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고후 7장 2-16절)

 

 관계심리학에서 사람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꼭 잊지 말고 실행해야 할 원칙이 있는데, 3/1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나 권면을 할 때는 먼저 3번 칭찬하고 1번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에게 먼저 3번 칭찬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누군가의 충고나 권면을 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부분이더라도, 충고나 권면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면서 기분이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충고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충고나 권면을 잘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도 잘 받으면 인격과 신앙에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8-9)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권면을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디도 편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부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편지 안에는 이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이런 편지는 고린도 성도들이 기분 나빠하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고, 솔직하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묵인하는 것은 복음의 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단받는 것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고 일단 덮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빨리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더 옳은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요.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의 사랑이 전달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충고를 해야 하고, 사랑의 충고를 잘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지혜이고, 믿음입니다.

 

(10-12)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근심을 두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세상 근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사실이 아닌 헛소문과,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인 것을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 근심했습니다.


(
적용) 모든 근심이 다 나쁜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근심은 유익하고, 그 사람을 멋지게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거나 돌아보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 생기는 근심은 사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말씀앞에 바로 서기 위해 진지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쓴 것은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얼마나 이들이 잘 따라 왔는가? 바른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리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권면과 충고는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3-16)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순종적인 자세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를 환대했고, 바울의 권면을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사도들에게도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힘들지만 그래도 순종하며 나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의 권위를 존중했고, 심지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만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자세는 한 마디로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7)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복음에 대해 너그럽고 사모하는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복음과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신앙발전과 인격 성숙을 위한 충고나 권면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몸에 좋은 것은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비록 듣기에 불편하거나,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충고는 큰 유익이요,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충고나 권면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없는 충고는 자칫 허물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리 3번 듣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면,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심어린 충고와 권면은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권면도 충고도 잘 하고, 잘 받을 수 있는 성도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올해는 공동체나 개인까지, 우리 모두 부쩍 성장하는 해로 만들어 봅시다.

 

www.youtube.com/watch?v=hsGi62tgx54

 

크리스천이여 당당하게 살라

(고후 61-10)

얼마전 미국 코네티컷주의 가라쥐세일이라고, 한 집의 마당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내어놓고 팔았는데, 길가던 한 사람이 한국돈 39천원에 중국도자기 밥그릇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 도자기를 감정의뢰해 보니 희소가치가 높은 15세게 명나라 때 유물로 무려 54천만원짜리 그릇임을 알게 되어,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오랫된 그릇은 39천원에 사고 팔 때도 그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몰라봤을 뿐이죠.

우리 크리스천의 가치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별 것 없다고 해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보석은 흙구덩이에 박혀있어도 보석인 것처럼, 예수 피로 구원받은 성도의 가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몰아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죄 없이 하기 위해,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이 되어 죄 값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후 8)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종종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었으나, 실제로 그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49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니 성도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것에 근거하여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뿐 아니라, 화목을 위해 부름받은 모든 성도는 그 부르심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증거합니다.

 

먼저 복음의 일꾼 된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살다가 당했던 고통, 열 가지를 열거하는데요,

많이 견디는 것,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으며, 오른 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도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 왜 이런 말을 할까요?
하나님께 부름받은 모든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오해나 박해를 받아도,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정체성을 갖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려운 때라고 하지만, 지난 기독교 역사에 비하면 가장 평안한 때 중에 한 시대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은 그나마 잔혹한 박해는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가장 우리와 가까운 북한만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목숨을 걸 정도로 가장 위험한 행위중의 하나이죠.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어서 감사한 것도 있지만, 그ㅇ러다 보니 너무 늘어지고, 깨어있지 못하는 편위위주의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예배드리는 자들이 주목받고, 미움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니 사회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아지면서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일부러 사거리나 광장에 나가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굳이 소리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도 주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행동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갖 수치와 부끄럼을 당하시고 우리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싫은 소리 좀 듣는다고 어떻게 자기 신앙 정체성을 숨길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10:32,33)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느냐면, “너희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는 말씀 직후에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귀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부끄럽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증언한 것처럼, 환란과 궁핍과 육체적인 고난속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사명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 더 큰 박해와 고통의 시대가 온 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부끄러워하 하지 말고, 드러내야 합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좋으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기독교에 빠진 환자요, 광신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평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기에, 세상 누가 뭐라 말해도 그들의 판단에 치우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저들의 선택을 따를 것이요,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면 그렇게 믿고 살 것이요, 안 믿고 살겠다면 도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기도를 하겠지만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세요.

늘 부정적인 사람보다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주목하지 말고,

참되고 영원한 가치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 가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참되고 유명하고, 죽임을 면제당하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케 할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믿는 사람의 분명한 정체성이 확보되길 바랍니다.

