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540장)

 

인생이 힘든 이유는 뭘까요? 아무래도 ‘불확실성’이라 아닐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불안과 두려움,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전능한 능력자가 미래 일을 알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불안한 사람들은 미래를 알려준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와 운명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 수 없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사 59장)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고 만 것이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는 제사장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무엘은 소년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1)에 보면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당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도 드물었고, 이상도 많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14번째 사사이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와 군사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2절)”고 소개했는데, 이것은 노안이 온 것 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약 열두살쯤 되는 소년이었고, 엘리 제사장 밑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년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네 번이나 들었지만 엘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께서 동행하셨으나, ‘저희 눈이 가리워 알아보지 못했다(눅24장)’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 교회였던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 역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다(계3: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인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끊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고, 그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엘리가 소년 사무엘에게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지시합니다. 엘리도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이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무엘은 얼마나 든든하고, 확실하게 담대히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주로 직접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졌던 AD 1세기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말씀하셨고,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시대처럼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 일까요? 꿈과 환상과 음성에는 사탄이 끼어서, 변조하여 나타날 수 있고, 잘못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비주의가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성경 자체의 증언이 있습니다.

 (딤후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모든 성경이란 완성된 66권을 가르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경(正經), 영어로는 ’캐논(Canon)‘입니다. 표준 성경이란 뜻이죠.

이 정경인 66권 안에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개인의 문제든, 질병의 문제든, 사회문제든, 인간관계나 신앙적인 해답이 다 성경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심령안에 들아와 성경말씀을 듣거나 읽고 묵상할 때, 조명하여 깨닫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감동을 주어 깨우쳐 주십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해 답을 찾기 원할 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분주함을 내려놓고, 정규적으로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갖는 게 유익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꾸준히 가질 때 침묵 가운데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또 성도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처럼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나 확신이 있습니다. 물론 그 깨달음이 성경적이냐를 따져보고 사탄의 음성이냐, 자기 속사람의 음성이냐, 하나님의 음성이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요청하고 부르짖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잠잠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전에 모나미 볼펜 사장님이 부도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하나님의 책망이셨습니다. “너 사업한답시고 주일 잘 지켰냐? 십일조는 제대로 했냐? 성경은 얼마나 읽었냐?” 정곡을 찌를 음성이었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잘 하겠다고 고백하고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21장이 눈에 띄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해변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한 후 많은 고기가 잡히죠. 그 때 잡힌 물고기 수가 153마리입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모나미 153 볼펜을 만든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1자루 이상 사도록 50억 개를 생산할 것을 기도했더니, 그런데 정말 50억 개 목표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사람들을 통해, 목회자의 권면이나, 성도들과 대화중에 깨닫게도 하시고, 은혜받은 것을 나누거나, 복음을 전할 때 깨닫게도 하십니다. 또한 꿈이나 환상, 질병의 치유 체험, 신비한 영적 경험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또는 우리 환경이나 사건, 고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LfFZY8sXk

중요한 포인트는, 이렇게 음성을 들었다 싶을 때는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꾐에 넘어가 미혹당하여 낭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 어렵고 힘든 때에 사람들은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방황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음성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말씀을 묵상하는 큐티를 지속해야 하고, 생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때를 돌파하고, 사탄의 시험과 유혹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사무엘처럼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 들었을 때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적용하면 말씀이 우리를 복되고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좋아지는 복과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생활로 앞으로 전진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찬 321장)

 

사무엘상,하는 한마디로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소견대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대’로를 뜻하는 것인데, (창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 타락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이 쓰여진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소돔성에도 적지만 의인은 있는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말씀을 따라사는 의인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나’라는 여성이죠. 그녀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각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일의 시작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녀가 부각된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심각한 결핍 때문이었죠. 당시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요, 죄악이라 여겼던 시대입니다. 인생에 답이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간구해서 얻는 아들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한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불임중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진짜 믿음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 말씀은 12-17절은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 18-21절은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22-26절은 다시 엘리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B-A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면서 한나와 사무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형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라는 말과 17절에 엘리의 두 아들이 “소년”이었을 떄는 동일한 단어가 쓰였습니다. 엘리의 아들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는 것이죠. 그들을 비교하며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지만 행실이 악한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레위기 7장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 나오는 것을 제사장으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구운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날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가져가라는 제사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혈통에 따라 합법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 바쳐져 성막에서 생활했고,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화려하게 짜여진 옷입니다. 이 옷은 한나가 남편이 순서에 따라 제사일을 하기 위해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지어입힌 옷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바친 엘가나와 한나를 위해 엘리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그들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출산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무명한 사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녀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엘가나와 한나가 그런 복을 받을 만큼 신실하게 살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복된 가문을 세우게 하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아무리 제도적 질서에 의해 부여받은 복과 은혜가 있더라도 그들 자신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무엘처럼 유능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들어 써서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진리는 이미 한나의 찬양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2장 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손에 붙들리어 사는 축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교만한 말과 행동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하나님께서 달아보실 때 말과 행동에 진실함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기도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신앙의 1대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엘가나와 한나가 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가까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죠. 오늘 하나님의 테스트에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교만이나 오만한 말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cb8b36sp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출생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환경이나 가문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과 가문을 변화시킬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유명한 대제사장 엘리보다 무명의 엘가나와 한나의 길을 선택하는 복된 반열을 선택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인도하소서.

