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찬 150장)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오전 9시경부터 3시간에 걸쳐서 참기 힘든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역설적이기에도 가장 고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었으며 인류에게 가장 큰 소망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에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에 이미 영혼은 떠났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권한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고난의 과정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오롯이 감당하신 것이지요.

왜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생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아시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며 공감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손톱 밑 가시가 남의 큰 병보다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 그분께 그 고통을 낱낱이 아뢰 보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주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주님이 다 헤아려 주시고 참된 위로로 우리를 지니 만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까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고난이 실패가 아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과 문제만 바라볼 때는 시련을 왜 주셨는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때로는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난 없이 평탄하고 안락한 삶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안락한 삶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아가지요.
하지만 십자가는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섭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아들 예수님께 허용하셨고 고통이 아니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은혜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 습관과 이기적 자아로 인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고난과 실현을 통해서 다듬어 오셨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넓은 폭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문에 낙심할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아름다운 성품을 갖도록 우리를 빚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 보이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 보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상처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권한이 나의 권한이 되었고 십자가의 은혜가 나의 은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그리고 공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까지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문제가 있을 때 상황이 너무 힘들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까지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괴로울 때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모든 고난과 문제를 극복하여 이기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kS_MgZ7NA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해서 위로받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아픔까지도 충분히 공감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신 주님 우리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잘 지고 결국 구원의 승리에 이룰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오늘 또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게 하시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무엘상 30장,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더 이 문구가 와 닿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사흘 만에 자신들의 거처인 시글라고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성읍은 불타버렸고 아내와 자녀들은 아말렉에게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기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격분에 다윗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다윗을 지도자로 믿고 따른 결과가 너무 참담해 이성을 상실했던 것이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의 잘못이 아닌데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20장)에서 마치 출에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자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속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가족을 찾을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절망을 심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타인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위기와 슬픈 일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꺾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어서 큰 슬픔과 위기 앞에서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절망한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했지만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에봇이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비아달은 사울과 에돔 사람 도엑에 의해 제사장들이 멸절 당할 때 에봇을 입은 채 다윗에게 도망해 계속 함께했던 사람이죠.
사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녔기에 성전을 찾을 수도, 제사장을 만날 수도 없었고 다만 애봇을 입고 성전에서 섬기던 아비아달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응답하셔서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즉시 아말렉을 추격하지만 그중 탈진한 자 200명은 머물게 하고 400명만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금식을 선포했던 사울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거창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문제가 있고 없고 차이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성도는 다윗과 같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용기를 얻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 또한 그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므로 문제 해결의 열쇄도 하나님이 예비하셨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당하게 하시고 위기에 처했을 때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들은 주권자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주실 것을 믿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와 함께 하시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어떤 슬픔과 위기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닥친 슬픔과 위기는 무엇입니까 성도에게 닥치는 위기가 한편으로는 기회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고난과 위기 속에서 처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확신하고 언제나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도 슬픔과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e4dY15yi8M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큰 슬픔과 위기를 당했지만 다윗은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오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모든 슬픔과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명철하게 하셔서 복된 선택을 하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오늘 다윗이 버려진 종을 만나서 길을 찾게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은혜와 만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 우리를 인도하시고 복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
찬 310장)

 

 누가 강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 있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대지 않았는데 오늘 십 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엔게디 광야에서는 다윗의 사울을 피해 숨어 있었지만 십 광야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5절) 말씀까지 보면 사울은 이미 엔게디에서 다윗에게 항복을 선언했지만 십 사람들이 십 광야 앞 하길라산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광야를 샅샅이 다 뒤져서라도 다윗을 잡겠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더 이상 이전처럼 숨어있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정탐꾼을 보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울의 진영에 침투해서 정탐까지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아니라 사울에게 맞서는 왕이 되었고 군대와 군대 나라와 나라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다윗의 영토인 십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자기 군대가 다윗의 군대보다 규모만 클 뿐 사실상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이스라엘이 왕이 된 다윗은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나라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울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도피 경로


