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Monet



(
찬 324장)

 

인간이 쌓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생활하고, 절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치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살지만 사관생도가 되면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어 주신 부활사건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던 그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한마디로 우리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성취를 알기에 자신은 부활에 대해 이미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말이죠. 아닙니다. 원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삶의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마치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으면, 차표만 간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는 서울역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순종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데 이 부활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자신은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이 땅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사탄의 세력과 전쟁중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이 상을 받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듯이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지만 부활의 소망에 동참한 이후로부터는 고난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본받아 복음과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예수님을 본으로 삼아 겸손히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일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출생과 업적,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며 교만히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결말은 (19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둘째 그들은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자들이다. 셋째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움을 받을 자들이요, 넷째는 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본삼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바울과 성도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이기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요, 그 예수님은 우리의 낮은 몸도 자기 영광의 광채와 같이 변하게 하실 분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이게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빌려 말씀하는 요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원수들과 세상의 운명은 반드시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바울과 초대교회와 같이 성도들은 원수 사탄의 공격대상이 되고, 세상에서 비난과 놀림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옹졸하며 편협적이며,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종교단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기독교야 말로 척결해야 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종교집단이라고 여기고 혐오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원수가 너희 집안에 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단순한 눈총에서부터 심각한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요,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과 통치에서 나온 것이요, 확정된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또 개인적으로 저 천국에 입성할 날을 고대하면서 세상에서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어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바울은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육체를 가진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1S0_-WVg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하늘에 시민권자이지만 아직 우리는 육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계속적으로 죄와 싸우고, 타락한 문화와 싸우고, 사탄과 영적 전쟁을 치루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달려 간 것처럼 우리도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직도 일어나 달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하고,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터이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싸우며, 근신하고 깨는 일에도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려서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를 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여정에 낙오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싸워 기필코 부르심의 상을 받은 승리자들이 됩시다. 함께 이 위대한 여정에 동역하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바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낮은 자일 수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자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와 영적 전쟁도 치러야 하고, 우리 삶에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야 하는 책임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 힘을 주소서! 강건함을 주소서!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시고,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하소서. 그래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부르심의 상을 받는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
찬 94장)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증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소서’같은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이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고, 나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자랑하길 원하는데, 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자랑만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육체는 곤고하고, 마음이 지쳤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썼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어떤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미 큰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커가는 것을 보고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자녀의 존재는 곧 부모의 기쁨인 것이죠. 그런데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힘든 인생 길도 견딜만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를 사고, 얻으면 잠시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 같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안에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직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1~3)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을 경계하라고 거듭 당부하며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을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며,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4~8)까지는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조건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조건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무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랑할만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해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가장 귀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죠. 거기에 견줄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바울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이기에 율법으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야라는 자랑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에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자랑스러워 하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탁월한 신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에 보면 바울 자신이 받은 의롭다는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중에 하나가 뭐죠? 바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보면 내 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는지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죄를 사했다는 쪽으로 가야 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실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서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8hjU_6z73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자신보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인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그분을 자랑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육체와 환경만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예수 그리스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로 사십시오. 그것이 복이요, 그것이 참된 승리의 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찬양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자랑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신실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Greatest in the Kingdom

 

(455)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교회가 있고, 내형적 교회가 있지요. 외형적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지만 내형적 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일 수 있지만 진짜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말이 많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된 교회는 사랑과 권면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쫓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교회는 하나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으며, 지역의 교회들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경쟁하기 바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한 마음을 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라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한 마음을 품고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겸손함으로 한 마음을 품으라(1~4).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안에서 진짜 교제가 이뤄지고, 서로 끈끈하게 삽겹줄로 하나되려면 권면, 사랑, 긍휼 이 세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한 마음만 되면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며, 또 엄청난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각자의 은사와 성품,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툼과 허영입니다. 사탄이 성도를 다툼과 허영을 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이기심에서 비롯되고, 그 이기심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직 겸손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다른 지체의 일까지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이 교회를 진짜 건강하게 만듭니다(4).



 둘째,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5~8).

신앙생활에서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과 겸손입니다. 교만하기는 너무너무 쉽습니다. 본성이니까요. 그러나 겸손은 정말 어렵고 힘듭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려는 것이 겸손입니다. 매일 연습해도 겸손함을 유지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마치 외줄타고 균형을 잡는 것만큼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헤를 주시고, 복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인 교만으로는 교회가 절대로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목회자만도 아니고, 성도만도 아니라 모두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죠.

