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64장)|

종교 개혁자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첫 문장에서 “인간의 참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이뤄져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광대하지요, 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작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지혜를 알면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시편 33편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찬양하는 찬양시인데요, 찬양은 성도의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시인은 곧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분인지 인정하고, 경탄하며 , 감사로 고백하라고 촉구합니다.

시인이 창조의 세계를 노래하며 우리에게도 그 찬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시인이 하는 말은 “의인들아, 정직한 자들아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라!”고 운을 뗍니다.
그 찬양은 수금과 비파와 새 노래와 즐거운 소리로 이뤄지며, 동원되는 악기의 조화는 창조의 정교함을, 노래와 즐거운 소리는 주님의 풍성함을 상징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편 기자에 의하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에는 정직, 진실, 공의, 정의, 인자하심‘이 온전히 녹아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지으신 세계를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과 거대한 바다를 통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통치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이뤄가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세상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온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루어졌다, 견고히 섰다.‘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루심과 세우심이 끝난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흘러가고 있으며 , 그 분의 계획 앞에서 인간의 계획과 생각은 모두 무효가 된다고 노래합니다.


 세 번째로 시인은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니,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시인은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 받은 자도 없고, 가장 강력한 군대라도 사람은 구원할 수 없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라는 말을 반복해서, 각자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즐거워 하라! 그분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외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우선 광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예비하신 권능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하나님은 지금 온 땅을 다스리시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뜻대로 안 되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인간에게 참된 지혜는 창조자요, 구원주이시오, 심판의 날에 심판의 주가 되시는 그분을 아는 것이요,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지혜로, 오늘도 당신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본문중에서 18~22절을 선포하며 마칩니다.

(18~22
)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446)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유 없는 물건이 없듯이 이유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는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온 세상 민족이 구원을 받는 자리까지 나오게 하시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 중요한 일을 위해 부름받았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큰 역사가 이뤄지도록 자신을 내어드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S2ehX5j8lw

야곱은 병들어 죽을 날이 다가오자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전합니다. 야곱이 전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셨고, 그 민족을 통해 온 세상이 구원받는 자리까지 돌아오게 하려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위해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 총리가 되게 하셨으니, 야곱은 요셉이 그 언약을 완성하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 중에 신앙적,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유다 지파인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지만, 야곱은 신앙의 맥은 요셉을 통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실질적 장자로 여기고 그에게 형제들보다 갑절의 유산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자신의 아들의 반열로 세워, 요셉이 갑절의 유산을 상속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는 없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아들로 입양되어 가나안 땅을 상속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결과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당당히 열두 지파에 들어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고,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도 하나의 지파로서 정당하게 분배받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 오늘의 이 말씀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원래 열두 지파의 반열에 올라갈 자격이 없었지만 은혜로 자격을 얻었고, 영광스러운 지파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요셉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오직 은총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방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양자로 입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자녀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2)에 보면 성도가 얻은 신분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를 만드신 분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분이요, 하나님 앞에서 화평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엄청난 신분상승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모든 죄를 소멸하셨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말씀의 결론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애굽에서 출생한 자들이요, 애굽에서 문화와 교육을 받은 애굽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반열에 들어오는 놀라운 은총을 수여받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영원히 기록될 열두지파의 반열에 들어온 것은 전적인 은혜인 것이죠.

우리도 이와같이 세상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요 권속이 되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뭐가 좀 부족하거나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은총은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세상에 나갈 때 이 우주의 창조주 되신 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알고, 담대하시고, 당당하십시오.

어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주신 은총을 우리에게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자격 없는 자를 세우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시고, 믿음의 장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요셉처럼 축복의 도구가 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은총을 받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보살핌과 통치속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
549)

오늘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마지막에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NT5cnQqRw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가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고, 세겜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벧엘로 떠나야 했고, 요셉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줌으써,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게 됩니다.

 

(12~16)에는 야곱이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언약의 축복을 전수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 머리에 올리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팔을 교차하면서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위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얹고 축복했습니다.

