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0장,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더 이 문구가 와 닿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이 꺾이는 듯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사흘 만에 자신들의 거처인 시글라고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성읍은 불타버렸고 아내와 자녀들은 아말렉에게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기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격분에 다윗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다윗을 지도자로 믿고 따른 결과가 너무 참담해 이성을 상실했던 것이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의 잘못이 아닌데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20장)에서 마치 출에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자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속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가족을 찾을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절망을 심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타인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위기와 슬픈 일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꺾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어서 큰 슬픔과 위기 앞에서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절망한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했지만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에봇이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비아달은 사울과 에돔 사람 도엑에 의해 제사장들이 멸절 당할 때 에봇을 입은 채 다윗에게 도망해 계속 함께했던 사람이죠.
사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녔기에 성전을 찾을 수도, 제사장을 만날 수도 없었고 다만 애봇을 입고 성전에서 섬기던 아비아달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응답하셔서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즉시 아말렉을 추격하지만 그중 탈진한 자 200명은 머물게 하고 400명만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금식을 선포했던 사울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거창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문제가 있고 없고 차이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성도는 다윗과 같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용기를 얻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 또한 그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므로 문제 해결의 열쇄도 하나님이 예비하셨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당하게 하시고 위기에 처했을 때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들은 주권자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주실 것을 믿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와 함께 하시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어떤 슬픔과 위기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닥친 슬픔과 위기는 무엇입니까 성도에게 닥치는 위기가 한편으로는 기회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고난과 위기 속에서 처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확신하고 언제나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도 슬픔과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e4dY15yi8M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큰 슬픔과 위기를 당했지만 다윗은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오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모든 슬픔과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명철하게 하셔서 복된 선택을 하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오늘 다윗이 버려진 종을 만나서 길을 찾게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은혜와 만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 우리를 인도하시고 복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삼상 29장


 (
찬 397장)

‘위기가 곧 기회다’라고 하는 말이 있죠.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도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용병 노릇을 했던 다윗은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지요.
블레셋의 편에 서지 않으면 생존 위협을 받을 것이고 블레셋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우면 자기 동족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다윗에게 피할 수 없는 크나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스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신하였던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다윗의 참전을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또한 방백들은 오래전에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상기시켰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던 그 노래 가사를 아기스에게 이야기하면서 방백들은 다윗이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 노래 가사를 들었을 때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그 노래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다윗의 인생에 이렇게 구겨지고 힘든 순간들이 많아졌던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방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윗을 세 번이나 인정했습니다. 이제까지 다윗에게 허무를 본 적이 없었고(3절)에 정직하여 악을 찾을 수 없었고(6절)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하다고(9절)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의 강력한 항의로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라고로 돌아가게 되지요.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블렛의 진영의 군사로 참여하지 않게 되고 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과 맺은 언약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뜻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그저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위기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길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위기 때마다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오래전에 불렀던 여인들의 노래가 다윗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되었지만, 오늘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뼈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또 우리가 만났던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서 별처럼 빛나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로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해서 안전을 도모하려 했고 또 오늘 본문에서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 속에서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 불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윗을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다윗처럼 여러분의 상황도 막막하거나 답답하십니까 우리가 이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이십니다.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희에게 넘쳐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H7qH7LrRg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위기 어려움의 위기 질병의 위기 문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불의하고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문제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조합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을 간절히 바라며 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사무엘상 28장


(찬송가 543장)


(27장)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갔고, 아기스 왕 아래에서 평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28장)에서 아기스 왕이 함께 이스라엘을 쳐서 공을 세우면 큰 보직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 때 사울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으며 크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가 거룩한 전쟁임을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물었는데, 첫째는 꿈이요, 둘째는 제사장을 통해 듣는 우림이었고, 마지막은 선지자를 통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진짜 잘못된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무엘이 죽었을 때 내쫓았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이 엄격하게 금하는 주술로라도 확신을 찾으려 집착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 과도한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를 자행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합니까?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분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과욕을 부리며 살더니,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사실 사울 왕에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현실적인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사울은 아직까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황이 지금 불리하긴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전보다 불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의 과거 행적을 살펴 본다면 이 정도 상황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음식조차 끊어버리고 이렇게까지 절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까지 절망했을까요?결국 답은 사울왕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만을 뛰어난 존재로 여기고,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나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곳에서도 도움을 기대하거나 요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에 쓰러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성도가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교만하게 되면 사울처럼 왕임에도 일반 백성보다 못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스스로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만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못하여 결국 파멸의 길로 갔던 사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 내 뜻, 내 마음대로 안 되어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안 되었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허락하시고, 정말 그러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겸손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최선이 기도라면 기도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사랑이라면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일이라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역사를 바꾸려 하지 말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이 우리에게 본보기와 거울이 되어, 우리 행동과 마음가짐에 영향을 끼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운에 맡기지 말고, 힘들고 어렵다고 점치는 자에게 묻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성도의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가는 길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Z7YZy4wvg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저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려운 일은 오지만 사울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님에 감동되어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미래가 밝은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우리 갈 길을 밝히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다윗 왕