교만하기는 목회가 늘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교만하기 십상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안의 직분자들이나, 오래 출석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나 예외없이 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 말씀안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이 타락한 땅에 태어나신 것만해도 기가막힌 일인데, 심지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서 가장 천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거친 강보에 쌓였고, 말밥통에 뉘실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낮아지심에 대해 한마디도 하나님께 불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의 겸손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하면 모든 신앙생활의 헛것이요, 모든 기도가 시간낭비요, 모든 헌신과 예배가 엉망진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왔으나, 가장 비참하게 하나님을 섬긴 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겸손의 교과서가 되어 주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영원한 샘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8qR13UzM8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겸손하기를 힘쓰십시오.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 곧 경건생활이고, 겸손이 곧 성품으로 나타날 때 예수님이 전해지며, 겸손하게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훈련보다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가 이렇게 예수님처럼 겸손하기를 힘쓰고 집중할 때, 교회가 하나되고 반석위의 교회처럼 강건해 집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겸손할 때, 가족 식구들이 은혜를 받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존중해 줄 것입니다.

오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겸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령님께서 겸손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오늘도 겸손하여 가장 귀하게 쓰임받는 멋진 제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가장 쉬운 것은 교만이고, 교만은 사탄에게 속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성령님, 겸손하게 하소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겸손한 종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고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 자신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영광과 존귀를 허락하소서.

 

 

 

(찬 351장)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고민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22,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나은지, 사는 것이 나은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사는 것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위해서는 자신이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개인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 즉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은 하나님나라 천국백성으로써 천국의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음으로 서 있다라는 표현은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앞둔 군사들이 우와 열을 맞춰 전쟁터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협력하다’를 NIV성경에서 컨텐딩 애즈 원 맨 contending as one man’.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되어 함께 싸우는 모습이 천국 백성의 합당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리더는 바울이죠. 그런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사로 잡혀간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경제적 문제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감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습관에 잡혀 있습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오늘도 집요하게 사로잡힐 만한 문제들로 단단히 결박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마귀가 바라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힘을 잃고 더 이상 일어나길 포기하길 원합니다. 기도생활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간계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마귀를 대적하여서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나가 되어 싸우라는 것입니다.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둘째, 무슨 일에든지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28)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마귀가 성도들을 가장 잘 넘어지게 하는 비결은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두려움일 것입니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술은 뭘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죠.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요? 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겁을 먹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이긴 것이나 진배가 없게 되겠죠.

우리가 자주 환경을 바라보고, 내 약한 몸을 바라보고 한숨이 터져나오고, 이제 무엇을 하겠나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려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하겠나 주저 앉고 싶을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어느 것도 하기 싫을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요,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입니다.

(14)에서 홍해 앞에서 두려워 하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본문 (2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믿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

또 이 부분을 새번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kQ3Z6w3_U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어떻게 하면 고난이 특권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질병이 있습니까? 그 질병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가난이 있습니까? 역시 그 가난이라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실패가 있습니까? 역시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돼죠? ”주님,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즉 싸우는 것이다. 이단들과 세상의 헛된 지식과 타락한 문화와, 우리를 사로잡고, 두렵게 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협력합시다. 그리고 당당히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함께 하실 것이요, 우리를 당신의 오른 팔로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바울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만났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뜨거움을 주시고, 협력하는 마음을 주셔서 세상과 마귀와 싸우기 위해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 이미 이긴 싸움이니, 끝까지 밀고 전진하게 하소서.

 

 

 

 

 

(411)

오늘 (4)에서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라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싸움의 종류는 달라도 모든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한 단어 때문이다. ‘정욕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탐스럽게 보인 것이 뭐냐? 바로 정욕인 것이죠. 죄가 정욕을 타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깨보면 결국 정욕의 문제요,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욕과 탐욕을 부린다고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게 될까요?

야고보 사도는 (2)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과 탐욕이 다툼을 낳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첫째,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한다. 둘째, 살인하고 시기해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셋째, 그래서 다투고 싸운다.

그러니까 탐욕을 채워보려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욕과 시기가 생겨, 결국 다툼과 같은 싸움판이 벌어져, 악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탐욕을 채워보려 하는데, 싸움만 일어나고 얻지 못하는 것이죠.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3)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위해 기꺼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추구하며 살아도 될 텐데, 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기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서 구하는 것을 기도만이라고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의 삶의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뭐하는 거죠? 뭔가를 추구하며 사는 겁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지 않는다.’ 광야 40년 생활처럼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참 가난하고 헐벗었죠.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다 보니까 절실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실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부자가 되어버린 거죠.