 이어서 (6~8절)까지 보면 다윗은 직접 적진에 침투해서 정탐하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아비새와 같은 용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의 군대의 용맹성입니다. 다윗의 군사는 약 600명 정도 되었는데요.
3천 명이나 되는 사울의 군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군대를 얕보아서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잠들었습니다. 군대 장관 아브넬과 군사들 역시 전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비새는 적진 중앙까지 들어가 창호로 사후를 땅에 꽂아 죽일 수 있다며 다윗에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우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다윗은 이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과 아비새


 왜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사울을 쳐서 죽게 하실 권한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시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사울을 죽여 원수 갚을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시험대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도록 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당하는 당사자임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상황을 인식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신앙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를 상고하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앞두시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하신 기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성도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요 성도는 강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약한 자이지만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함이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과정에는 정치적인 모략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두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쓰임받는 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oFAz1UHRI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의 뜻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주님, 우리도 오늘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약하지만 강한 믿음과 강한 생각과 강한 생각을 허락하여 주셔서 이길 수 없는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로 호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찬 268장)

 세상에는 무모한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모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도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데요.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 가족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도발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도엑과 아비아달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선택했고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 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 봅니다.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도엑

 오늘 우리는 먼저 사울을 택한 도엑을 보겠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작은 호의까지도 자신에 대한 배신 행위로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의중을 알았던 도엑은 사울이 원하는 대로 아이멜렉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도엑게 보고를 듣고 분노가 끌어오른 사울은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해 다윗과 공모한 사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무리 중 누구도 사후를 대적하려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모든 제사장 무리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도엑이 그 명령을 따라 제사장 무리를 학살했습니다.
도엑은 철저히 악한 권력자의 입맛에 자기를 맞춤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편에 섬으로써 앞날의 부귀 영화가 보장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득에만 몰두해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뿐입니다.

 잠언은 ‘악인이 서로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고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을 자랑하는 악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선한 행위로 맞서야 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에게로 도망친 아비아달

 이어서 다윗을 택한 아비아달의 모습을 살펴보겠는데요.
제사장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단 한 사람 아비아달만이 도망쳐 나와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다윗을 찾아갔는데요. 다윗은 사울이 저지른 악행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을 안심시키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겸손함과 배려를 보면서 그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정당성을 갖도록 끝까지 협력했습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왔을 당시 다윗은 큰 세력을 갖춘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라한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다윗을 선택했고 그 결과 진리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참된 성공과 승리하는 삶에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따르라고 교훈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홀로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섬기는 지체와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 서로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받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잠 2장 20~22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아기는 땅에서 끊어지게 했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더 복된 선택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며 함께하고자 합니다. 악한 권력자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도 그를 가까이 하면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은 곧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체들과 함께 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군중의 길이 아니라 바로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믿음의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기도드립니다.
 성령님, 저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령님, 저희를 이끄셔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그들을 잘 따라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땅의 약속과 진정한 성공과 승리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모두 주님의 진정한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오늘 삶에도 어떠한 상황에 서든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시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거룩한 길 끝까지 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보존시켜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Claude Monet



(
찬 324장)

 

