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31장)

세상에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배우고 사람들을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네 가지가 있어요.
엎질러진 물, 시위를 떠난 화살, 흘러가 버린 시간, 내뱉은 말입니다.
특히 이 가운데 말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말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은 한 무명의 여인의 말을 통해서 성읍 백성이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서론이 되는 전반부를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베냐민 출신의 불량배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대적해서 일어났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이 세바를 따르게 됩니다. 다윗이 아마사에게 3일 이내에 유다 사람을 소집하게 했는데, 그 일이 지체되자 아비새에게 세바를 쫓게 합니다. 요합은 개인적 감정으로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인 후, 동생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쫓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바는 이스라엘 무리를 모아 벧마아가 아벨로 갑니다.
요압과 함께한 백성이 성벽을 헐려고 하자,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러 성을 멸하려는 이유를 묻습니다.
요압이 세바만 내주면 성을 헐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여인은 아벨 백성과 의논해서 세바의 머리를 배워서 요압에게 던진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3~14절)에서 요압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아마사를 죽이는 사이, 세바가 이스라엘 지파들 지역을 다니며 선동을 해서 무리를 모아 아벨성에 이르게 됐습니다.
세바가 ‘다윗과 나눌 분깃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는 연설로 다윗과 백성들을 이간질하자, 적지 않은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세바의 관심사는 나라의 평화와 백성이 하나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그저 자신의 분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를 따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동체 교회 안에서 우리의 말은 우리의 얻을 이익과 상관없이 정직하고 일관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15~16절)까지 내용은 요압은 아벨 성으로 가서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 성벽 밖에 성보다 더 큰 토성을 쌓았습니다.
토성을 통해서 성벽을 공격하고 성읍 안으로 진입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곧 진압 작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아벨 벤마가에서 협상 전문 여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인은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그 여인을 그저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소개했는데요 당시 모든 상황이 지혜롭지 않은 어리석은 것임을 고발하는 듯한 어감을 풍기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요압의 군대가 쳐들어올 수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여인이 나섰다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분별할 지혜와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에 보면,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매우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자신을 ‘여종’으로 낮추면서 대화를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지혜로운 말에는 바른 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청하는 자세, 오해없이 전하기 위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의 습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 성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벨성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요압은 자신은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다고 거듭 반복하며 부정하는데요.
여인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의 성을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을 삼키는 것이라고 신앙적 차원에서 설득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아벨 성을 공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요압 장군은 역모자 세 발을 내주면 성벽에서 떠나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여인은 백성을 설득해서 세바의 머리를 잘라 요압에게 던져 주었고, 요압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성은 협상의 기술 또는 화술를 뜻하는 ‘지혜 있는 여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성경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했지만, 이 여성은 진압군의 지휘관 요압에게 매우 논리적으로 평화적인 해결안을 제시하고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그녀는 세바의 반란군 때문에 아벨벧마가를 멸망시킨다면, 결국 다윗 왕정의 통일성에도 균열이 가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요압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요압은 이 여성의 설득에 동의하고 세바만 넘겨달라고 요구했죠. 이 여성은 다시 아벨벧마아가 백성을 설득하는 과제를 떠안고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렇게 중재 협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 그녀는 그 일을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결국 그녀의 설득이 통했고, 세바의 수급을 요압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동족 간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 여성은, 이야기의 전면에서 나서서 온갖 욕심과 속임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남성 등장 인물들보다 독자들인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벨성 백성 앞에 오직 지혜를 가지고 나아갔다”라고 돼 있는데요 그 지혜는 요압의 군대보다 강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진리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말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야 될 주님의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박영선 저자의 ‘인격의 제자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생각과 말입니다. 생각은 말을 결정하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말은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먼저 하는 행동입니다. 몸으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나타나는 첫 번째 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우리의 생각과 말에서 분명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고 박윤선 목사님은 자신을 찾아온 목사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목사님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기침을 하셨답니다. ‘하지 말라’ 이거죠 그러면 목사님들이 ‘싫어하시는구나’하고 말을 잊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다시 험담ㅇ을 하면 박윤석 목사님은 돌아앉으신답니다. 대단하죠? 그렇다고 여러분은 박 목사님의 이야기를 본받아 기침을 하거나 돌아앉고 그러지 마세요. 험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하지 마십시오.
“점심 먹었어?” 이런 식으로 지혜롭게 화제를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어가는 생명도 하나님 앞에 돌이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서 보면 지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요 특히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낮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내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또 (잠 4장 7절)에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내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라”


https://www.youtube.com/watch?v=zI9eNeHpIMY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는 허망한 최후를 맞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말로 하나님 기업의 소중함을 일깨운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성 전체에 생명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또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고 지혜로운 말을 해서 생명을 살리는 성도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밝히시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생명 살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세바가 허망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성읍을 살린 지혜로운 여인의 말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이 여인처럼 지혜롭게 하시고 명철의 지배를 받는 성도로 살게 해주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말과 생각 속에 지혜를 넣어주시고,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복된 말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말 하게 하시고, 남을 비난하거나 흠을 잡는 말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사람을 살리고 살리기 위하여 격려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참된 주님의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지혜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를 주실 것을 믿으며, 그 입술의 말이 지혜롭게 되기를 바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40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15) 말씀은 나발과 아비가일의 대조적인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비가일 같이 분노를 잠재우는 지혜로 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구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을 찾아온 아비가일이 땅에 엎드려 모든 죄악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간청한 내용을 보면