성도 여러분, 진짜 복이 어떤 것인줄 아세요?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보다 정말 귀한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16)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시인의 고백이 나와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진짜 복이 있는 상태는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기도 밖에는 할 게 없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죠.

자 다음 구절을 보세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적당히 세상과 발맞추어 짝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은 여자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둔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거죠. 세상을 벗삼아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세상과 벗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을 어떨 때 쓰였을까요?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간음한 상태는 한마디로 설명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양다리 걸친 신앙은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입니다. 99% 하나님을 사랑하고, 1%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보세요. '아니 나같은 죄인을, 정말 너무나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시기하까지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잊지 말라! 무엇을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10)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주님 앞에서 높아진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죄를 씻고,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 자신의 죄의 속성 때문에, 탐욕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일으키심을 얻는 과정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럼 겸손이 뭘까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얌전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이지요. 성경에서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뭐죠? 교만이죠.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자 겸손의 모습을 갖추면 특별한 은혜가 임해요.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높이세요. 자신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앞으로 올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세요.

오늘 주님앞에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밖에는 나에게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주님 밖에는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고백하세요. 그리하면 때가 되면 어떻게 높이시던지 주님이 높이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영어 성경에서 “he will lift you up”. 그가 너를 들어올릴 것이다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신다는 거죠. 이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환경으로부터 구원이요, 문제로부터 구원이요,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 잘했다, 잘 살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O7DEH-rf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지만 우리 삶에도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탐욕을 부리고, 정욕으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서 낮추며,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모습임을 압니다. 주님, 우리를 리프트 업하여 주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시옵소서.



 

 


(
400

파트리크 쥐즈킨트의 단편소설집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에 한 젊고 촉망받는 여류 화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는데, 어느 한 평론가에게 당신의 작품은 훌륭하지만 깊이가 없다.”라는 비평을 듣습니다. 그 이후 이 평론가의 말이 실렸고, 사람들은 뒤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깊이가 없을까?” 고뇌하며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녀는 피나는 노력을 해 봅니다. 도대체 깊이가 무엇일까? 어디에서, 어떤 기준으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에 메달립니다. 그러다 결국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라고 결론을 내리죠. 자신이 깊이가 없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외출도 안 하고, 방문도 거부하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모든 것을 방치합니다. 한 때 유능한 젊은 예술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모든 그림을 찢어버리고 텔레비전 방송탑에 올라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단편집은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의 위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큰 배를 작은 키로 움직이게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도 그런 영향력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말보다는 비판적이고, 비평하는 말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부정적이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그 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관대한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인내할 줄 알게 되고, 격려의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높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5~6)에서 작은 불씨가 많은 것을 태우는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이요, 불처럼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8)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엄청난 파괴력과 자생력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스스로 제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복있는 혀를 갖고, 복있는 말을 하며 살 수 있을까요?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고 금방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영어를 배우고 써 먹고, 활용해야 잘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되게 말을 잘하고,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말에 절제를 하려면 자꾸 훈련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훈련받아야 할까요?
우선 야고보 사도는 (1)에서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이 있으므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무도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 뜻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행함없이 남만 가르치려고 하는 말선생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은 줄줄이 알고, 남을 잘 가르치면서 자신은 정작 말로만 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복된 말을 하고 살 수 있을까요?
(9~12)까지는 예수 믿고 나서도 한 입으로는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는 저주를 퍼붓는 자가 되지 말라!
그렇게 이중적인 말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온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이 없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럼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면 주님을 닮게 될 것이요, 주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처럼 말하게 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따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말을 하는데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기분나쁜 말이 들려왔을 때, 첫째,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먼저 확인해야 하고, 객관적인 사실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 아니라면 일부러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말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대부분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꼭 해주고 싶고, 콕 찔러서 가르치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곱씹어 보다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것이 사실이고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됩니다.
(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지존파 검거,1994년9월21일.


 예전에 끔찍한 살인 기계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존파 멤버중에 김기환 씨가 있었는데 그는 사형장으로 가기 위한 최후 법정 진술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습니다. 1977년 창 밖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던 한 겨울날 교실에서 크레파스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무시당하고 욕을 듣고, 따귀까지 맞고 벌을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은 크레파스를 살 형편도 아니었는데, 그런 모욕을 받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미웠고, 다 죽이고 싶었다.”고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한마디가 한 소년의 마음을 멍들게 해서, 결국 처참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 버린 것입니다.