지금 야곱의 두 손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 축복은 요셉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세상에서 번성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번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변함없이 주셨던 축복이며, 또한 자기가 집을 떠나야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빌어준 복이기도 했습니다.

(17~22)의 내용은 야곱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잘못 알고 손을 올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른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에브라임을, 왼손에 므낫세를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만한데도 그의 지혜는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장자로 선택하셨고, 라반보다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먼저 선택하여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므낫세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인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같고 므낫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했으며, 두 손자의 후손 역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떠나지 않으셔서, 때가 차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세겜 땅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야곱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나, 실현되었고요, 이후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을 좀 보세요. 어릴적이나 청년 시절에 지혜가 없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기회를 낭비했던 모습은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을 통해 징계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성장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영적 혜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과 영적 혜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께 지혜를 얻고, 영적 혜안이 열려서,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복된 어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온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와 보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성장해서 마침내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도 반복되는 일상이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에,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도 점점 성장하여 말년에는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어른이 되게 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CjS9fcfkHlU 

(찬 330)

 

사람이 한두 번은 성실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실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뛰어난 재능보다 성실함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보면 토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이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요셉에게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기근은 더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생명을 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요셉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요셉은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기근은 고대근동 지역에 임했고,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 곡식 창고의 출입(出入)을 관장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팔았고,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대 왕국 체계에서 토지 국유화를 의미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성읍 여러 곳에 분산시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이 애굽 왕실의 소작농처럼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왕이 모든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우리가 요셉의 일 처리와 그의 태도를 보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은 이 모든 거대한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돌려 자기 배만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 일관적으로 성실했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큰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려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3)”고 하였고,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고(286),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2810).”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6)에서 종들아, 성실하게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고, (3)에서는 윗 사람들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에서 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자기 일에 성실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셉의 성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셉의 성실함을 우리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하소서.

 

 

 

www.youtube.com/watch?v=uMEZtM83RKo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속지 않으려면

(고후 111-15)

 

요즘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뜻을 곡해한 내가복음인데도, 그걸 구별하지 못하니 좋아요를 누르고 그들의 구독자가 수 만명입니다.

어떨 때는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에, 가짜들이 속지 않으려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을 내가복음으로 해석하는 거짓된 자들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거짓에 속지 않고 성경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첫째, 듣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과 예수님을 연결시킨 사람이죠. 최고의 신랑인 예수님을 소개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신부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달콤한 허니문여행이 끝난 것처럼 예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관계를 깨트렸듯이 그 부부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꾀어 예수님을 쫓는 삶에서 멀어지게 했는데

바울은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만일 누가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적용)
오늘날도 이런 일이 급증하여 예수님의 신부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신앙적 순수함과 진실함으로부터 낙오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독자 수를 보고 혹하거나, 참신한 해석이라 해서 쏠리면 크게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에 검증이 필요하니, 이상하다 싶으면 반드시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여쭤보시길 바랍니다.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는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선명한 기준이 몇가지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절대 벗어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교리를 절대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듯, 잘못된 거짓 교리는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행함을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사탄이 본래의 흉측한 모습으로 온다면 미혹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할 능력이 있고, 그런 모습으로 올 때 성도들이 미혹당한다는 것도 잘 꾀차고 있습니다. 또 배후에 사탄의 영을 등에 진 거짓된 일꾼들도 의의 일꾼인냥 변장하고 다가오면 식별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저들이 변장을 하고, 분장을 하고, 가장을 해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악한 세력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행위에는 악취가 나고,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헌신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말만 있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거짓 교사입니다. 말하는 것은 쉽지만, 행동하는 것에는 희생이 따르지요.