또한 이 세상을 향해 크리스천으로써 자세는 당당하고, 품위있으며, 마음은 영생을 가진자로서 행복한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늘 어떤 어려움과 궁핍과, 고난속에서도
이 분명한 정체성을 지켜나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또한 섬기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가진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속에 내가 있음을 알고,

감사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1Q_Oilp6YFI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 511-21)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을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까지 받았다고 바울은 구독자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 말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이 우리 인생을 바뀌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은 헬라어로 카이네 크티시스인데, 이것은 새 창조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우주적 차원에서 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뜻이죠. 기존의 질서들을 다 부수고,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 만들어진 그릇이 있는데, 토기장이가 그것을 깨부수고 버린 게 아니라, 그 파편조각들을 다시 잘게 부수어 새로운 작품그릇으로 재탄생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새로운 창조작업에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은 어릴 때는 참 좋은 꿈을 가지고 순수하게 출발합니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이 되겠지?라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환경속의 인간(person in environment)’이라고 살면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척,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까지, 멀리는 정치, 교육, 윤리와 가치, 신념, 관습, 문화와 주변환경까지 이 사람의 성품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러면서 이런 환경체계안에서 한 인격체로서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이 사람은 온전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여기저기 터진데다 피를 흘리고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온 가시들을 가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면서 당하는 상처와 피해, 또는 부정적인 말들이나 교육으로 인해 이렇게 흉측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생긴대로 산다고, 이 모습이나 성향을 바꿀 수 있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평생 갖고 살다 죽어서야 내려놓게 되는 거죠. 심지어 아주 힘든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다는 수행자들도 자신의 죄악된 성향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조금은 좋아질지언정 근본적으로 새 사람으로는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빅뉴스가 있어요. 바로 오늘 본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못된 성격장애자나, 죄악된 행실로 살아온 사람도, 또는 자신은 착하다고 생각하고 남들을 판단하고 있는 찌질이까지, 아니 모두가 인정하는 그보다 더 큰 죄악된 삶을 살아온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런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되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 실제로 깊이 공감하고 실감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한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면서 천지창조에 직접 관여하신 분이고, 심지어 그분이 없이는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세주로서 3년 반을 사시면서 자신이 창조자이심을 분명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고, 미친들이 불어닥치는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셨으며, 수많은 불치의 병을 단번에 고치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본인도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증명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새로운 창조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과거에 육체를 따라 생각하고 행하던 것들이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과 제가 믿는 예수는 바로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고, 대단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 분안에 거하시는 것을 가장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단번에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피로가 누적되어, 짜증 섞이고, 가시처럼 톡톡 붉어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어떤 일에도 감동도 감사도 없는 굳은 살 베긴 올드한 신자가 아니라, 오늘 아침에 예수님 안에서 시작하는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아침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 아침이에요.

주 예수안에서 당신은 새로운 창조물로 재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주님은 하고 계시고,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이 오늘도 떠나지 않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의 나가 아니라, 오늘 새롭게 하신 나로 살아가세요.

오늘 하루, 한 순간만 집착하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하고, 인생 전체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세요. 오늘도 여러분의 하루에, 새 창조가 이루어지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dDZBhhiviFw

 

(고후 212- 35)

자아정체감 (égo idèntity)’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제적인 느낌을 말합니다. 즉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전체 느낌이죠.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나요? 그 느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1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두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각처에 퍼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14)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하고, 항상 이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때, 즉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의 승리의 행진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향기를 자신이 있는 곳에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에나나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16,17)은 누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으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안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실제로 복음을 믿고 순전하게 전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면 우리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로 각국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 꼭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시작합시다!

기회를 잡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저들에게 있는 죽음의 독가스를 몰아내고,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시다.

착한 일과 섬김을 통해 참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퍼트리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www.youtube.com/watch?v=T1Hmjiv6z68

 

www.youtube.com/watch?v=Gx78Fe2Rfe0

 

(고후 123-211)

사랑이란 적절한 행동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랑은 끝없는 신비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안에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123,24)인데, 바울은 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은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찾아갔다면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문하는 것을 참고, 잘못 가르쳤거나 동조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더 크게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지만, 성도들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안에서 자랄 단계라고 보았고, 그래서 억지로 성장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분은 (1-4)인데, 과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재차 고린도교회를 방문한다면 서로 상처를 더 받고 신앙적으로도 도움이 될 게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방문대신 눈물의 편지를 쓰는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5-11)인데, 바울은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교회는 징계를 했고, 그들에게 벌 받는 기간을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피해를 입힌 그들은 그 징계를 수용했고, 일정기간동안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간을 갖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충분히 깨달았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하자고 조심스럽게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사랑일까요?

무조건 다가가고,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성급히 찾아가서 권면하거나, 무조건 용서한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찾아갈 때가 아니라 기다려 줄 때이고, 스스로 교인들이 성장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또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더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라 생각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주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자숙하며 회개하는 기회를 주는 것에 동의했고, 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했다면 용서하고 위로해 주자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적용)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신중한 행동과 절제, 용서를 위한 단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양육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지만, 장성할수록 점차 스스로 하도록 가르쳐 주고,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거죠.