 

 

 

 

 



(찬 382장)

 

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가 자신의 복음역사에 참예한 것을 칭찬하며, 마지막 문안 인사를 나누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고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칭찬을 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칭찬을 하는 걸까요?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의 쓸 것을 헌신적으로 보냈고,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난에도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15)에서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이 상황은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에 그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재정 지원에 동참했다는 것이고요, (16절)에서도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16)라고 한 것으로 보아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지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선교초기부터 바울과 교제하며 기도하고 쓸 것을 공급했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가 된 것은 바울이 선물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라(17)’고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밝힙고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중보기도와 헌금을 통한 복음사역에 동역한 것을 칭찬한 것은 자신이 선물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봉사의 열매가 풍성이 맺히길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열매가 될 것이요, 성도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칭찬으로 인해 더욱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고, 점점 더 복음이 전파되는 선순환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4)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했고요, 그 방법은 사랑 가운데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라고 성장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사도 바울', 렘브란트, 1635.



특히 (18)에 보면 바울이 내게는 모든 것이 풍부한데,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것을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바울만을 위함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전파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것이죠.

자 이제 빌립보서를 닫으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공동체에 축복을 선포합니다.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기서 ‘풍성한 대로’는 ‘그의 풍성을 따라’의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에게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인 거죠.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하셨고(시 24:1). 아까워서 조금씩 주시는 분이 이시요(약 1:5),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고(눅 12:32).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딤전 6:17).

 

자, 바울도 이렇게 축복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풍성하고 넉넉한 삶에 대해 축복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형편이 어렵고, 풍족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면 전도도 하고, 선교도 많이 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사용하면 될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보면, 우리는 더 많이 간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왜 하나님은 그렇게 결과가 뻔한 길이 있는데도, 성도들을 달아보시고, 재어보시고, 훈련하시고 연단만 많이 하실까요?

첫째는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죄성이 무섭고 파괴적입니다. 죄성이란 한마디로 휴발유와 같다고 할 수 있죠. 기존에 불 위에 부으면 확하고 크고 맹렬하게 일어나서 사고를 당하고, 가만히 부어놓고 불을 붙여도 똑같이 무섭게 불이 일어납니다. 죄성은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도 얼마든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타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간교하고 사악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안에 죄성이 가득찬 인간들에게 휴발유가 부어지듯 부어지면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이 타락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못 주시는 겁니다. 물질이나 풍족한 것에 도취되어 타락한 사람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재물을 맡기실 때되면 맡기시고, 사람을 맡기실 때가 되면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과 나라를 다스릴 때가 오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더 복이니까요.

 

왜 하나님은 물질적 풍성함보다 영적 풍성함을 많이 주실까요?

둘째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온실속에 화초란 말이 있지요? 온실속에 자란 화초는 쑥쑥 자라지요. 노지보다 잎사귀가 크고, 키도 크고, 열매도 사시사철 열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죠? 비닐이 벗겨지만 온실안은 정말 난장판이 되잖아요?

식물을 제대로 키우려면 비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뙤약볕과 가뭄을 견디며 자라나야 하잖아요? 맞습니다. 이렇게 노지에서 자란 채소나 곡식을 보면 벌써 향이 다르죠. 찐합니다. 실제로 약효를 조사해봐도 월등한 성분을 갖고 있고, 당도도 훨씬 더 높습니다.

(125)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조카나, 친척 동생쯤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물론 노예도 아니시고 아들도 대우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보세요.

