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번민',1459.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에게도 너무나 괴롭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했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예수님이 더욱더 크게 괴로워하신 것은 일시적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 역시 그 큰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먼저 (36~39절)까지 보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요.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느끼는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 고통과 범민도 몸소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과 죽음을 앞두고 괴로움 가운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진솔하게 밝히시며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요청하셨는데요.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가능하다면 잔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호소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것이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할 수 있는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더욱 깨어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40~44절) 말씀은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워서 사력을 다해 기도하셨는데 제자들은 근처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자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아마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는데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안타까운 마음이죠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들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신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반복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선한 목자같이 제자들을 돌보시며 지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 괴롭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기도로 견뎌내시면서도 제자들을 진정한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고 오늘도 당신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어서 (45 ~ 50절)은 성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기도를 다 마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팔아넘길 가려 누다가 가까이 왔음을 인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도망하거나 피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높고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 피할 길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완전한 순종을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각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대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완전한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놀랍고 위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한이 없지만 우리는 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실망하게 하지요. 육신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해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볍게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허물투성인 우리를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약함을 보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며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며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님 앞에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주님은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ni5RysDQsM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한은 예수님에게도 무거운 것이었지만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원대로 마우시고 주님의 원대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고난이 싫지만 현재 우리 앞에 닥쳐있는 역경과 힘든 상황이 너무나 싫지만 주님 원하는 대로 하시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우리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의 뜻에 붙들려 나아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순순히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원하오니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오늘 또 우리 가는 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히 우리 갈 길을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만찬의 예수와 제자들

 

(찬 265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속죄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순종의 길을 가시는데요.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약하여 말만 앞세웁니다. 오늘 세 사람을 보여주는데, 사리사욕을 위해 수년 동안 함께한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 의리와 충성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 그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극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26~30절)까지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무교절 첫날 저녁에 만찬을 여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제자들은 그 밑에서 뭔가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과 희생을 다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눠주셨듯 곧 자신의 살을 생명으로 주실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포도주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잔을 비운다면 더 예수님과 함께 잔을 나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만찬이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상에서는 마지막 잔이 될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 새 포도주로 성도들과 함께 마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1 ~ 33절)까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기뻐하며 함께 찬양까지 부르며 신이 났습니다. 그 후 장소를 강람산으로 옮겼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은 스가랴의 선지자의 말씀까지 인용하며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제자들은 꽤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반응하는데요. “나는 결코 줄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이 맹세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의 다짐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우리 신앙도 지속해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4~35절)까지 보십니다.
베드로는 호기롭게 자신의 충성심을 예수님께 내세웠는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먼 훗날도 아니고 한 달 후도 아니고 바로 ‘이 밤이 다 지나기 전에 베드로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결심과 다짐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의리를 다짐하고 내세웠지만, 그 의리는 금방 무너지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의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싸움을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진심 어린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연약함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려면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을 붙들어 인도하도록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나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가 있습니다.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또 그 언약의 피 안에서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zBDvYObj8I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의지와 신앙과 절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다가도 의심하고 변개하는 저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언약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님에 인도하심을 구하오니 오늘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또 신앙생활에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제자로 당당히 우리 자리에 서서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루벤스, 향유를 부은 여인

 

(찬 214장)

예수님은 절대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신앙적 행동을 통해서 성도들이 예수님께 보여야 하는 가장 합당한 태도와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틀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그것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자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제자들은 낭비라고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많은 말씀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 신앙이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만,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길 때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선험적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선험적 지식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시 향유는 당시에 매우 값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판단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이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일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바친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으며 사람들 앞에 그녀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실이 전해지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한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예배하고 예물을 드릴 때 예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그 모든 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반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행하는 모든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봉사와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큐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향유를 보인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낭비라 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놀라운 헌신을 기억하시고 높여 주셨듯이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사랑과 헌신도 언제나 기쁘게 받으시며 영원히 기억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가장 값진 것을 들림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입술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우리의 헌신과 예물과 우리의 정성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정말로 기뻐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더욱더 복되고 전기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k3rVVE6D0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의 죽음을 향유를 통해서 표현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귀한 것을 깨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행동과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향한 마음에서 동기가 되어 행동하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268장)

