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425장)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성공은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 하는 속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가느냐 하는 방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조금은 더디 가더라도 그 인생길에서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으며 성공적인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도자는 우매한 자로 인해서 폐해와 그 결과의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우매와 지혜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이 은혜로운 반면에 우매자의 말은 자신을 삼키는데 시작은 우매이고 결말들은 미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자의 말은 타인에게 유익한 좋은 열매를 맺지만 우매자의 말은 스스로 망치며 해치고 타인에게도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매자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인데 남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은 결국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자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주심으로 미래를 대비해 유익을 얻게 하시지만 우매자에게는 아무도 미래의 일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자는 구매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다고 진술합니다.

그들이 성읍에 들어갈 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요 상식적인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는 우매자들이 끼치는 해악을 잘 기억해 그 해악을 피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게으르고 우매한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전도자는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에 화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어리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를 뜻하는데요.

그리고 아침부터 잔치하는 대신들은 어리석은 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쾌락과 욕심을 추구하는 간신들을 가리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왕과 대신들이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좋아한다면 나랏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일이 없겠지요.

전도자는 게으른즉 석가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 즉 집이 샌다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나라와 공동체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으르고 무능하고 부패한 왕과 대신들의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성도는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가정과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마음속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라도 부자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저주하는 소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질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죠.

왕과 권세자들이 자신을 향한 저주의 소리를 들었을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저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과 권세자뿐 아니라 타인을 저주하는 것은 여러 모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특히 성도는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에 권세자들을 저주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개인의 입장을 떠나서 공동체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이 지혜롭게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력을 바르게 사용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할 때 자신도 평안한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오늘 말씀의 결론인데요. 어리석고 우매한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스스로 망하는 길로 치달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깨뜨리고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 언제나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요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 있고 유익하며 하나님이 쓰시는 멋진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서 우매한 자들을 배격하고 나와 가족과 직장과 교회를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오늘 우리는 전도자의 말을 잘 기억하고 우매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우매자의 말과 행동이 없게 하시고 바른 말 복된 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줄 아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모든 자리를 털고 비우고 떠나갈지어다! 성령 하나님 우리 입술에서 복된 말 지혜로운 말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혜자로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고 지존한 주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U5IkrWe6dwc

(찬 407)

 

살아볼수록 인생은 허무하죠. 과연 인생의 허무는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의미있는 인생이 살아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을 경외를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내용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물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찾으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3)을 해석하며,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뜻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중히 살피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자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에 극에 달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고 말씀하셨고,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16,1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 시대나, 이사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더 둔감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못하면 즉시 치셨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기에 더 죄를 가벼히 여기고, 더 만홀히 여깁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참된 경외와 경건의 자세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본문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여기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앞에두고 하는 말도 천박하거나 경박하면 모독이 되는데,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죄요, 입술로 범죄하는 악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허물은 점점 늘어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랍시고 아무 말이나 막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하며, 인도하심을 구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하는 것보다, 자주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는 보배로운 향기와 같습니다.

(58)에 보세요.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8)에 보면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들과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외형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러 말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뱉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실수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말을 되도록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향연을 더 많이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얼마나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실수가 많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외적 경건을 기본으로 두고, 내적 경건함이 더해지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따라서 감정이나 기분으로 말하기 보다 믿음으로 말하고, 또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향기로운 향기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성령님, 할 말을 우리 생각과 입에 담아주시옵소서.

 



(
393)

 

오늘은 4장에서 전도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네 종류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학대받는 인생이 있다(1~3)

 전도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1).”

그러나 그 학대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고, 학대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없수이 여기며, 권력있는 사람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자는 (2)에서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에서는 차라리 출생하지 아니한 자가 더욱 낫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해 아래에서는 불공평이 있고, 불균형이 있고, 학대도 있습니다. 권력앞에 굽신 거릴 사람들은 줄을 서도, 학대받는 자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죠.
그럼 이렇게 학대받고, 천대받을 때 참 위로를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12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고,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주셔서, 낮의 장렬한 해와 밤의 냉혹한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요셉의 억울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고, 욥의 고난중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낙심하여 죽여달라던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경쟁심에 잡힌 인생이 있다(4~6).

 (46)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시기심이 불타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심으로 미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경쟁심, 시기심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공격하면 헛된 것이다! 결국 그 경쟁자를 짓누르고 이긴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헛된 일이다.’입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5)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자라고 말하고요,

(6)에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이죠?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도가 행복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께 기도하여 묻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이 있다(7~12).

 어떤 사람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형제도, 가족도 없고, 곁에 있어줄 친구도 없습니다. 철저히 혼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그는 헛되고 부질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게 전도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9~12)까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함께 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가련하고, 넘어졌는데 일으켜 줄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함께 일할 사람, 적에게 맞서 줄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그의 인생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에는 삼겹줄과 같은 동역자요 영적 친구가 있나요?

 

넷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인생이 있다(13~16).

 전도자는 (13)에서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왜 늙은 왕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를까요? 자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결국 지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비록 가난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복이 그를 따릅니다. 결국 그는 신망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네 종류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자
,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돈은 중요합니다. 집도 중요하고요, 직장도 중요하고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게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우리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누구일까요? 함께 주안에서 머물며 기도로 동역하며,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교만할 때 권면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줄 신앙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가 그런 영적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려분과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었으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전돗서 4장의 말씀을 통해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인생도 아니요,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도 아니요, 어울릴 줄 모르는 독불장군도 아니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도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고 지도하셔서 삼겹줄 같은 영적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앞에 서기까지 승리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삼겹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송가 446)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거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지 이런 허무감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커(Michael Steger)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 질병, 예술 작품, 결혼 등에서 의미를 찾듯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부터 전도서 말씀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전도자는 인생이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처럼 허무함을 부르짖는 전도자의 모습은 마치 세상을 비관하는 회의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의주의에 빠진 불신자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애하는 전도자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평가한 이유가 뭘까요.

 

오늘 말씀은 전도서 11절부터 11절입니다.
우리나라 민속 신앙에는 십장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물상은 해, , , ,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 사슴, 또는 대나무입니다. 이 모두가 장수물이므로 자연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시문이나 그림, 조각 등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요.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장생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장수를 간절히 꿈꿀 만큼 철저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오히려 방증합니다.

전도자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땅은 지속되지만 우리 인간은 계속 죽고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은 머무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월도 화살같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한껏 자신의 젊음을 자랑하던 사람도 돌아서면 어느새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게 되지요.
그리고 한 번 지나가 버린 세대를 그다음 세대가 제대로 기억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왜 이토록 유한한 인간의 허무함을 강조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함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답을 발견하라고 도전하는 메시지인 것이죠.

 

많은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른 채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영생의 진리와 복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자는 묻습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가 도대체 무슨 보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강물이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결코 바다를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죠.
그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로 원하는 사업도 해보았습니다. 궁전도 지어 보고, 포도원도 마련하고, 동산과 정원도 가꿔 보았습니다. 그 수고를 통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고 사람들의 칭송도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그 칭송도 그의 귀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의 수고와 업적 중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하지만 사람들의 엄청난 업적 역시 과거에 누군가가 발견하거나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방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가르쳐 줍니다.
만족 없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삶을 힘있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덧없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와 소망을 일깨워주신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인생이 참 허무하고 너무 빨리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의미를 쫓아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여건과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주신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시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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