(
214)

 

 우리 말 속담에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죠. 나 살기도 벅찬데 남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지금 코가 석 자 정도가 아니라 열 자도 더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 (1~5) 말씀까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나를 구원한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블레셋의 접경 지역에 그일라라는 마을의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그일라 사람들이 일년 내내 수고에 추수하여 타장 마당에 쌓아 놓은 곡식을 블레셋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탈취해 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블레셋을 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을 이길 만큼 수가 많거나 잘 훈련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윗을 말렸어요.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데 블레셋을 치라뇨?”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다시 구하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릴라로 가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전리품까지 챙겨서 오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형편이 좀 나아지면 좀 여유가 생기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면 순종하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지금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그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바로 그것 지금 해야 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도피행로


 이어서 (6~14) 말씀까지는 돌아오는 것은 배신의 쓰라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릴라에 온 사실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좋아했어요.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예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사울은 자기 욕망에 따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드디어 다윗이 성 안에 갇혔다라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성이 지금 블레셋에게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뻐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욕망에 사로잡히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게 됩니다. 자신의 안전 때문만이 아니라 그일라가 사울에 의해서 파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 것이고 그 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일라 주민에게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해코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묵묵히 그 일라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사울도 그 일라를 향한 행진을 멈추고 돌아갔고, 다윗의 선택으로 그일라에도 평안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늘 그를 보호하셔서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을 오늘 (14)에서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https://www.youtube.com/watch?v=WjVqmcl52p0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유익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눈앞에 유익이나 욕심을 쫓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안에 고하십시오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우리 안전을 책임져 주시고 다윗처럼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귀한 시간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기도를 드립니다. 다윗이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저희도 다윗처럼 행동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지금 순종의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여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행할 때 우리 갈 길이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복된 삶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권과 인권과 물권을 허락하여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는 복된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337)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간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한 반면 요나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놓고 사울은 죽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4~31)에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한 계획대로 초하루 식사 때에 아버지 사울을 만나 그의 의중을 살폈습니다.
초하루 식사 첫날에 다윗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정한 일 때문에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집안의 제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가길 원했고 자신이 그것을 허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사울 자신의 왕권뿐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왕위도 보장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주장하며 다윗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스스로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막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때부터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회개해야 합니다.

 

 (32~34)은 다윗을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또 한 번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번에는 울분과 격한 감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은 크게 분노해 그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미움을 받는 다윗을 위해 슬퍼합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자기 집안의 왕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해 왕이 될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 두 부자가 보인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 생각하는 바가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여동생 미갈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 않았고 하나님 뜻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그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따지면 사울은 그의 아버지지요, 이해관계로 따져도 다윗은 자신이 당연히 물려받아야 될 왕위를 대신 차지할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요나단은 당연히 사울 편에 서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길 원했고 육신의 아버지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단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삶의 가장 큰 본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이죠?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독일 간호사인 엘리자베스 조안나 쉐핑은 191232세부터 54세에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신음하면서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살피며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희생적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모두 당신의 뜻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켜 나아가실 것입니다.

 오늘은 박대영 저자의
디도여, 교회를 부탁하오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제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학을 하러 유학을 갔지만 신학을 바치고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안수를 받지 않은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 무서워서다 어릴 때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그 무서운 책임을 존경스럽게 감당하셨는데 나는 도저히 그분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더 엄중한 책임을 부여하고 더 큰 신뢰와 존경을 보이는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는 참으로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가치관, 행동 양식,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심지어 영원한 미래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그릇 인도하면 함께하는 영혼들을 파멸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부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유능해서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하리라 자신하는 학생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마다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습니다. 전자는 너무 교만해서 실패할 것이고 후자는 목회를 할 때도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상당 부분 지도자들의 과오와 부덕에서 비롯됩니다.
지도자나 성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지도자들이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성도들은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 저자의 말처럼 정말 지도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사울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끝끝내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Eyg5-qv5I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는 사울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아버지이자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복잡한 이해관계 앞에서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뭘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늘 정의롭고 거룩한 편에 속해 있으면 결국 그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살리려는 그 길을 기쁨으로 가십시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고 나를 통해서 어떤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나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멋지게 출발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죽이려는 사울과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내가 살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위로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경청하며 손잡아줘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길에서 우리 각자가 살려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동을 주시고, 그래서 살리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해서 별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복된 성도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9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윗사람이나 권세자들을 따라야 할까요? 그들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항거해야 할까요? 오늘은 전도서 8장 말씀을 통해 권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침 받겠습니다.