 세상에는 무모한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모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도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데요.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 가족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도발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도엑과 아비아달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선택했고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 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 봅니다.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도엑

 오늘 우리는 먼저 사울을 택한 도엑을 보겠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작은 호의까지도 자신에 대한 배신 행위로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의중을 알았던 도엑은 사울이 원하는 대로 아이멜렉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도엑게 보고를 듣고 분노가 끌어오른 사울은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해 다윗과 공모한 사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무리 중 누구도 사후를 대적하려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모든 제사장 무리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도엑이 그 명령을 따라 제사장 무리를 학살했습니다.
도엑은 철저히 악한 권력자의 입맛에 자기를 맞춤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편에 섬으로써 앞날의 부귀 영화가 보장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득에만 몰두해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뿐입니다.

 잠언은 ‘악인이 서로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고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을 자랑하는 악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선한 행위로 맞서야 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에게로 도망친 아비아달

 이어서 다윗을 택한 아비아달의 모습을 살펴보겠는데요.
제사장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단 한 사람 아비아달만이 도망쳐 나와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다윗을 찾아갔는데요. 다윗은 사울이 저지른 악행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을 안심시키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겸손함과 배려를 보면서 그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정당성을 갖도록 끝까지 협력했습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왔을 당시 다윗은 큰 세력을 갖춘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라한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다윗을 선택했고 그 결과 진리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참된 성공과 승리하는 삶에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따르라고 교훈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홀로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섬기는 지체와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 서로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받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잠 2장 20~22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아기는 땅에서 끊어지게 했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더 복된 선택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며 함께하고자 합니다. 악한 권력자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도 그를 가까이 하면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은 곧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체들과 함께 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군중의 길이 아니라 바로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믿음의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기도드립니다.
 성령님, 저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령님, 저희를 이끄셔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그들을 잘 따라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땅의 약속과 진정한 성공과 승리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모두 주님의 진정한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오늘 삶에도 어떠한 상황에 서든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시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거룩한 길 끝까지 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보존시켜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50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한은 헛되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세워져 갔습니다. 그는 또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무리가 춤추며 다윗에 대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그들 앞에서 미친 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의 침을 흘렸습니다. 아기스는 자기에게 미치광이를 데려왔다 하며 신하들을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집안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는데 그 외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어느새 그들의 수장이 되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위로와 회복이 넘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모압 출신 증조모 룻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새에 있을 때 부모는 모압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최선을 다해 부모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요새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 수풀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다윗에게 도피 생활은 연단의 과정이었고 목적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과감하게 유다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도는 방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단의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Saul angry with David,Antoni Brodowski,1815

 반면에 사울의 모습을 보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셀나무 아래에서 손에 꼭 쥐고 있는 단창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울은 다윗이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며 신하들을 질책하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요.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눈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악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도액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견고한 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힘을 키워야 합니다.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악한 세력을 공동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뿌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서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메어 달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극심한 기근에 처하게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서 갔잖아요? 즉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와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오직 그의 아내인 나오미만이 겨우 살아서 모압에서 얻은 자부 룻만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돌아와서도 나오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궁극적인 기쁨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우리를 품으심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39, 40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란 때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데살로니가전서 33)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모든 일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선지자의 제안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반면에 사울은 불안함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도엑 같은 악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과 그렇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유연했지만 사울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담대한 성도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오늘 하루도 잘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오늘 이 하루도 넉넉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337)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간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한 반면 요나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놓고 사울은 죽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4~31)에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한 계획대로 초하루 식사 때에 아버지 사울을 만나 그의 의중을 살폈습니다.
초하루 식사 첫날에 다윗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정한 일 때문에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집안의 제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가길 원했고 자신이 그것을 허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사울 자신의 왕권뿐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왕위도 보장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주장하며 다윗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스스로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막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때부터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회개해야 합니다.