인간이 쌓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생활하고, 절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치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살지만 사관생도가 되면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어 주신 부활사건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던 그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한마디로 우리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성취를 알기에 자신은 부활에 대해 이미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말이죠. 아닙니다. 원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삶의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마치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으면, 차표만 간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는 서울역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순종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데 이 부활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자신은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이 땅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사탄의 세력과 전쟁중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이 상을 받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듯이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지만 부활의 소망에 동참한 이후로부터는 고난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본받아 복음과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예수님을 본으로 삼아 겸손히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일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출생과 업적,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며 교만히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결말은 (19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둘째 그들은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자들이다. 셋째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움을 받을 자들이요, 넷째는 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본삼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바울과 성도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이기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요, 그 예수님은 우리의 낮은 몸도 자기 영광의 광채와 같이 변하게 하실 분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이게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빌려 말씀하는 요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원수들과 세상의 운명은 반드시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바울과 초대교회와 같이 성도들은 원수 사탄의 공격대상이 되고, 세상에서 비난과 놀림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옹졸하며 편협적이며,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종교단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기독교야 말로 척결해야 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종교집단이라고 여기고 혐오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원수가 너희 집안에 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단순한 눈총에서부터 심각한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요,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과 통치에서 나온 것이요, 확정된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또 개인적으로 저 천국에 입성할 날을 고대하면서 세상에서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어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바울은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육체를 가진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1S0_-WVg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하늘에 시민권자이지만 아직 우리는 육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계속적으로 죄와 싸우고, 타락한 문화와 싸우고, 사탄과 영적 전쟁을 치루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달려 간 것처럼 우리도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직도 일어나 달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하고,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터이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싸우며, 근신하고 깨는 일에도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려서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를 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여정에 낙오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싸워 기필코 부르심의 상을 받은 승리자들이 됩시다. 함께 이 위대한 여정에 동역하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바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낮은 자일 수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자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와 영적 전쟁도 치러야 하고, 우리 삶에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야 하는 책임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 힘을 주소서! 강건함을 주소서!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시고,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하소서. 그래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부르심의 상을 받는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찬 93장)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제 때에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아무리 봐도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인데도 그분은 마치 기도를 전혀 안 들으신 것처럼 침묵해 버리십니다. 이럴 때 의심과 실망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반응하는 아닙니다. 일반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은 그런 자세를 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원어성경 번역본에는 ‘꾸준히’라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를 계속하며 꾸준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어느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셨을 때는 너무나 그 응답이 신속하고 놀라워서 자신을 멸망의 웅덩이와 진흙탕이라는 밑바닥에서 높은 반석위까지 끌어올리셨고, 자주 넘어지는 발걸음을 든든하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응답과정은 마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슈욱하고 올라가는 것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끌어올려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또한 신기한 것은 자신의 입에 올려드릴 new song, 새 노래까지도 하나님이 자신의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꾸준히 기다린 것밖에는 없습니다. 응답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바람한 점는 날 돗대를 올린 뱃사공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는 너무나 강력하여,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도 의지할 마음을 갖게 하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에서 이렇게 결론을 미리 내립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NIV 영어성경에서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who turn aside to false gods”

‘거짓 신들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서 내려오고, 거짓된 신들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십시오. 또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탄의 말에 속어 넘어가지 않도록, 늘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유지하십시오. 또한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기도로 아뢰고, 꾸준하게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놀랍도록 응답하시며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시편 기자인 다윗은 (4-10)까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5)에 이 고백의 핵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도무지 헤아려 보거나 세어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눈가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별 중에 하나를 보고 말하는 겄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죠.

 

(적)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 여러분, 구름 뒤에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저편에 가려져 빛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은 믿으면서도 내 현실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섭리의 손길을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꾸준히 기도하고, 꾸준히 겸손하고, 꾸준히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하루인 줄 알고

믿고 기대하며, 힘차고 행복하게 시작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ctp-3tHEM

 

https://www.youtube.com/watch?v=CjS9fcfkHlU 

(찬 330)

 

사람이 한두 번은 성실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실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뛰어난 재능보다 성실함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보면 토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이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요셉에게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기근은 더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생명을 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요셉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요셉은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기근은 고대근동 지역에 임했고,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 곡식 창고의 출입(出入)을 관장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팔았고,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대 왕국 체계에서 토지 국유화를 의미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성읍 여러 곳에 분산시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이 애굽 왕실의 소작농처럼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왕이 모든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우리가 요셉의 일 처리와 그의 태도를 보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은 이 모든 거대한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돌려 자기 배만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 일관적으로 성실했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큰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려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3)”고 하였고,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고(286),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2810).”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6)에서 종들아, 성실하게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고, (3)에서는 윗 사람들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에서 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자기 일에 성실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셉의 성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셉의 성실함을 우리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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