 

(216)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를 이렇게 칭하십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렇게 존귀한 자들이니, 달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덥석덥석 주시지 않으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처럼 사랑하시니까, 한번 더 훈련하시고, 한번 더 기도하게 하시고, 한번 더 의지하게 하시고, 한번 더 주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훈련방식입니다.
훈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고, 궁창위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며, 부족함이 없어 온전함을 이루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신앙성장을 위해서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빌립보의 관계처럼 주안에서 돈독하고, 서로 돕고, 서로 중보기도하고, 연합하여 영혼구원의 사명을 완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또한 우리 빛을 세상 사람들을 향해 비추어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저들이 예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실제적인 헌신도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이라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당당히 승리해 나간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영혼구원과 함께,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되어야 이 모든 게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주님과 교제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꿔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단지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밀착하여 동행함으로서

바울과 같이 쓰임받고, 빌립보 교인들처럼 협력자가 되는 복과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빌립보서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어려운 중에도 하늘에 창고에 쌓아 하나님의 상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들어와 구원을 얻는 존귀한 일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주님, 승리에 도취되어 희생자의 헌신을 망각하는 자가 안 되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보고 간구하고 훈련받아 존귀하게 쓰임받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찬 312장)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가듯이, 인생에도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머지는 정리할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무적 용건을 다루는데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서 그를 파송한 교회에 감사를 표현하는 편지인데요.
우리는 바울이 이처럼 감사를 표명하면서도 사실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음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먼저 (8~10)까지 말씀 보면 바울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데요.
바울은 결론적으로 바른 삶과 정결한 삶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8,9)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것은 종교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일상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즉 평강을 인사말 쓸 정도로 중시했는데 바울은 이방인이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가 유대인이 되지 않더라도 내 가르침을 따르면 ‘평강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토록 반복하던 기쁨을 또 강조했습니다.


(10) “내가 크게 기뻐함은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빌립보의 성도들의 관심이 다시 싹텄기 때문인데요.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갇혀 있다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빌립보교회와 바울은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기가 전한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빌립보교회가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만나 그동안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신앙의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고 마치 봄에 다시 싹이 올라오듯 그 생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관심은 성도들의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진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11~13)까지는 ‘늘 깨어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들이 후원한 재정에 대해서는 큰 기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쓸 것은 직접 일을 조달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은 적극적으로 독려했지만 자기가 쓸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에 대한 감사 표현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이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신을 잘못 해석해서 ‘지금 많이 궁핍하지만 견디고 있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만이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는 겁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능력은 가난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유할 때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목적이었고 현재 어떤 환경에 처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사역을 못한 적도 없었고부유해서 자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만큼이나 부유함도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가난하다고 비굴하거나 낙심하거나, 자신을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유하다고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그 물질로 헛된 일에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의 균형이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한 태도말이에요.

 

 오늘은 김의수, 데이비드 서의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아내와 나 김우수는 처음. 결혼할 때 화려하게 출발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학대학에 갔고 약사가 되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나는 결혼할 때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이었으니 조건이 세상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혼집으로 32평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래도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장 최우선으로 보고 서로를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IVF에서 신앙 훈련하는 과정에서 만나 우리의 중심에 늘 하나님을 모셨다. 만약 아내가 세상적인 조건만 보고 나를 선택했다면 결혼 1년 만에 첫 딸이 장애아로 태어난 사건과 곧이어 시댁의 사업이 망해서 쪽방을 전전해야 했던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배달, 풀 뽑기, 전단지 돌리기 등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딸 치료비조차 벌어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을 아내는 격려하며 위로했다. 아내는 아픈 딸을 24시간 돌보느라 어렵게 공부한 약사 자격증을 쓰지 못하는 것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충분히 돈을 벌겠다고 뛰어나갈 만도 한데 아내는 그 좁은 집 안에서 내가 벌어오는 적은 돈에 자족하며 힘든 시절을 묵묵히 이겨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부부 가운데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위에 지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풍파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 위에 결혼해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좋은 스펙으로도 실업자가 될 수 있고 많은 돈도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모든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해 믿음의 반석 위에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가정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본질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그런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군사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상에 맞서는 자들입니다.

경제적 상황이 고려 대상일 수는 있지만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자기가 맡은 보직을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능력과 지혜와 모든 상황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힘들고 어려운 그런 조건에서도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존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도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평강의 샬롬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해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항상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균형을 잘 유지하고 지키는 성도로 살게 해주시옵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오늘 또 말씀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신 모든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나아가는 복되고 충성된 주님의 종들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저에게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Harold C. Harvey

 (찬 412장)

 