 

 (32~34)은 다윗을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또 한 번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번에는 울분과 격한 감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은 크게 분노해 그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미움을 받는 다윗을 위해 슬퍼합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자기 집안의 왕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해 왕이 될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 두 부자가 보인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 생각하는 바가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여동생 미갈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 않았고 하나님 뜻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그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따지면 사울은 그의 아버지지요, 이해관계로 따져도 다윗은 자신이 당연히 물려받아야 될 왕위를 대신 차지할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요나단은 당연히 사울 편에 서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길 원했고 육신의 아버지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단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삶의 가장 큰 본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이죠?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독일 간호사인 엘리자베스 조안나 쉐핑은 191232세부터 54세에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신음하면서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살피며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희생적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모두 당신의 뜻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켜 나아가실 것입니다.

 오늘은 박대영 저자의
디도여, 교회를 부탁하오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제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학을 하러 유학을 갔지만 신학을 바치고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안수를 받지 않은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 무서워서다 어릴 때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그 무서운 책임을 존경스럽게 감당하셨는데 나는 도저히 그분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더 엄중한 책임을 부여하고 더 큰 신뢰와 존경을 보이는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는 참으로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가치관, 행동 양식,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심지어 영원한 미래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그릇 인도하면 함께하는 영혼들을 파멸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부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유능해서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하리라 자신하는 학생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마다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습니다. 전자는 너무 교만해서 실패할 것이고 후자는 목회를 할 때도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상당 부분 지도자들의 과오와 부덕에서 비롯됩니다.
지도자나 성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지도자들이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성도들은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 저자의 말처럼 정말 지도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사울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끝끝내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Eyg5-qv5I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는 사울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아버지이자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복잡한 이해관계 앞에서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뭘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늘 정의롭고 거룩한 편에 속해 있으면 결국 그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살리려는 그 길을 기쁨으로 가십시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고 나를 통해서 어떤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나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멋지게 출발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죽이려는 사울과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내가 살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위로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경청하며 손잡아줘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길에서 우리 각자가 살려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동을 주시고, 그래서 살리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해서 별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복된 성도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찬 325장)
성경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복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사울의 모습은 두 삶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형통함을 경험했다면, 사울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울은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처럼 창화하는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시기와 분노의 마음을 털어내리지 못하자 그 자리에 악령이 침투해 사울의 광기가 시작됩니다.
한편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그는 더 지혜롭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먼저 (10~11절)까지 말씀해 보면 사울에게 악령이 내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시기에서 시작한 마음에 증오가 자랐고 그곳에 악령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정신없이 떠들어댔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살해할 만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윗은 사울을 위해 평소와 같이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닙니다. 그의 위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군대 사령관이 되어 백성에게 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잊지 않고 여전히 겸손하게 그를 섬겼습니다.
다윗의 손에 든 수금은 그가 양을 치며 지내던 목동 시절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늘 손에 들고 다니던 악기였습니다. 그 수금은 그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혼을 치유하는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상을 기록한 저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의 손과 사울의 손을 교차해서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생명을 살리는 수금이 들려 있는데 사울의 손에는 생명을 해하는 창이 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손에 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아버리겠다며 있는 힘껏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두 번이나 다윗은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위해서 도구를 잡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에르치노,'다윗을 공격하는사울',1646.

 

