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254장)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은 추락하며 떨어질 때보다 승승장구하며 올라갈 때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짜 큰 죄는 승승장구할 때 범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가 점점 더 부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다윗과 백성들은 영적으로 게을러 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성공에 취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한참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매서운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깨닫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1절)은 말씀합니다. 정확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승승장구하다 보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라의 총 인구조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격동시키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윗은 결심한 대로 군대장관 요압을 불러 전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이 백 배나 더하게 하실 백성의 수를 왜 헤아립니까?’라고 반대했지만, 왕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따라 9개월 20일간 인구조사를 한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에서 칼을 뺄 수 있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남유다 사람이 오십만명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야 자책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10절)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그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년 기근과 석달 동안 대적에게 쫓기는 것과 사흘 동안 전염병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손에 쫓기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이 복이 될까요?
여러가지로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왜 다윗의 인구조사는 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말씀의 적용이 명확해 집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예전에도 여러번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다윗의 인구조사가 하나님의 재앙을 불러왔을까요?


사실은 인구조사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실체의 핵심은 다윗의 교만입니다.

다윗은 나라가 든든히 서고, 왕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고, 전쟁마다 이기고, 자신이 명령을 받드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신앙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잘 했으니 이 정도가 됐지?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업적을 이루었겠는가?’ 내심 이런 자만이 차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의 속내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대입시켜 다윗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게 하고 징계하시고자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길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고 자신을 높이는 영웅심리에서 내려오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로 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다윗왕



 우리도 살다보면 어떤 신자는 큰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는 듯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평안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에 인색하고, 봉사도 안 해도 하는 일만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작은 죄를 지은 것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사사껀껀 간섭하시고 들어오십니다. 목회자가 보기에 이런 죄들은 회개했으니까 그냥 넘어가셔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냉혹하게 다루십니다.

어떤 신자는 왜 큰 죄에 빠져도 그냥 넘어가시지만, 어떤 신자는 여러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징계하실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다른 나라들은 타락해도 하나님께서 촘촘하게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족속도 그들의 죄가 차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에게는 혹독하십니다. 광야 40년을 보면 물없다고 원망하면 징계하시고, 모세에게 불평하면 징계하시고, 조금만 잘못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는 타락해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게서 태어나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나라들을 이끄는 영적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다른 나라면 몰라도 이스라엘은 타락하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위태롭습니다. 실로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왕의 지팡이가 내려가서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nPprpefnc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다고, 하나님의 징계가 많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타락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고, 당신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할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고 많은 것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미운 아이에게는 떡하나 주지만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댄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지만 내 자식이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이와 같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자신에게 유독 고난이 많고, 어려움이 많다면, 하나님께서 작은 죄라도 심상히 여기지 않는다고 여기신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낮추시고 훈련하시고, 징계하신다면 다윗의 사명이 있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며, 주님의 복음을 지켜야 할 등불의 사명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등불의 사명이 있음을 알고,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을 따를 것이냐 이것은 우리 삶에 늘 주어지는 숙제와 같은 것이지요.
엔게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사울이 왜 왕자에서 쫓겨났는지를 드러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했고 사람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13~16절) 말씀에서는 다윗은 사울의 진영과 거리를 확보한 이후에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다윗이 자기를 부르고 있음에도 왕을 부른다고 착각했고 또 그가 다윗인지도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군대 장관으로서 아브넬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다윗도 아브넬이 사울을 수행하는 군대 장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명 아브넬은 용사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능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할 만한 자였습니다(15절)
그런데 그가 모시는 왕 사울을 지키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는 죽음으로서 책임을 져야 마땅한 큰 잘못이라고 다윗이 말했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용사였던 아브넬이라고 해도 사울을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유능하고 강하다고 해도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그 생명을 유지하고 승승장구했지만 사람을 의지했던 사울은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도 이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17~20절)까지 보면 아브넬과 달리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곧장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다윗이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엔게디 사건과 유사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헤아려 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야 옳겠지만 이것이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십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찾아 나선 것이므로 다윗이 지적한 대로 사울왕은 사람의 말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람들의 말을 따라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를 죽이려는 시도를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을 듣고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패망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1~25절)까지 보면 사울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다시는 그 생명을 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또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을 돌려주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생명을 다윗의 처분 아래 두셨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다윗 편에 서 계시기에 다윗은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겼듯 하나님도 자기 생명을 중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24절)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던 다윗은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 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야말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Wq47o1-mI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몇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현직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힘과 평판을 의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왕이 결코 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오늘 또 내가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될 그 뜻은 무엇인지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또 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 귀한 삶에 승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살아계신 우리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사람을 따르는 사울왕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사람이 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주님,저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사람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과 역할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또 기뻐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입으며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축복된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49장)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행위를 망령되다라고 일컫고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망령대 행하지 말고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린 사울에게 망령되이 행했다며 책망했습니다.
사울은 막강한 블렛의 군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패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주목했고요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잠언 29장 25절)에 보면 지혜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종국에는 승리와 생명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새롭게 세워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지도자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왕이 아니라 부족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떠나간 후에 사울은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했는데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스스로 번제를 드렸지만 이제 남은 백성은 600명뿐이었습니다. 사울이 남은 백성을 개소한 것은 새로운 전술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만나는 위기 앞에서 나의 지식이나 경험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야말로 개인과 가정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식임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21절)에 보면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는 철공이 없어서 쇠로된 도구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의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블레셋 사람들이 철공 기술을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에 그 기술이 전수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기자는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는 블렛의 사람들의 말을 언급하면서 철공 기술 전술을 철저히 차단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무기와 관련 없는 농기구만 수리해 주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의 땅에 농기구를 벼리러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지금 군사적 대치 상황에 있는 본문과는 달리 불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평화롭게 왕래하던 시기가 상당 기간 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그들과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은 바로 그들과 타협하고 공존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과 타협하고 공존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신앙보다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큰 위기로 지금 닥쳐온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결국에는 타협과 공존이 큰 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질서에 동화되거나 타협하며 지배받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무기에도 절대적으로 열세였고요 블레셋 군대는 창이나 칼 같은 철제 무기로 무장했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철제 무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워 이길 승산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셔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힘과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자기가 연약하고 상황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도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요. 믿음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을 아름답고 복되게 바꿔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위기는 절대 위기가 되지 못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DXhIElTluU