루빈스타인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폴란드에 한 소년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소년은 노력해서 겨우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나 교수로부터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네 손가락은 너무 짧고 굵다. 유연성도 부족하다. 다른 악기를 배우도록 하라.” 그래서 다른 악기를 배워 보았으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만찬회장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연주가 끝난 뒤 한 노신사가 다가오더니 너는 피아노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 열심해 노력해 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노신사가  루빈스타인이라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소년을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그가 바로 피아노 천재로 불리는 잔 파라데우스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향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베드로 였지만 그는 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담긴 이 한 마디의 말에 감명받아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6FIw6_NlU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게서 오늘 할 말을 입에 담아주십시오. 대신 하지 말아야 할 때는 굳게 입술을 닫는 절제가 있게 하옵소서.






 

 

(461)

 

 우리 기독교인에게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이냐 어딜 갈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요 죽느냐 사느냐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처럼 중요한 주제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무 유익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본다면 귀신들도 한 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한다고까지 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에 무용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허탄한 사람인지 꼬집어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함을 통해 믿음을 온전하게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모든 것인 이삭을 바치는 행함을 통해 온전하게 열매 맺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바알과 아세라보다 높은 신임을 믿은 라합은 하나님께 운명을 맡긴 행함을 통해서 살아있는 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의 구주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고백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고백을 드러내는 행함이 없다면그 믿음은 구원을 주지 못한다(14)’, 유익이 없다. (16), 헛것이다(20), 또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24), 죽은 것이다(26)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서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고요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행위로 증명되는 참된 믿음만이 주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믿음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고백한 믿음이 오직 행함과 순종으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진짜 살아있는 믿음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럼 믿음과 행함을 볼 때 무엇이 먼저일까요?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중요하죠 믿음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행함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믿음 만큼은 아니지만 그 믿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그것을 쌓아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알려면 행함을 보면 그 믿음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가짜 믿음인지 포장만 그럴 듯 한지 실제적인 믿음인지 행함을 통해서 그 믿음은 증명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에 따르는 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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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김병삼 저, ‘치열한 도전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989224일 뉴질랜드로 가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기가 호놀룰루 공항을 이륙했다.
이 보잉 747기가 높은 상공에 이르렀을 때 화물칸에 옆문이 뜯겨 나가며 항공기 옆구리에 크게 구멍이 났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승객 9명이 허공으로 빨려나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났다. 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던 기장은 데이비드 크로닌이었다.
그 긴박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기장 크로닌은 38년 비행 경험과 지혜를 짜내야 했다 고장 난 두 엔진의 추진력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비행 속도를 결정해야 했다.
장거리 비행에 맞춰 연료까지 많이 실은 상태였고 비행기 속도를 낮추는 윙플랩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로닌 기장은 믿기 어려울 만큼 기적적으로 매끄럽게 항공기를 무사히 착륙시켰다.

얼마 뒤 기자들이 처음. 화물칸 문짝이 날아간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승객을 위해 잠깐 기도한 뒤 곧바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코로닌 기장은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쳤다.
일터를 사역지로 가꾸는 것은 맡은 일을 탁월하게 해냄으로써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이웃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교의 지도자이자 비즈미스맨인 윌리엄 딜러의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주일 아침에 하는 일과 주중에 하는 일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일종의 이중생활을 이어가는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일상생활 중에 하는 바로 그 활동들이 곧 영적인 일이며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이어준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영성은 일이 곧 기도라고 속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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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활동들이 곧 영적인 일이다.”

여기서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준다라고 하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믿음에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지요.
죄의 본성을 거슬러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맞게 내 뜻을 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죄와 이기심에서 떠나기로 결단합시다

 

성도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행함으로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uPyAm7IYLw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돼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믿음이 먼저고 믿음이 우선이지만 행함이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요, 무용하다고 하는 이 귀한 진리를 잘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 삶의 자리에서 일상에서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오늘 또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증명되는 그런 가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 인도하시고 감동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12)

 

우리 삶은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의 삶이 온통 문제 투성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인생이 복잡하게 꼬일 때 우리는 신년에도 당황하고 분노하고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삶이 뜻대로 안 되고,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올 때, 이렇게 하라고 오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맏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사람들이 시험은 안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두 종류죠. ’Temptation(유혹)‘이 있고, 유혹은 사탄의 욕심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Testing(시험)라 불리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테스팅을 허락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받는 여러가지 시험은 시련일까요, 유혹의 시험일까요?

오늘 (3)에서 이렇게 정리해 주십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이든 유혹이든 결국 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죠. 믿음을 성장시키는 시련이 된다는 것이죠.

