잘 마무리 지었을까요?

 

 당시 헌금은 지금처럼 몇 장의 지폐가 아니라 상당한 무게의 은화와 금화였습니다. 그래서 눈에 잘 띄었고,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헌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것도 바울이 나서지 않고, 신실하고 믿을 만한 형제 세 명을 세워서 진행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선한 것은 물론이고 사람 앞에서도 좋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조심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 두 명의 사역자들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오늘 본문이 주는 가르침은 두 가지입니다
.

첫째, 우리도 매사에 신중하게 처리함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든 성도들이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들 서로는 주님의 지체로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 무너지면 연달아 무너질 수 있음을 알고, 이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하여 말 한 마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이 돈 문제를 조심한 것처럼, 성도들끼리도 돈으로 얽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돈거래를 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차라리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돕고, 거절하십시오. 돈 문제로 얽혀 교회가 큰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경우가 주변에 많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에게 이런 믿을 만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신실한 사람이 동역자로 붙여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도 신실한 친구와 교사를 붙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전도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혹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친구가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동역해야 합니다. 단지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올바르고 강건한 사람말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처럼 우리는 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받은 동역자들입니다. 요즘 은밀하게 이단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성도들 사이를 분리시키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불신하게 하는 말을 퍼트려 결국 교회를 박살내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같은 자들의 활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약점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완전한 교회가 이루어지지, 사람이 모인 교회는 늘 불안전하고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사랑하고 지켜가려는 동역자들이 많을수록 더 건강하게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과 동역자들처럼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사명의 무게를 감당할 때, 더 온전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일은 없는지, 조심하십시오.

두 번째 좋은 동역자로 서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좋은 동역자말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과 세명의 동역자처럼 주님의 교회를 연합하여 세우는 훌륭한 관계로 사역합시다.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제자로 성장합시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동역이 이뤄지길 축원드립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부부

 

(고후 81-15)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그분을 따르길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헌금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4)에 보면 먼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매우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신앙적인 핍박속에서도 힘써 헌금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구제했고, 심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구제했으며,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어떤 부자보다 넉넉했다고 말합니다.

 

(5)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이 자원하여 구제에 앞장 선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길 원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더 큰 만큼 더 넘치는 감사와 구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했습니다
. 억지라고 아니라 복음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심으로 자신을 따르는 자를 영원히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분을 따르는 일에 두려움을 갖지 말고 헌신하라고 합니다.

 

(10-15)은 고린도 교회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귀한 사역에 동참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선한 열정이 실제적인 헌신으로도 나타나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득 수준에 비례해서 구제할 것을 권합니다. 즉 많이 가진 자는 많이 구제하고, 적게 가진 자는 자기 가진 것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유한 자는 자신의 부요함으로 현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균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가루 서 말도 전부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성도의 헌금이 이 땅의 불평등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귀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요는 남과 상관없이 나 혼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런 부요는 상대적인 피해자를 낳고, 상대적 박탈감을 더해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져 어떻게 가치있게 쓸 줄을 모르고 낭비하고, 못 가진 자는 너무 없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입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의 교회인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넉넉하거나 큰 부자도 없고, 쌓아놓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편대로 나눔을 통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공동체는 균등의 부요를 이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구제를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알고, 없는 중에도 자신의 것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재정적인 사용에 있어서도 주님의 은혜가 머무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www.youtube.com/watch?v=8stJJi2ygHA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고후 7장 2-16절)

 

 관계심리학에서 사람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꼭 잊지 말고 실행해야 할 원칙이 있는데, 3/1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나 권면을 할 때는 먼저 3번 칭찬하고 1번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에게 먼저 3번 칭찬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누군가의 충고나 권면을 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부분이더라도, 충고나 권면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면서 기분이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충고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충고나 권면을 잘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도 잘 받으면 인격과 신앙에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8-9)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권면을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디도 편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부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편지 안에는 이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이런 편지는 고린도 성도들이 기분 나빠하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고, 솔직하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묵인하는 것은 복음의 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단받는 것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고 일단 덮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빨리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더 옳은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요.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의 사랑이 전달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충고를 해야 하고, 사랑의 충고를 잘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지혜이고, 믿음입니다.

 

(10-12)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근심을 두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세상 근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사실이 아닌 헛소문과,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인 것을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 근심했습니다.


(
적용) 모든 근심이 다 나쁜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근심은 유익하고, 그 사람을 멋지게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거나 돌아보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 생기는 근심은 사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말씀앞에 바로 서기 위해 진지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쓴 것은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얼마나 이들이 잘 따라 왔는가? 바른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리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권면과 충고는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3-16)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순종적인 자세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를 환대했고, 바울의 권면을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사도들에게도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힘들지만 그래도 순종하며 나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의 권위를 존중했고, 심지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만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자세는 한 마디로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7)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복음에 대해 너그럽고 사모하는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복음과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신앙발전과 인격 성숙을 위한 충고나 권면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몸에 좋은 것은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비록 듣기에 불편하거나,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충고는 큰 유익이요,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충고나 권면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없는 충고는 자칫 허물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리 3번 듣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면,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심어린 충고와 권면은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권면도 충고도 잘 하고, 잘 받을 수 있는 성도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올해는 공동체나 개인까지, 우리 모두 부쩍 성장하는 해로 만들어 봅시다.

