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찬 150장)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오전 9시경부터 3시간에 걸쳐서 참기 힘든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역설적이기에도 가장 고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었으며 인류에게 가장 큰 소망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에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에 이미 영혼은 떠났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권한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고난의 과정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오롯이 감당하신 것이지요.

왜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생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아시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며 공감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손톱 밑 가시가 남의 큰 병보다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험을 받아 고난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 그분께 그 고통을 낱낱이 아뢰 보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주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주님이 다 헤아려 주시고 참된 위로로 우리를 지니 만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까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고난이 실패가 아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과 문제만 바라볼 때는 시련을 왜 주셨는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때로는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난 없이 평탄하고 안락한 삶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안락한 삶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아가지요.
하지만 십자가는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섭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아들 예수님께 허용하셨고 고통이 아니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은혜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 습관과 이기적 자아로 인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고난과 실현을 통해서 다듬어 오셨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넓은 폭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문에 낙심할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아름다운 성품을 갖도록 우리를 빚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 보이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 보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상처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권한이 나의 권한이 되었고 십자가의 은혜가 나의 은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그리고 공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까지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문제가 있을 때 상황이 너무 힘들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까지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괴로울 때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모든 고난과 문제를 극복하여 이기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kS_MgZ7NA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해서 위로받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아픔까지도 충분히 공감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신 주님 우리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잘 지고 결국 구원의 승리에 이룰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오늘 또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게 하시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빌라도의 재판

 

 

 (찬 144장)

 

우리가 경기에서 심판에게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정입니다. 역시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혹 홈팬들의 함성과 야유에 압도당해서 공정하지 못한 판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판사도 뇌물이라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판정을 굽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빌라도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공정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정함보다 군중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먼저 본문 (15~19절)까지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십자가형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땅은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견한 총독 빌라도만이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고발과 거짓 증언에도 그저 침묵을 지키셨는데요.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죄 없는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고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도 그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며 남편 빌라도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신속히 정의로운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너무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알량한 안위를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20~23절)에 보면 군중의 압력이 계속되는 내용인데요.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를 사면해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결백을 발견한 이상 특별 사면권을 곧장 예수님께 사용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의식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군중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악명 높았던 죄수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가 재차 군중에게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모습에 실망했고 그 실망은 분노로 번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군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정치적 메시아, 즉 나를 번성하게 해주고 잘되게 해주고, 형통하게 해주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나의 삶 가운데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고, 또 그 낙심과 실망이 곧 분노로 바뀔 수도 있죠.
또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있는 이 군중들의 모습은 얼마든지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일 수도 있고요.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1881년작 ‘이 사람을 보라’. 문카치가 그린 ‘예수 3부작’ 중 하나.


 (24~26절) 말씀은 빌라도가 결국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정의와 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휩쓸렸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자손들에게 돌리라며 저주를 자처하기도 했는데요.