 

(2)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원어: 당할 때마다의 뜻이다)

영어성경 IF(만약)을 쓰지 않고 whanver(언제든지, 아무때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너희가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마다, 닥칠 때마다"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련은 파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덮쳐오는 큰 파도 같은 것이라는 거죠.

때로는 경제적 문제, 가정의 문제, 관계의 관계, 자녀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건강문제나, 또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타인의 잘못 때문에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련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어떻게 하면 이 시험과 시련이 믿음의 시련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당신에게 오는 시련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2) “형제들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련이 기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기뻐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요? 여기 중요한 단어가 여긴다입니다.

시련가운데, 기뻐할 수 없지만 기쁘게 여기라”, , 그렇게 간주하라, 그렇게 결정하라 마음으로 정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할 수 없지만 기쁨으로 여겼던 경우가 있을까요?

(5)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전하다가 시련을 당했는데, “사도들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공회앞을 떠나니라(41)“ 고난, 핍박가운데, 시련가운데 있었지만 오히려 기뻐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 빌립보 감옥에서 갖혀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라고 가르쳤습니다.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새해에도 시련을 올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오지만,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이것은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왜 믿음의 시련이 복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시련이 저절로 축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인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고생을 해야 합당한 계급장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인내가 없이는 성장도 없고, 성숙도 없어요. 성장과 성숙이 없는데 복이 주어지고 환경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죠? 감당하지 못하니까요.

 

여러분도 수없이 주변에서 감당할 수 없는데 재물이 주어져서 타락하고, 가정이 깨지고, 더 탐욕적인 사람이 되고 허망하게 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어야 복이 됩니다. 건강이든, 직위든, 명예든 말이죠.

 

공기의 저항없이 독수리가 날 수 없고, 부력이 없이 배가 물위에 뜰 수 없듯이, 온순한 바다에서 노련한 뱃사람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깝게 하시고,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불만족이 아닙니다. 성숙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이것을 알 때 시련을 성숙의 기회로 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함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시련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여기 인내는 우리가 과거에 알던 참을 인()자 세 개를 쓰는 무조건 참는 뜻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으면 홧병이 돼요.

본문의 인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나를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ㅎ의 시간과 방법에 나를 맡기고 그 은혜가운데 붙잡힌 바 된 것을 인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포기하지 말라! 붙잡고 메달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인내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syaying power’ 머물러 있는 힘, 쓰러지지 않고 머물러 있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운동회에서 단체 줄다리기 할 때, 있는 상대편이 잡아 당길 때,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잡고 버티고 있어야 하죠. 이게 바로 syaying power입니다.

이게 인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때는 자신만만한 때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은 없다를 외치며 산의 정상가운데 서서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힘들어하나? 조금만 더 참고 올라오면 나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가르쳤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미끄러졌고 자신이 골짜기의 구렁텅이에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이 구렁텅이를 벗어날 수가 없는 환경과 점점 용기를 잃어가는 자신의 상태를 봅니다. 정상에 서서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는 줄을 단단히 붙잡고 syaying power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결국 그 줄이 당신을 당겨낼 것입니다.

모세에게 만약 미디안 광야 40년의 훈련과정이 없었다면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40년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의 불평을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지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밧줄이 자신을 끌어 당길 때까지 기다린 것이죠.

하나님의 때가 오자, 요셉은 형들의 큰 실수를 용서해주는 큰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살기등등한 위협가운데서도 그렇게 도망다니며 인내하는 광야생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편에 기자가 되어 깊은 묵상으로 많은 사람의 심령을 울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야고보 사도를 통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이룸을 통해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당하는 시련도 기쁘게 여기라!‘

 

새해에도 시련은 오고, 유혹도 오고, 연단도 옵니다. 꽃길만 걷는 것은 없어요. 꽃길만 걸으면 사람 망칩니다.

하지만 신발 밑창에 꽃을 깔면 밟는 곳마다 꽃길이 됩니다.

우리의 발 밑창에 깔아야 할 것은 바로 시련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인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저 말씀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syaying power를 한다면, 주님은 그 줄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주십니다.

올 한 해 시련이 없다고 믿는 미숙한 신앙이 아니라, 시련속에서도 성장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O_voKGggjE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아버지시오, 창조자시오, 목자가 되시며, 동행자 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시련과 시험과 유혹속에서도 성장하고 익어가는 성숙한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말씀을 통해 깨닫고, 바로잡고, 온전히 세워지는 강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어떤 복도 능히 감당해 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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