 

 말씀의 결론입니다.

 위기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때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상황을 통제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지혜를 쏟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나아간다면 우리 생활은 기쁠 것이고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며 우리의 모든 삶은 위기 앞에서 기회로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모든 위기를 역전시키시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위태롭고 위험하고 두렵고 걱정되는 그런 상황과 현실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신뢰하고 나아갈 때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십시오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고 위기를 잘 지혜롭게 풀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들어야 될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깨닫고 순종하며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될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그 일을 시작하게 하시옵소서.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사오니 그 말에 순종하겠습습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찬 365장)

인생을 살다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울 역시 그러한 순간에 맞닥뜨렸습니다. 그가 맞서야 될 블레셋 군대는 너무나 강력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불순종을 선택함으로써 믿음을 지키는 데 실패하게 되는데요.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다스린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블레셋 위협에 대응해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소집된 군사의 수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이 된 후 첫 번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전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7절)까지 내용을 보면 사울은 상비군을 3천 명 두었는데 그중에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나머지 천 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보냅니다. 요나단이 군대를 데리고 블레셋의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자 블레셋이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주둔하던 길갈에 모여 싸움을 준비했는데 수적으로 열쇠가 너무 극심했습니다.
5절에 보면 블레셋의 군대 규모를 볼 수 있는데요. “병거가 3만(전차가 3만대), 마병이 6천(말을 타는 기병이 6천), 백성은 해변에 모래같이 많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대규모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 온 것입니다.
싸우기 위해 모인 백성은 블레의 군대 위용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굴과 수풀 바위틈과 웅덩이에 숨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길갈 진영에 남았습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큰 일을 목도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단 말입니다.

(8~9절)까지는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무엘이 길갈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이레를 기다리라고 했고 사울은 그의 말을 따라 급박한 가운데서도 이레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도착이 지체되자 백성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칭 제사장이 되어 번제를 번재를 드리고 맙니다. 이 상황만 보면 사울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마저 드는 대목입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울은 그 모든 상황에서 순종보다는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패하면 패하리라 또는 죽으면 죽으리라 이런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때인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10~11절) 섣부른 변명을 하는 사울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오늘 공교롭게도 사울이 번제를 바친 바로 그때 사무엘이 도착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고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왜 그랬는지를 해명하게 되는데요. 백성은 겁을 먹고 흩어지고 사무엘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고 블레셋의 공격은 임박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번죄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 상황 윤리를 적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란 무엇일까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각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맞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신속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이 사울의 상황 논리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3RBHWXVKg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진리는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상황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 순종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와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끝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지하고

융통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도우시리라는 그릇된 믿음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길을 여쭙고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상황 윤리가 아니라 주님의 절대적 진리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도 적용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융통성은 순종이 아닙니다.

융통성을 하나님 말씀 앞에 발휘하지 않게 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순종하며 주님께서 나아가실 때 우리의 길을 여시고 복된 삶을 펼쳐줄 것을 믿습니다.
오늘 또 융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