 (12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동행하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울도 그 사실을 깨닫고 다윗을 두려워했는데요.
사울은 다윗을 떠나게 할 방법을 찾아 다윗에게 천부장이라는 직책을 주어 야전 사령관의 임무를 맡도록 멀리 떠나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백성들 앞에 출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다윗이 부지런히 군사들과 백성들을 살피며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의 성실과 충성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고 타윗은 더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다윗이 원래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의 지혜와 성실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는 여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정도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다는 구절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일하시고 도우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됩니다.
다윗은 젊고 온유하며 전쟁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따랐고 왕은 이미 백성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한 후 그것을 다시 뽑아 사울에게 되던지는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백성을 선동해서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묵묵히 창을 피하고 멀리 떠나라면 그 자리를 묵묵히 떠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십니다. 수량을 맡겨주신 부분에 있어서는 그렇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 맡기신 수량에서 보면 공평하지 않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맞는 분량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신 불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하고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다섯 달란트를 만들어내라고 말씀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달란트 받았으면 한 달란트로 두 달란트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면 그건 역시 잘못된 것이요, 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분노하고 질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마음의 고통만 더해갈 뿐입니다.
마치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사울왕이 가야 될 길이 있고 다윗이 가야 될 길이 있어요.
사울왕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고 다윗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미움으로 질투하지 않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윗을 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이스라엘에 가장 위대한 성군 다윗을 세운 더 훌륭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자기의 마음의 고통이 왔고요 그는 평강을 잃어버리고 사탄이 그의 심령에 자리 잡아서 괴로움을 더해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uh1KoF5Pro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고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창을 드시겠습니까? 수금을 드시겠습니까? 창을 든 자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평안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말 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남을 축복하는 자세로 수금을 타는 것과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복되고 가치 있고 값어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온유함을 지키는 그런 다윗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창이 아니라 수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다윗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고요 그 지혜는 더 날이 갈수록 날카롭고 예민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모든 인생의 길에는 하나님이 더욱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지혜롭고 강한 주님의 승리가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사울의 창이 아니라 다윗의 수금을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 지혜롭게 행동했던 다윗의 편에 서겠습니다.
오늘 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가 항상 지혜롭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옵소서 오늘 또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원유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드는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516장)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왕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경우도 있고, 물질이나 사람, 성공이나 부유함을 왕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왕을 버리고 거짓 왕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행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나이많아 늙었고, 어느날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었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불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5)에 보면 진짜 왕을 요구한 이유가 나오는데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도 되고 싶다는 것이죠. 그들도 이방나라처럼 인간 왕을 세워, 통치를 받고 싶고, 전쟁에도 이기려면 왕이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7)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돌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 졌을 것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두가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은혜를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들이 ‘인간 왕을 요구한 것은 국가 위기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변 나라들을 막아주셔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망각해 갔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방어력으로 블레셋을 제압하고 있었다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다 사무엘은 점점 늙어가고, 그 아들들은 패역하니 불안과 염려가 백성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를 누렸는데, 그 평화가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고, 은혜를 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적) 사람들은 형통과 평안을 원하는데, 실제로 평안과 형통이 오면 불안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문제가 해결된 평안한 상태를 원하는데, 놀이터의 시소가 한 쪽 올라가면 상대쪽이 내려가듯이, 평안과 형통이 오면, 그때는 영적으로는 침륜에 빠지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또 실제로 형통하고 평안하면 기도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많아지게 되죠.

 

(잠언 30)에 보면 아굴의 기도가 나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7~9)

부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혹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잘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가난한 것이 훨씬 더 큰 복이요,
장수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보다, 경건하게 단명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것입니다.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이 왕을 구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요? 주변 나라들이 왕을 세워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그들은 세상에 속한 나라들이 잘 되는 것 같고, 그들을 부러워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부귀나 성공을 부러워하면 영적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지요. 창세기 6장에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여인들을 자기 아내로 삼으면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나라입니까?

(4)에서는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5) “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율법을 주셔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게 해 주신 특별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오랫동안의 평안과 형통이 방심을 하게 했고, 신앙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망각하면, 성도도 가정도 교회도 쉽게 무너집니다.
성도와 교회는 돈이 없고, 성공하지 못해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평탄하게 살며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한 때는 은혜받고 성령도 받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다가 지금은 예배도 안 드리고, 불신자가 된 경우를 보셨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 왕은 너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지 않은 세금을 걷어가고, 자녀들을 데려가 일을 시키고, 심지어 종으로 삼아 부려먹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19)에 보세요.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아무리 경고했지만 사무엘의 권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의 대답이 (22)인데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물론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7)에 보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왕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하나님이 진짜 왕임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RyKt1U_N4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나라처럼 왕만을 요구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로 주시는 첫째 왕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 인해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은 ’왕을 버리고 왕을 얻으려는 아이러니‘였습니다.

성도는 첫째,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왕을 버리면 육신의 왕, 세속적인 왕을 원하게 됩니다. 그 왕이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71,72)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참된 왕을 믿고 따르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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