빌라도는 사회의 정의가 깨지는 것보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마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일에 무지하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그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면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고,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주님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또 성도라고 하는 근본적인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명이라는 책임을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또한 직분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또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내에서 잘못된 많은 문제와 비리와 사건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치와 진리의 존귀함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라도 내가 지켜야 할 사명의 책임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성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빌라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발당해 잡혀 온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할 놀라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의보다 정치를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 권세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이 세대에서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의 모습과 성난 군중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것처럼 내가 바로 빌라도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이 아닐까 적용해 보면서 오늘 또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ecwYFct3tY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빌라도 같은 자요. 내가 바로 성난 군중과 같은 자인데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억울한 누명을 쓰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의 사명의 길을 가셨나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지키게 하옵시고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는 성도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오늘 또 인도하시고 교회를 지켜주시며
당신의 나라 안에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안드레아 만테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번민',1459.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에게도 너무나 괴롭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했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예수님이 더욱더 크게 괴로워하신 것은 일시적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 역시 그 큰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먼저 (36~39절)까지 보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요.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느끼는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 고통과 범민도 몸소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과 죽음을 앞두고 괴로움 가운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진솔하게 밝히시며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요청하셨는데요.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가능하다면 잔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호소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것이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할 수 있는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더욱 깨어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40~44절) 말씀은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워서 사력을 다해 기도하셨는데 제자들은 근처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자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아마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는데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안타까운 마음이죠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들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신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반복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선한 목자같이 제자들을 돌보시며 지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 괴롭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기도로 견뎌내시면서도 제자들을 진정한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고 오늘도 당신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어서 (45 ~ 50절)은 성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기도를 다 마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팔아넘길 가려 누다가 가까이 왔음을 인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도망하거나 피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높고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 피할 길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완전한 순종을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붙잡힐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각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간절한 기대에도 끝끝내 침묵하시며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완전한 침묵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놀랍고 위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한이 없지만 우리는 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실망하게 하지요. 육신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해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볍게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허물투성인 우리를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약함을 보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며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며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님 앞에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주님은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ni5RysDQsM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한은 예수님에게도 무거운 것이었지만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원대로 마우시고 주님의 원대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고난이 싫지만 현재 우리 앞에 닥쳐있는 역경과 힘든 상황이 너무나 싫지만 주님 원하는 대로 하시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우리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의 뜻에 붙들려 나아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순순히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원하오니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오늘 또 우리 가는 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히 우리 갈 길을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만찬의 예수와 제자들

 

(찬 265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속죄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순종의 길을 가시는데요.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약하여 말만 앞세웁니다. 오늘 세 사람을 보여주는데, 사리사욕을 위해 수년 동안 함께한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 의리와 충성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 그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극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26~30절)까지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무교절 첫날 저녁에 만찬을 여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제자들은 그 밑에서 뭔가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과 희생을 다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눠주셨듯 곧 자신의 살을 생명으로 주실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포도주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잔을 비운다면 더 예수님과 함께 잔을 나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만찬이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상에서는 마지막 잔이 될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 새 포도주로 성도들과 함께 마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1 ~ 33절)까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기뻐하며 함께 찬양까지 부르며 신이 났습니다. 그 후 장소를 강람산으로 옮겼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은 스가랴의 선지자의 말씀까지 인용하며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제자들은 꽤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반응하는데요. “나는 결코 줄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이 맹세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의 다짐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우리 신앙도 지속해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4~35절)까지 보십니다.
베드로는 호기롭게 자신의 충성심을 예수님께 내세웠는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먼 훗날도 아니고 한 달 후도 아니고 바로 ‘이 밤이 다 지나기 전에 베드로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결심과 다짐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의리를 다짐하고 내세웠지만, 그 의리는 금방 무너지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의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싸움을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진심 어린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연약함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려면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을 붙들어 인도하도록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나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가 있습니다.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또 그 언약의 피 안에서 보혈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zBDvYObj8I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의지와 신앙과 절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고백합니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다가도 의심하고 변개하는 저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언약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님에 인도하심을 구하오니 오늘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또 신앙생활에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제자로 당당히 우리 자리에 서서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루벤스, 향유를 부은 여인

 

(찬 214장)

예수님은 절대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신앙적 행동을 통해서 성도들이 예수님께 보여야 하는 가장 합당한 태도와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틀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그것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자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제자들은 낭비라고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많은 말씀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 신앙이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만,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길 때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선험적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선험적 지식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시 향유는 당시에 매우 값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판단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이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일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바친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으며 사람들 앞에 그녀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실이 전해지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한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예배하고 예물을 드릴 때 예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그 모든 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반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행하는 모든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봉사와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큐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향유를 보인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낭비라 할 수 없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놀라운 헌신을 기억하시고 높여 주셨듯이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사랑과 헌신도 언제나 기쁘게 받으시며 영원히 기억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가장 값진 것을 들림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입술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우리의 헌신과 예물과 우리의 정성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정말로 기뻐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더욱더 복되고 전기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k3rVVE6D0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의 죽음을 향유를 통해서 표현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귀한 것을 깨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행동과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향한 마음에서 동기가 되어 행동하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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