내 주여 원하건데 이 죄악을 나 곧 네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아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처럼 아비가일은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그 집안을 대표해서 다윗에게 사죄함으로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습니다. 나발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집단 남자들이 다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비가일은 잃은 집안 사람들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 나발이 이름의 뜻대로 미련한 자이므로 다윗이 복수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비가일의 사죄로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녀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기가 속한 집에서 일어난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고 사죄한 것은 그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의 범죄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중보자로서 사죄를 구함으로 이스라엘을 멸망해서 구원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겸손함으로 사죄하여 임박한 진노로부터 공동체를 구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나 다윗 스스로를 위해 선한 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보복을 멈추게 설득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어떤 이유든 이스라엘 백성을 학살하는 것은 나쁜 이미지로 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도망자의 처지이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에 걸맞는 처신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다윗을 설득했습니다.
다윗도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흥분하여 실수를 저지를 뻔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이 복수하는 일을 막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스라엘을 집멸하시려는 하나님을 설득한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분명한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57) 말씀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이 성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자 우리가 오늘 아비가일이 나발의 죄를 대신해서 다윗에게 사죄하여 집안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낸 것은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류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대속 행위로 많은 사람이 생명이 죽음에서 건짐받는 원리입니다.
다니엘도 보면 이스라엘의 민족의 죄를 마치 자기의 죄인 양 금식하며 간구하여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 많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영적 책임을 느끼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모든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파해 생명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들이 주님 앞에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중보해야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원수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중보자의 역할이 뭡니까 바로 다리를 놓는 사람 역할이죠.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중보자 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받으며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가일의 역할이고 신약 시대 성도가 맡은 복음 전령자의 역할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가 바로 아비가일처럼 우리를 통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될 불쌍한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일에 복음 전도자로 쓰임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아비가일처럼 사람을 살리는 중보자로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용서를 받으며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잘 놓아줄 수 있는 중보자로 우리가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아비가일처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할 수 있는 일에 지혜롭게 쓰임받는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의 가는 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감동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오늘도 주님 안에서 귀한 사명 잘 감당해 나아가는 승리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35)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이 오늘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까?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면 행복할까?’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런 것에 행복이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현대시대에서 사람들은 에고이즘(egoism),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꾀하며 살지만 오늘 전도자는 그것도 역시, 인생을 헛사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한번 뿐인 인생을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얻고, 더 즐거운 쾌락을 갈망합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지혜와 수고를 아끼지 않지요. 직장생활하는 사람의 목표는 뭡니까? 승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심을 내어 성과를 내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면서 승진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전도자는 권고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결국 죽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걸 놓고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여 기존의 창고가 모자랄 정도의 부를 쌓고는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자며 즐기자라고 기분 좋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 너의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너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거야 말로 허무 아닌가요?

 

전도자는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지나치게 수고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전도자는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허무한 일이라고 조언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후대에 물려줄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한탄합니다. 자신의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이 쌓은 재물을 물려받는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들이 많습니다. 부보가 쌓은 업적과 재산을 조건없이 물려받았는데, 그것이 결코 복이 되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역시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는 아버지 솔로몬에게 강력한 이스라엘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라를 제대로 경영할 능력이나 지혜가 없었는데다, 연륜이 많은 원로들의 조언보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말만 듣고 행동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게 되었고, 백성의 뜻을 외면함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경고한 것은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 2030 세대에서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흙수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라고 표현하죠. 2030 청춘들이 부모님의 연소득과 가정환경 등 출신 배경을 수저로 빗대 표현하는 방식이죠. 수저론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라는 영어 표현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안락한 금수저의 삶을 주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때로는 자녀의 학업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을 자청하고, 오직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자녀들에게 어떤 집안일도 시키지 않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게 과연 복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녀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로다” (21)

전도자는 자녀들에게 고생없는 편안한 삶을 위해, 가족이 누려야 할 현재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권고합니다.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3)

그럼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만들까요?
(24)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도다.”

 

마지막으로 (26)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는데요, 우리말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지식과 복을 주시지만 죄인에게는 온갖 노력으로 모으고 쌓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넘겨주게 하신다. 이것 또한 허무하고 뜬 구름 잡는 일이다.”

의인은 하나님께 지헤와 지식과 기쁨을 받고, 악인이 수고로 쌓은 재산은 하나님이 의인에게 넘겨주신다면서, 악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마치 바람을 손에 잡으려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의 앞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물려주려 애쓰십시오. 지혜롭지 못하면 어떤 재물도 그에게 복이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과도하게 일에 메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행복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흘러 넘치는 삶을 위해서인지 말입니다. 흘러넘치는 삶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때 나를 통해 흘러 넘치게 하는 삶입니다. 축복의 금고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지금 누리세요. 감사하세요. 또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흘러 넘치게 보낼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보십시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그 열심히 사는 이유가 불안 때문이라면 얼마나 불안정한 삶이겠습니까? 또 열심히 사는 이유가 나 잘 먹고 잘 사는 이유 때문이라면 역시 얼마나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부자 같겠습니까?
같은 인생을 살아도 헛된 삶이 있고, 가치있는 삶이 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아야 진짜 행복한 결말이 주어집니다. ’내 인생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봅시다. 특히 자녀들에게 하나님 없는 편안한 삶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살도록 신앙전수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에 지혜와 현명한 선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를 통해 주신 지혜로운 삶을 깨달았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누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신앙을 물려주는 깨어있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열심히 살되 행복을 포기할 만큼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주께서 주신 건강도 지키게 하옵소서.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OAtdzlUxN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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