 신앙생활이 얼마 안 된 초신자는 성도들이 더 세심하게 돌보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스스로 성장할 단계에 있는 신자에게는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몸과 키가 자라면 그것에 맞는 훈련을 하여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죠. 무조건 돌봐주는 것은 의지 장애자를 만드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세심하게 돌 볼 사람은 누구이고,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또 나의 신앙단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돌봄이 많이 필요한 단계인지, 스스로 일어나야 할 단계인지, 이제 어린 성도를 돌보고 케어해야 할 단계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은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모두 겨자씨가 자라 새들을 깃들이게 하는 큰 나무처럼 성장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 여러 영혼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선생이 됩시다. 그래서 바울이 멋지게 살다 간 거처럼, 우리도 그 위대한 인생의 뒷걸음을 따라봅시다.

 

 매우 작은 자 하나와 같은 우리도, 힘을 합쳐 연합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에 함께 손잡는 영적 군사들이길 바랍니다.

 

 

 

 

www.youtube.com/watch?v=ed03V3NErU8

 

 

(고후 112-22)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와 아멘이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16개월동안 머물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교회교인들을 특별히 생각했고,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바울의 사도직분도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인격도 못 믿을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해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12(원어성경)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해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되지 않게 행동했다는 뜻이에요.

좀더 자세히 풀어보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으로 행동했다고 했는데,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거룩함을 단순함, 솔직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정직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실함으로 행하였다고 했는데, 여기 진실함은 햇빛에 비춰보아도 투명하다는 뜻으로, 성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동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관점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명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진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 더 방문할 계획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오히려 그들에게나 바울 자신에게도 더 유익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23) 이 결정은 사람들에게 변덕쟁이이라는 비난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에서였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긋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어긋난 계획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아멘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성도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하고 달려가면, 하나님은 모든 문제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오해도 있어 해명도 해야 하고, 자신과의 사이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고린도교회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든 관계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아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대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 이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어떻게 행동하며 살라고 교훈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함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무엇을 하든지, 그게 가정일이든, 학교나 회사일이든, 사역을 하는 것이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투명하게 일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떳떳하고 성실했어도 오해하는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도 오해를 받았고, 심지어 예수님처럼 깨끗한 분도 오해를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어도 오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신앙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고 옳은 일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적극 해명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행함으로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을 오해하여 비난하거나, 뒷담화까는 사람이 있어도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낙심하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십시오. 바울처럼 계속해서 믿음의 선을 행하고,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움으로 직진하십시오.

오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계획의 변동이나 수정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와 아멘이 됩니다.

사람의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죠. 때로는 뜻이 어그러지고, 어쩔 수 없이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뜻대로 안된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의 수정안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계획의 수정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예와 하멘으로 화답하며 기도하며 나간다면, 지금 어긋난 계획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계획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계획대로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가지십시오. ‘아멘, 예 그렇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신 계획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와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사단에게 밀리지 말고, 이겨내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적 승리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FbHoJ1Zb9OQ

 

(고후 11-11)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입니다. 내용은 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신앙적인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그 교회안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내용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퍼트린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들이 떠돌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력한 빛으로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충분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정확한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시작부분으로써 서론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첫째는 위로의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선순환이란 좋은 순환이란 뜻이니까, 나쁜 일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되게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난이 선은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바울은 그것이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속에서 위로라는 선을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위로받음으로서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기독교의 영성작가는 상처입은 치유자, 더 원디드 힐러(the Wounded Heal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상처입은 치유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가르켜요.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것이죠.

역시,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고난으로 큰 아픔을 겪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그 아픔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가 침몰하여 자녀를 잃은 큰 고통을 당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이에요.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이 고통을 우리가 겪게 하심으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위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의 끝을 경험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너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가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도 나처럼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지 않겠니?’라고 물어오십니다.

이 귀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의 사역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의 가르침은 초죽음으로 몰고가는 큰 고통의 문제는 이것을 겪는 사람에게도 큰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죠.

사실 이런 고통은 주요 사역자들에게 있었던 고통이에요.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 죽음 직전을 경험했고, 모세도 (11)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였으며, 예레미야는 (20)에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형선고와 같은 고통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때,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런저런 고통을 다 겪은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바울의 말이 실감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하셨습니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저에게도 사형선고와 같은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하는 공격에 뭇매를 맞고, 소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그게 항상 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다시 멋지게 우리를 살려내셨고, 오늘자기 이르게 하셨습니다.

악한 마귀는 성도인 우리를 괴롭혀 죽이려고 덤벼들고, 어떤 사람들도 그것에 동조하여 문제로 위협하고 얼토당토없는 말들로 성도인 우리들을 공격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까?
도리어 그 고통의 문제들이 성도인 우리를 겸손하게 했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가장 처절한 상태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붙잡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동의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마음에 간직합시다.

두 가지를 가르쳤는데요, 첫째는 고통중에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둘째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는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오늘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김이 빠져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기가막힌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종결자이십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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