 어느 인생에게나 사는 동안 기뻐할 일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라고 건면하는 이유는 그 비결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관용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은 포용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한 것입니다.
 바울도 목회자로서 여러 동역자들과 성도와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맨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같이 다른 지체에게 약점과 문제가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을 때 우리는 그들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라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은 누구나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조건과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염려와 걱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아버지 이 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라라고 했는데요.
보통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 감사하지만 기도 응답의 확신 가운데 미리 감사함으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샬롬)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이 평강은 세상에서 사람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평강이 아니지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7절~9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하는 이 평강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이유로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천국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재철 목사님의 ‘사명자 반’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목회할 때 단군교 교주가 등록 교인이 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잠실의 본부 건물과 강화도의 수련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교주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신도들 앞에서 밝히고 자신이 창시한 단군교를 스스로 해체하였다. 그리고 잠실 본부 건물 맨 위층에 있던 단군교 성전을 폐쇄하기 위한 예배를 드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단군교 성전을 찾은 나는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재단 앞에서 단군교 성전이 주님의 집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나더러 재단에 걸려있는 단군 초상화를 떼어 옥상에서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한 일에 내가 단군교 성전을 방문할 때까지 여러 주가 지났지만 그는 그때까지 두려움으로 인해 단군 초상화를 스스로 떼내거나 폐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단 중앙에 걸려 있던 단군 초상화를 떼어낸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그에게서 건네받은 라이터로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 천연색 초상화는 한동안 푸른 불꽃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재로 변했다.

그의 바짓가랑이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초상화가 완전히 제가 되고 난 다음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군 초상화를 떼어내 불태우는 내게 혹시 무슨 화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제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족자에 진하지 않는 그 그림을 그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그동안 그의 시선이 그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시작하여 정해진 시간마다 그 그림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였으면서도 그 그림으로부터 혹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그토록 두려워한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느냐에 따라서 두려워할 수도 있고

염려로 휩싸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니 이 말씀을 가슴에 못 박듯이 깊이 새겨 넣으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https://www.youtube.com/watch?v=ON-K0M4KGMQ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넓고 위대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래는 성도로 살겠습니다.

성령님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도록 오늘 또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고요하게 하시고 평강이 있게 하시며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하루를 승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Claude Monet



(
찬 324장)

 

인간이 쌓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생활하고, 절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치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살지만 사관생도가 되면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어 주신 부활사건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던 그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한마디로 우리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성취를 알기에 자신은 부활에 대해 이미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말이죠. 아닙니다. 원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삶의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마치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으면, 차표만 간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는 서울역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순종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데 이 부활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자신은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이 땅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사탄의 세력과 전쟁중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이 상을 받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듯이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지만 부활의 소망에 동참한 이후로부터는 고난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본받아 복음과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예수님을 본으로 삼아 겸손히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일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출생과 업적,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며 교만히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결말은 (19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둘째 그들은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자들이다. 셋째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움을 받을 자들이요, 넷째는 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본삼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바울과 성도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이기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요, 그 예수님은 우리의 낮은 몸도 자기 영광의 광채와 같이 변하게 하실 분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이게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빌려 말씀하는 요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원수들과 세상의 운명은 반드시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바울과 초대교회와 같이 성도들은 원수 사탄의 공격대상이 되고, 세상에서 비난과 놀림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옹졸하며 편협적이며,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종교단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기독교야 말로 척결해야 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종교집단이라고 여기고 혐오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원수가 너희 집안에 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단순한 눈총에서부터 심각한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요,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과 통치에서 나온 것이요, 확정된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또 개인적으로 저 천국에 입성할 날을 고대하면서 세상에서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어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바울은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육체를 가진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1S0_-WVg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하늘에 시민권자이지만 아직 우리는 육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계속적으로 죄와 싸우고, 타락한 문화와 싸우고, 사탄과 영적 전쟁을 치루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달려 간 것처럼 우리도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직도 일어나 달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하고,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터이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싸우며, 근신하고 깨는 일에도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려서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를 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여정에 낙오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싸워 기필코 부르심의 상을 받은 승리자들이 됩시다. 함께 이 위대한 여정에 동역하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바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낮은 자일 수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자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와 영적 전쟁도 치러야 하고, 우리 삶에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야 하는 책임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 힘을 주소서! 강건함을 주소서!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시고,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하소서. 그래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부르심의 상을 받는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
찬 94장)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증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소서’같은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이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고, 나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자랑하길 원하는데, 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자랑만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육체는 곤고하고, 마음이 지쳤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썼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어떤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미 큰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커가는 것을 보고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자녀의 존재는 곧 부모의 기쁨인 것이죠. 그런데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힘든 인생 길도 견딜만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를 사고, 얻으면 잠시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 같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안에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직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1~3)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을 경계하라고 거듭 당부하며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을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며,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4~8)까지는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조건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조건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무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랑할만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해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가장 귀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죠. 거기에 견줄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바울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이기에 율법으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야라는 자랑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에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자랑스러워 하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탁월한 신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에 보면 바울 자신이 받은 의롭다는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중에 하나가 뭐죠? 바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보면 내 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는지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죄를 사했다는 쪽으로 가야 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실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서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8hjU_6z73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자신보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인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그분을 자랑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육체와 환경만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예수 그리스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로 사십시오. 그것이 복이요, 그것이 참된 승리의 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찬양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자랑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신실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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