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351장)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고민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22,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나은지, 사는 것이 나은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사는 것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위해서는 자신이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개인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 즉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은 하나님나라 천국백성으로써 천국의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음으로 서 있다라는 표현은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앞둔 군사들이 우와 열을 맞춰 전쟁터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협력하다’를 NIV성경에서 컨텐딩 애즈 원 맨 contending as one man’.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되어 함께 싸우는 모습이 천국 백성의 합당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리더는 바울이죠. 그런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사로 잡혀간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경제적 문제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감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습관에 잡혀 있습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오늘도 집요하게 사로잡힐 만한 문제들로 단단히 결박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마귀가 바라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힘을 잃고 더 이상 일어나길 포기하길 원합니다. 기도생활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간계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마귀를 대적하여서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나가 되어 싸우라는 것입니다.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둘째, 무슨 일에든지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28)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마귀가 성도들을 가장 잘 넘어지게 하는 비결은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두려움일 것입니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술은 뭘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죠.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요? 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겁을 먹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이긴 것이나 진배가 없게 되겠죠.

우리가 자주 환경을 바라보고, 내 약한 몸을 바라보고 한숨이 터져나오고, 이제 무엇을 하겠나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려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하겠나 주저 앉고 싶을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어느 것도 하기 싫을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요,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입니다.

(14)에서 홍해 앞에서 두려워 하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본문 (2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믿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

또 이 부분을 새번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kQ3Z6w3_U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어떻게 하면 고난이 특권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질병이 있습니까? 그 질병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가난이 있습니까? 역시 그 가난이라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실패가 있습니까? 역시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돼죠? ”주님,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즉 싸우는 것이다. 이단들과 세상의 헛된 지식과 타락한 문화와, 우리를 사로잡고, 두렵게 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협력합시다. 그리고 당당히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함께 하실 것이요, 우리를 당신의 오른 팔로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바울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만났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뜨거움을 주시고, 협력하는 마음을 주셔서 세상과 마귀와 싸우기 위해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 이미 이긴 싸움이니, 끝까지 밀고 전진하게 하소서.

 

 

 

 

(29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윗사람이나 권세자들을 따라야 할까요? 그들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항거해야 할까요? 오늘은 전도서 8장 말씀을 통해 권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침 받겠습니다.

1절은 8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인데요.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기를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라고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알기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이치에 맞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스테반 집사가 하늘을 우러러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하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마음에 샬롬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얼굴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미소가 있고,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79)의 말씀대로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합니다.”
지금 일어난 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노를 발한다고 말씀합니다.

 

(2)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왕이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29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백성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말하는데요,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질서요,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으면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질서요,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에 보세요. 새번역 왕이 싫어하는 일은 고집하지 말고, 왕 앞에서는 물러나거라
자기 상식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해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급히 물러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요?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당시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여탈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복형이었던 아도니아가 제단 뿔을 잡고 살려 달라고 해서 살렸는데, 아버지 다윗왕을 모셨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하죠. 이것은 반역의 있는 행동이었죠. 그래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처단합니다.

이처럼 당시 왕의 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알지요.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잘 지킵니다. 지혜로운 자는 왕의 명령이 거북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요, 왕을 배반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안전하고, 화를 당하지 않으며,
(5) 보세요.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신하가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 바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5절 하반부)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잘 분별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이죠.
지혜롭게 왕의 명령을 분별했던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는데,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의 제사에서 온 것을 알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부하죠? 열흘동안 채식과 물을 먹으며 시험을 해보라 합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윤택한 것을 보고 넘어가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대처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6)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7)을 봅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하죠.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 시므이가 온갖 악독한 말로 다윗의 심장을 찢어놓습니다. 시므이를 다윗은 용서해주었지만, 솔로몬 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 죽임을 당합니다. 시므이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입니다.
시므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할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사람을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까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대처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소결론은 (9)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무시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때는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권세를 인정하고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권세자의 권위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 시대에는 왕이 없는데 말이죠.

보세요. 하나님은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를 세우셨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권위를 주셨며, 직장에 가면 사장에게 권위가 주셨으며, 교회에 가면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자녀가 보기에 부모가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사장님, 심지어 목회자도 부족한 점을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전도자는 부모를 거역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머리위에 기름을 바르셔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십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자를 따르십시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주안에서 따르십시오.