 

www.youtube.com/watch?v=hsGi62tgx5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 511-21)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을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까지 받았다고 바울은 구독자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 말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이 우리 인생을 바뀌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은 헬라어로 카이네 크티시스인데, 이것은 새 창조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우주적 차원에서 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뜻이죠. 기존의 질서들을 다 부수고,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 만들어진 그릇이 있는데, 토기장이가 그것을 깨부수고 버린 게 아니라, 그 파편조각들을 다시 잘게 부수어 새로운 작품그릇으로 재탄생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새로운 창조작업에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은 어릴 때는 참 좋은 꿈을 가지고 순수하게 출발합니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이 되겠지?라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환경속의 인간(person in environment)’이라고 살면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척,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까지, 멀리는 정치, 교육, 윤리와 가치, 신념, 관습, 문화와 주변환경까지 이 사람의 성품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러면서 이런 환경체계안에서 한 인격체로서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이 사람은 온전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여기저기 터진데다 피를 흘리고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온 가시들을 가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면서 당하는 상처와 피해, 또는 부정적인 말들이나 교육으로 인해 이렇게 흉측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생긴대로 산다고, 이 모습이나 성향을 바꿀 수 있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평생 갖고 살다 죽어서야 내려놓게 되는 거죠. 심지어 아주 힘든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다는 수행자들도 자신의 죄악된 성향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조금은 좋아질지언정 근본적으로 새 사람으로는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빅뉴스가 있어요. 바로 오늘 본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못된 성격장애자나, 죄악된 행실로 살아온 사람도, 또는 자신은 착하다고 생각하고 남들을 판단하고 있는 찌질이까지, 아니 모두가 인정하는 그보다 더 큰 죄악된 삶을 살아온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런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되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 실제로 깊이 공감하고 실감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한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면서 천지창조에 직접 관여하신 분이고, 심지어 그분이 없이는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세주로서 3년 반을 사시면서 자신이 창조자이심을 분명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고, 미친들이 불어닥치는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셨으며, 수많은 불치의 병을 단번에 고치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본인도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증명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새로운 창조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과거에 육체를 따라 생각하고 행하던 것들이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과 제가 믿는 예수는 바로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고, 대단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 분안에 거하시는 것을 가장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단번에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피로가 누적되어, 짜증 섞이고, 가시처럼 톡톡 붉어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어떤 일에도 감동도 감사도 없는 굳은 살 베긴 올드한 신자가 아니라, 오늘 아침에 예수님 안에서 시작하는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아침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 아침이에요.

주 예수안에서 당신은 새로운 창조물로 재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주님은 하고 계시고,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이 오늘도 떠나지 않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의 나가 아니라, 오늘 새롭게 하신 나로 살아가세요.

오늘 하루, 한 순간만 집착하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하고, 인생 전체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세요. 오늘도 여러분의 하루에, 새 창조가 이루어지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dDZBhhiviFw

 

(고후 212- 35)

자아정체감 (égo idèntity)’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제적인 느낌을 말합니다. 즉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전체 느낌이죠.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나요? 그 느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1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두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각처에 퍼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14)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하고, 항상 이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때, 즉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의 승리의 행진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향기를 자신이 있는 곳에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에나나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16,17)은 누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으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안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실제로 복음을 믿고 순전하게 전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면 우리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로 각국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 꼭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시작합시다!

기회를 잡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저들에게 있는 죽음의 독가스를 몰아내고,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시다.

착한 일과 섬김을 통해 참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퍼트리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www.youtube.com/watch?v=T1Hmjiv6z68

 

www.youtube.com/watch?v=Gx78Fe2Rfe0

 

(고후 123-211)

사랑이란 적절한 행동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랑은 끝없는 신비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안에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123,24)인데, 바울은 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은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찾아갔다면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문하는 것을 참고, 잘못 가르쳤거나 동조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더 크게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지만, 성도들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안에서 자랄 단계라고 보았고, 그래서 억지로 성장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분은 (1-4)인데, 과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재차 고린도교회를 방문한다면 서로 상처를 더 받고 신앙적으로도 도움이 될 게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방문대신 눈물의 편지를 쓰는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5-11)인데, 바울은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교회는 징계를 했고, 그들에게 벌 받는 기간을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피해를 입힌 그들은 그 징계를 수용했고, 일정기간동안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간을 갖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충분히 깨달았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조심스럽게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사랑일까요?

무조건 다가가고,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성급히 찾아가서 권면하거나, 무조건 용서한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찾아갈 때가 아니라 기다려 줄 때이고, 스스로 교인들이 성장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또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더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라 생각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주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회를 주는 것에 동의했고, 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해 주자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적용)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신중한 행동과 절제, 용서를 위한 단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양육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지만, 장성할수록 점차 스스로 하도록 가르쳐 주고,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거죠.

 신앙생활이 얼마 안 된 초신자는 성도들이 더 세심하게 돌보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스스로 성장할 단계에 있는 신자에게는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몸과 키가 자라면 그것에 맞는 훈련을 하여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죠. 무조건 돌봐주는 것은 의지 장애자를 만드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세심하게 돌 볼 사람은 누구이고,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또 나의 신앙단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돌봄이 많이 필요한 단계인지, 스스로 일어나야 할 단계인지, 이제 어린 성도를 돌보고 케어해야 할 단계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은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모두 겨자씨가 자라 새들을 깃들이게 하는 큰 나무처럼 성장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 여러 영혼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선생이 됩시다. 그래서 바울이 멋지게 살다 간 거처럼, 우리도 그 위대한 인생의 뒷걸음을 따라봅시다.

 

 매우 작은 자 하나와 같은 우리도, 힘을 합쳐 연합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에 함께 손잡는 영적 군사들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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