예수님은 온 몸으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행함과 열매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선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탄의 종으로 부름받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큰 죄를 짓고, 타락한 신자가 있겠습니까? 서서히 그렇게 되는 것이죠. 누군가 정해 놓은 사람이 타락하고 미혹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나도 사탄의 종이요, 악한 자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는 죄를 터트릴 화약이 얼마나 많이 쌓여있습니까? 한 번만 잘못 마음을 먹어도 엄청난 죄를 짓고 가장 부끄러운 시궁창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동행했던 롯은 한 순간, 눈에 좋아보이는 잘못된 선택으로 엄청난 결과를 맞이했고, 결국 가장 수치스런 아버지가 되었으며,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는 암몬과 모암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벧후 2) 롯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롯이 의로웠지만 분별력 없이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듣다가 그의 심령이 죄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다윗도 가는 곳마다 승리할 때 방심하다 넘어져 평생 가장 아픈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누가 미혹의 죄에서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적용) 엊그제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성들을 몇을 죽이고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걸어나와 차에 타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의하고, 죄악된 정보에 노출되어 감각을 잃어버렸으면 짐승보다 못한 태도를 보일까 싶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남의 허물을 논하다가 내가 그보다 더한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십시오. 이렇게 매일 말씀을 듣고 무장해도 넘어지기 일쑤인데,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지켜나가려 하십니까?

아직 힘이 있을 때, 영향력이 있을 때, 내 곁에 있을 때 가족들을 지키십시오.

 

오늘도 말씀으로 무장하고, 거룩한 성령님의 인도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십시오.

이 허탄한 세상에서 참된 것을 구별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n8_6yB82ICw

자기 자랑하고 싶을 때
(고전
1010-18절)

 사람들은 자기 PR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낮추거나 숨기는 것은 덕목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홍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남이 이룬 것도 자신이 한 것처럼 속여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려 하다보니, 이런 허무맹랑한 일도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들통나면 뻔히 수치를 당할 일을 이것도 능력이다라고 하며 속여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자기 자랑에 빠진 사람들을 책망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 주변에 자신이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이 이룬 것처럼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신자들도 있었 습니다. 이렇게 마치 자신의 일처럼 꾸며대는 사람들을 바울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비교하니 지혜가 없는 자들이라고 했고, ‘남이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와 금식, 구제등을 할 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데 앞에서만 경건한 척 했지요. 이런 신앙은 껍데기만 남은 신앙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은 이미 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남의 공로를 가지고 자신의 일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만큼 속이 텅빈 사람들이고, 허세로 차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어떤 일이든지 허풍과 허세로 과대포장되어 있으면 걷힐 날이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자랑하려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제가 20대에 대형교회에서 전도사로 유년부를 맡아 섬길 때, 그 교회에 유독, 남이 이룬 사역을 자기 일인 것처럼 담임목사님에게 잘 보고하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늘 그렇게 하다 보니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에게 능력있는 사역자로 보이기 일쑤였고, 왠지 그런 일을 못하는 사람은 어리숙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진실은 드러나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인지 하나님께서 모두 알게 하신 것 같습니다.


(416)에서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성도 여러분, 지금 자신의 말에 허풍이나 허세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남의 일을 가로채거나, 남의 공로를 자기 일처럼 포장한 일이 있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이켜 놓으십시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드러내는 것보다, 진심으로 주님의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요, 실력입니다.

 

 최근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너무 높이고 있는 자신의 행동은 없었는지 돌아보십시오. 자꾸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조용히 주님 앞에 고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나를 낮추고 주님만 높이기를, 사람의 칭찬보다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사모하고, 그렇게 되도록 부단히 자신을 훈련시키십시오. 그럴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님, 오늘도 주님을 따라사는 길에 허풍, 허세와 이별하게 하소서.

말을 하려거든 주안에서 자랑하고, 주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진심이 있게 하소서.

겉에서 보이는 화려함보다, 속 내면이 훨씬더 가득차고 알찬 성도로 주님께 인정받게 하소서.

