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279장)

 

오늘부터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첫 시작은 “슬프다”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에카’인데, ‘아이고!’라는 뜻입니다. 고통과 슬픔, 놀라움을 표현하는 감탄사죠. 예레미야애가는 이 슬픔의 감탄사속에 전체 내용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과부로 비유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과부는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데요, 예루살렘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뽐내서 많은 나라에 존경을 받던 공주와도 같았는데, 이제는 과부처럼 처참한 신세로 떨어졌다는 것이죠. 유다는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 죽도록 수치를 당하며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노래지요. 그래서 슬픈 노래, 애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슬픈 애가의 무대 역할을 하는 첫장으로, 비참한 예루살렘의 현 모습과 참상을 당하게 된 이유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비탄속에서도 가져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처참하게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장을 여러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자가 과부로 표현되고, 공주가 강제 노동자로 전락한 격입니다. 삶의 환경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깨져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이 가슴을 치며 울어도 위로하는 이 하나 없고 전에는 절친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럽던 이스라엘의 도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성전에서 드리던 절기 제사들도 끊어졌고, 집도하던 제사장들도 탄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것도 단절되었으니, 예루살렘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 처한 것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저 울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대적들에게 짓밟히고 조롱거리가 된 것은 유다백성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악해서’였습니다. 그 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곤고함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힘없이 도망치는 백성들을 사냥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런 절망적이고, 패망적이고, 기운이 쭉 빠지는 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과 여호와의 돌보심을 간청했습니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망해버린 예루살렘성과 무너져 내린 성전 잔해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돌보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망해버린 남유다의 상황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시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한 자는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되며,

성도는 하나님의 품 외에는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죄악의 길은 처음에는 넓으나 마지막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며,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누리던 모든 축복과 영광도 동시에 사라지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가 평안한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 삶에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즉시,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혔을 때부터,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친밀하게 하고,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종교생활만 될 것이요, 아무 유익이나 성장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복을 다 받게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주는 샘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장27절)


https://www.youtube.com/watch?v=RLNmfDkAl-Q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친밀하게 사귐을 갖는 것이 성도에게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의 슬픈 노래를 보면서, 새 희망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 449장)

 

바른 교훈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바른 교훈이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이란 교회 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자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왜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했을까요? 교회안의 성도들이 각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고, 건강한 가정이 이뤄지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안의 다양한 부류의 성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요청했습니다. 먼저 나이가 든 남자들에게는 절제와 경건과 인내를, 젊은 남성들에게는 신중함을, 나이많은 여성도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고 경건한 몸가짐을 갖추는 것을, 젊은 여성도들은 잘 훈련받아 집안을 돌보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성도들이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 당시 복음과 상반되는 거짓된 교리로 성도들을 오염시켰는데요, 그들은 성도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보다 그저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고, 건강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고 작은 일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성도들은 일반 성도들을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행함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어떤 본을 보이라고 했을까요? 디도에게 책잡히지 않는 건전한 언어생활과 모든 선한 행동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을 먼저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교회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첫째는 목회자요, 둘째는 평신도 사역자와 교사들입니다.

그들이 바른 교훈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교회는 그저 말만 무성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요, 그들이 가르치려는 성경도 보잘것 없는 허접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일전에 기독교 신문에서 요즘 청년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조사한 통계를 봤는데요. 그 첫번째는 어른 성도들의 모순된 신앙생활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기독교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해 보니 부모나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삶이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믿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염증을 느낀 것이죠.

 

특히 요즘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야 할 정도의 삶은 되지 않게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이 귀중하다고 외쳐도, 성도들의 삶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는다면 복음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테니까요.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한다면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죠. 믿음과 행함은 따로 있지 않고 수레바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의 바퀴가 크고 행함이 적다든지, 행함은 크고 믿음은 적다든지 이건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약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성도는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고,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실함을 드러내지요. 그런데 믿음이 있다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이게 야고보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도에게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배우면 행할 것이다! 그럴 때 가정과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며,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도 바른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 교훈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 실천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뭐죠? 바로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네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 사랑이 곧 바른 교훈입니다.