 

 나라의 지도자든지, 교회의 지도자든지, 가족의 어른이든지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이며,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도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모요, 윗 사람이 되었다면, 그 권위를 가지고 함부러 남용하거나, 기만을 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직위를 주셨을 때, 선한 기회인 줄 알고 잘 사용해서, 옳은대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에 광채가 빛나게 하시고, 만사에 시기와 때가 있음을 알고 잘 분변하게 하시며, 권위아래 있으면 순응하고 잘 따르는 자 되게 하시고, 권위를 가진 자가 되었으면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어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6iSM1X9dKZk

 

 

 

(찬 407)

 

살아볼수록 인생은 허무하죠. 과연 인생의 허무는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의미있는 인생이 살아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을 경외를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내용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물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찾으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3)을 해석하며,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뜻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중히 살피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자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에 극에 달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고 말씀하셨고,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16,1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 시대나, 이사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더 둔감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못하면 즉시 치셨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기에 더 죄를 가벼히 여기고, 더 만홀히 여깁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참된 경외와 경건의 자세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본문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여기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앞에두고 하는 말도 천박하거나 경박하면 모독이 되는데,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죄요, 입술로 범죄하는 악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허물은 점점 늘어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랍시고 아무 말이나 막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하며, 인도하심을 구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하는 것보다, 자주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는 보배로운 향기와 같습니다.

(58)에 보세요.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8)에 보면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들과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외형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러 말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뱉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실수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말을 되도록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향연을 더 많이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얼마나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실수가 많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외적 경건을 기본으로 두고, 내적 경건함이 더해지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따라서 감정이나 기분으로 말하기 보다 믿음으로 말하고, 또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향기로운 향기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성령님, 할 말을 우리 생각과 입에 담아주시옵소서.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송가 446)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거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지 이런 허무감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커(Michael Steger)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 질병, 예술 작품, 결혼 등에서 의미를 찾듯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부터 전도서 말씀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전도자는 인생이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처럼 허무함을 부르짖는 전도자의 모습은 마치 세상을 비관하는 회의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의주의에 빠진 불신자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애하는 전도자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평가한 이유가 뭘까요.

 

오늘 말씀은 전도서 11절부터 11절입니다.
우리나라 민속 신앙에는 십장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물상은 해, , , ,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 사슴, 또는 대나무입니다. 이 모두가 장수물이므로 자연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시문이나 그림, 조각 등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요.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장생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장수를 간절히 꿈꿀 만큼 철저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오히려 방증합니다.

전도자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땅은 지속되지만 우리 인간은 계속 죽고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은 머무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월도 화살같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한껏 자신의 젊음을 자랑하던 사람도 돌아서면 어느새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게 되지요.
그리고 한 번 지나가 버린 세대를 그다음 세대가 제대로 기억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왜 이토록 유한한 인간의 허무함을 강조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함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답을 발견하라고 도전하는 메시지인 것이죠.

 

많은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른 채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영생의 진리와 복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자는 묻습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가 도대체 무슨 보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강물이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결코 바다를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죠.
그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로 원하는 사업도 해보았습니다. 궁전도 지어 보고, 포도원도 마련하고, 동산과 정원도 가꿔 보았습니다. 그 수고를 통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고 사람들의 칭송도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그 칭송도 그의 귀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의 수고와 업적 중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하지만 사람들의 엄청난 업적 역시 과거에 누군가가 발견하거나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방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가르쳐 줍니다.
만족 없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삶을 힘있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덧없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와 소망을 일깨워주신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인생이 참 허무하고 너무 빨리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의미를 쫓아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여건과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주신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시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549)

오늘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마지막에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NT5cnQqRw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가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고, 세겜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벧엘로 떠나야 했고, 요셉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줌으써,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게 됩니다.

 

(12~16)에는 야곱이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언약의 축복을 전수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 머리에 올리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팔을 교차하면서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위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얹고 축복했습니다.

지금 야곱의 두 손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 축복은 요셉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세상에서 번성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번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변함없이 주셨던 축복이며, 또한 자기가 집을 떠나야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빌어준 복이기도 했습니다.

(17~22)의 내용은 야곱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잘못 알고 손을 올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른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에브라임을, 왼손에 므낫세를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만한데도 그의 지혜는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장자로 선택하셨고, 라반보다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먼저 선택하여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므낫세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인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같고 므낫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했으며, 두 손자의 후손 역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떠나지 않으셔서, 때가 차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세겜 땅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야곱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나, 실현되었고요, 이후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을 좀 보세요. 어릴적이나 청년 시절에 지혜가 없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기회를 낭비했던 모습은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을 통해 징계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성장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영적 혜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과 영적 혜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께 지혜를 얻고, 영적 혜안이 열려서,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복된 어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온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와 보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성장해서 마침내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도 반복되는 일상이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에,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도 점점 성장하여 말년에는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어른이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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