 

www.youtube.com/watch?v=yHnGAEmmMpI

 

(고후 8 16-24)
교회를 세우는 훌륭한 동역자로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 항상 돈이 모이는 곳에 마가 끼기 마련이죠.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항상 조심해야 것이 돈 문제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을 한 것도, 항상 돈에 대한 탐욕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흩어져 있는 교회들로부터 거액의 헌금을 모금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아 많은 성도들이 흩어졌고, 거기다가 연달아 흉년이 와서 남아있는 성도들은 매우 궁핍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해도, 거액의 헌금을 전달하는 것은 자칫 잘못해서 오해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신중에 신중을 더 했습니다. 특히 돈 문제에 오해가 발생하면 바울의 복음 사역에도 크나 큰 지장 을 초래할 것이 뻔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오해를 피하면서, 선한 일을 잘 마무리 지었을까요?

 

 당시 헌금은 지금처럼 몇 장의 지폐가 아니라 상당한 무게의 은화와 금화였습니다. 그래서 눈에 잘 띄었고,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헌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것도 바울이 나서지 않고, 신실하고 믿을 만한 형제 세 명을 세워서 진행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선한 것은 물론이고 사람 앞에서도 좋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조심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 두 명의 사역자들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오늘 본문이 주는 가르침은 두 가지입니다
.

첫째, 우리도 매사에 신중하게 처리함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든 성도들이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들 서로는 주님의 지체로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 무너지면 연달아 무너질 수 있음을 알고, 이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하여 말 한 마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이 돈 문제를 조심한 것처럼, 성도들끼리도 돈으로 얽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돈거래를 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차라리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돕고, 거절하십시오. 돈 문제로 얽혀 교회가 큰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경우가 주변에 많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에게 이런 믿을 만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신실한 사람이 동역자로 붙여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도 신실한 친구와 교사를 붙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전도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혹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친구가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동역해야 합니다. 단지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올바르고 강건한 사람말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처럼 우리는 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받은 동역자들입니다. 요즘 은밀하게 이단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성도들 사이를 분리시키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불신하게 하는 말을 퍼트려 결국 교회를 박살내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같은 자들의 활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약점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완전한 교회가 이루어지지, 사람이 모인 교회는 늘 불안전하고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사랑하고 지켜가려는 동역자들이 많을수록 더 건강하게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과 동역자들처럼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사명의 무게를 감당할 때, 더 온전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일은 없는지, 조심하십시오.

두 번째 좋은 동역자로 서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좋은 동역자말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과 세명의 동역자처럼 주님의 교회를 연합하여 세우는 훌륭한 관계로 사역합시다.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제자로 성장합시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동역이 이뤄지길 축원드립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부부

 

(고후 81-15)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그분을 따르길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헌금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4)에 보면 먼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매우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신앙적인 핍박속에서도 힘써 헌금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구제했고, 심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구제했으며,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어떤 부자보다 넉넉했다고 말합니다.

 

(5)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이 자원하여 구제에 앞장 선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길 원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더 큰 만큼 더 넘치는 감사와 구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했습니다
. 억지라고 아니라 복음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심으로 자신을 따르는 자를 영원히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분을 따르는 일에 두려움을 갖지 말고 헌신하라고 합니다.

 

(10-15)은 고린도 교회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귀한 사역에 동참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선한 열정이 실제적인 헌신으로도 나타나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득 수준에 비례해서 구제할 것을 권합니다. 즉 많이 가진 자는 많이 구제하고, 적게 가진 자는 자기 가진 것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유한 자는 자신의 부요함으로 현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균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가루 서 말도 전부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성도의 헌금이 이 땅의 불평등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귀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요는 남과 상관없이 나 혼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런 부요는 상대적인 피해자를 낳고, 상대적 박탈감을 더해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져 어떻게 가치있게 쓸 줄을 모르고 낭비하고, 못 가진 자는 너무 없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입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의 교회인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넉넉하거나 큰 부자도 없고, 쌓아놓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편대로 나눔을 통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공동체는 균등의 부요를 이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구제를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알고, 없는 중에도 자신의 것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재정적인 사용에 있어서도 주님의 은혜가 머무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www.youtube.com/watch?v=8stJJi2yg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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