오늘도 바른 교훈을 따르십시오. 이 교훈은 우리를 살릴 것이고, 가정을 든든히 세우며, 교회를 강하게 세우고,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것입니다.

인생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이 생명 살리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오늘도 바른 교훈, 즉 복음을 받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t6rZ46PC4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의 나이, 우리의 직분, 우리의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가정과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 전에 우리들이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저희를 바른 교훈을 실행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래서 가정을 든든히 세우고 교회를 강하게 세워가는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생명의 안내자가 되게 하옵소서.

 

 



(찬 31장)

세상에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배우고 사람들을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네 가지가 있어요.
엎질러진 물, 시위를 떠난 화살, 흘러가 버린 시간, 내뱉은 말입니다.
특히 이 가운데 말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말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은 한 무명의 여인의 말을 통해서 성읍 백성이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서론이 되는 전반부를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베냐민 출신의 불량배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대적해서 일어났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이 세바를 따르게 됩니다. 다윗이 아마사에게 3일 이내에 유다 사람을 소집하게 했는데, 그 일이 지체되자 아비새에게 세바를 쫓게 합니다. 요합은 개인적 감정으로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인 후, 동생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쫓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바는 이스라엘 무리를 모아 벧마아가 아벨로 갑니다.
요압과 함께한 백성이 성벽을 헐려고 하자,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러 성을 멸하려는 이유를 묻습니다.
요압이 세바만 내주면 성을 헐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여인은 아벨 백성과 의논해서 세바의 머리를 배워서 요압에게 던진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3~14절)에서 요압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아마사를 죽이는 사이, 세바가 이스라엘 지파들 지역을 다니며 선동을 해서 무리를 모아 아벨성에 이르게 됐습니다.
세바가 ‘다윗과 나눌 분깃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는 연설로 다윗과 백성들을 이간질하자, 적지 않은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세바의 관심사는 나라의 평화와 백성이 하나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그저 자신의 분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를 따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동체 교회 안에서 우리의 말은 우리의 얻을 이익과 상관없이 정직하고 일관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15~16절)까지 내용은 요압은 아벨 성으로 가서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 성벽 밖에 성보다 더 큰 토성을 쌓았습니다.
토성을 통해서 성벽을 공격하고 성읍 안으로 진입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곧 진압 작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아벨 벤마가에서 협상 전문 여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인은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그 여인을 그저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소개했는데요 당시 모든 상황이 지혜롭지 않은 어리석은 것임을 고발하는 듯한 어감을 풍기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요압의 군대가 쳐들어올 수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여인이 나섰다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분별할 지혜와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에 보면,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매우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자신을 ‘여종’으로 낮추면서 대화를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지혜로운 말에는 바른 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청하는 자세, 오해없이 전하기 위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의 습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 성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벨성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요압은 자신은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다고 거듭 반복하며 부정하는데요.
여인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의 성을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을 삼키는 것이라고 신앙적 차원에서 설득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아벨 성을 공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요압 장군은 역모자 세 발을 내주면 성벽에서 떠나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여인은 백성을 설득해서 세바의 머리를 잘라 요압에게 던져 주었고, 요압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성은 협상의 기술 또는 화술를 뜻하는 ‘지혜 있는 여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성경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했지만, 이 여성은 진압군의 지휘관 요압에게 매우 논리적으로 평화적인 해결안을 제시하고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그녀는 세바의 반란군 때문에 아벨벧마가를 멸망시킨다면, 결국 다윗 왕정의 통일성에도 균열이 가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요압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요압은 이 여성의 설득에 동의하고 세바만 넘겨달라고 요구했죠. 이 여성은 다시 아벨벧마아가 백성을 설득하는 과제를 떠안고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렇게 중재 협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 그녀는 그 일을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결국 그녀의 설득이 통했고, 세바의 수급을 요압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동족 간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 여성은, 이야기의 전면에서 나서서 온갖 욕심과 속임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남성 등장 인물들보다 독자들인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벨성 백성 앞에 오직 지혜를 가지고 나아갔다”라고 돼 있는데요 그 지혜는 요압의 군대보다 강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진리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말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야 될 주님의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박영선 저자의 ‘인격의 제자 훈련’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생각과 말입니다. 생각은 말을 결정하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말은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먼저 하는 행동입니다. 몸으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나타나는 첫 번째 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우리의 생각과 말에서 분명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고 박윤선 목사님은 자신을 찾아온 목사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목사님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기침을 하셨답니다. ‘하지 말라’ 이거죠 그러면 목사님들이 ‘싫어하시는구나’하고 말을 잊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다시 험담ㅇ을 하면 박윤석 목사님은 돌아앉으신답니다. 대단하죠? 그렇다고 여러분은 박 목사님의 이야기를 본받아 기침을 하거나 돌아앉고 그러지 마세요. 험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하지 마십시오.
“점심 먹었어?” 이런 식으로 지혜롭게 화제를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어가는 생명도 하나님 앞에 돌이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서 보면 지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요 특히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낮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내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또 (잠 4장 7절)에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내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라”


https://www.youtube.com/watch?v=zI9eNeHpIMY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는 허망한 최후를 맞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말로 하나님 기업의 소중함을 일깨운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성 전체에 생명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또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고 지혜로운 말을 해서 생명을 살리는 성도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밝히시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생명 살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세바가 허망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성읍을 살린 지혜로운 여인의 말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이 여인처럼 지혜롭게 하시고 명철의 지배를 받는 성도로 살게 해주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말과 생각 속에 지혜를 넣어주시고,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복된 말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말 하게 하시고, 남을 비난하거나 흠을 잡는 말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사람을 살리고 살리기 위하여 격려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참된 주님의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지혜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를 주실 것을 믿으며, 그 입술의 말이 지혜롭게 되기를 바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찬 310장)

 

 누가 강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 있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대지 않았는데 오늘 십 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엔게디 광야에서는 다윗의 사울을 피해 숨어 있었지만 십 광야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5절) 말씀까지 보면 사울은 이미 엔게디에서 다윗에게 항복을 선언했지만 십 사람들이 십 광야 앞 하길라산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광야를 샅샅이 다 뒤져서라도 다윗을 잡겠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더 이상 이전처럼 숨어있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정탐꾼을 보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울의 진영에 침투해서 정탐까지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아니라 사울에게 맞서는 왕이 되었고 군대와 군대 나라와 나라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다윗의 영토인 십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자기 군대가 다윗의 군대보다 규모만 클 뿐 사실상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이스라엘이 왕이 된 다윗은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나라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울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도피 경로


 이어서 (6~8절)까지 보면 다윗은 직접 적진에 침투해서 정탐하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아비새와 같은 용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의 군대의 용맹성입니다. 다윗의 군사는 약 600명 정도 되었는데요.
3천 명이나 되는 사울의 군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군대를 얕보아서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잠들었습니다. 군대 장관 아브넬과 군사들 역시 전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비새는 적진 중앙까지 들어가 창호로 사후를 땅에 꽂아 죽일 수 있다며 다윗에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우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다윗은 이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과 아비새


 왜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사울을 쳐서 죽게 하실 권한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시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사울을 죽여 원수 갚을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시험대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도록 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당하는 당사자임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상황을 인식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신앙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를 상고하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앞두시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하신 기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성도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요 성도는 강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약한 자이지만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함이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과정에는 정치적인 모략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두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쓰임받는 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oFAz1UHRI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의 뜻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주님, 우리도 오늘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한 믿음과 강한 생각과 강한 생각을 허락하여 주셔서 이길 수 없는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로 호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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