1절은 8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인데요.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기를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라고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알기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이치에 맞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스테반 집사가 하늘을 우러러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하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마음에 샬롬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얼굴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미소가 있고,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79)의 말씀대로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합니다.”
지금 일어난 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노를 발한다고 말씀합니다.

 

(2)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왕이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29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백성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말하는데요,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질서요,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으면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질서요,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에 보세요. 새번역 왕이 싫어하는 일은 고집하지 말고, 왕 앞에서는 물러나거라
자기 상식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해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급히 물러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요?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당시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여탈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복형이었던 아도니아가 제단 뿔을 잡고 살려 달라고 해서 살렸는데, 아버지 다윗왕을 모셨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하죠. 이것은 반역의 있는 행동이었죠. 그래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처단합니다.

이처럼 당시 왕의 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알지요.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잘 지킵니다. 지혜로운 자는 왕의 명령이 거북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요, 왕을 배반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안전하고, 화를 당하지 않으며,
(5) 보세요.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신하가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 바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5절 하반부)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잘 분별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이죠.
지혜롭게 왕의 명령을 분별했던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는데,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의 제사에서 온 것을 알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부하죠? 열흘동안 채식과 물을 먹으며 시험을 해보라 합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윤택한 것을 보고 넘어가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대처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6)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7)을 봅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하죠.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 시므이가 온갖 악독한 말로 다윗의 심장을 찢어놓습니다. 시므이를 다윗은 용서해주었지만, 솔로몬 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 죽임을 당합니다. 시므이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입니다.
시므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할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사람을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까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대처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소결론은 (9)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무시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때는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권세를 인정하고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권세자의 권위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 시대에는 왕이 없는데 말이죠.

보세요. 하나님은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를 세우셨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권위를 주셨며, 직장에 가면 사장에게 권위가 주셨으며, 교회에 가면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자녀가 보기에 부모가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사장님, 심지어 목회자도 부족한 점을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전도자는 부모를 거역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머리위에 기름을 바르셔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십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자를 따르십시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주안에서 따르십시오.

 

 나라의 지도자든지, 교회의 지도자든지, 가족의 어른이든지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이며,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도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모요, 윗 사람이 되었다면, 그 권위를 가지고 함부러 남용하거나, 기만을 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직위를 주셨을 때, 선한 기회인 줄 알고 잘 사용해서, 옳은대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전도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에 광채가 빛나게 하시고, 만사에 시기와 때가 있음을 알고 잘 분변하게 하시며, 권위아래 있으면 순응하고 잘 따르는 자 되게 하시고, 권위를 가진 자가 되었으면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어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6iSM1X9dKZk

 

 

 


(
549)

오늘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마지막에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NT5cnQqRw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가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고, 세겜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벧엘로 떠나야 했고, 요셉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줌으써,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게 됩니다.

 

(12~16)에는 야곱이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언약의 축복을 전수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 머리에 올리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팔을 교차하면서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위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얹고 축복했습니다.

지금 야곱의 두 손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 축복은 요셉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세상에서 번성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번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변함없이 주셨던 축복이며, 또한 자기가 집을 떠나야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빌어준 복이기도 했습니다.

(17~22)의 내용은 야곱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잘못 알고 손을 올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른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에브라임을, 왼손에 므낫세를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만한데도 그의 지혜는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장자로 선택하셨고, 라반보다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먼저 선택하여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므낫세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인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같고 므낫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했으며, 두 손자의 후손 역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떠나지 않으셔서, 때가 차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세겜 땅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야곱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나, 실현되었고요, 이후 세겜 땅은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을 좀 보세요. 어릴적이나 청년 시절에 지혜가 없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기회를 낭비했던 모습은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을 통해 징계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성장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영적 혜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과 영적 혜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께 지혜를 얻고, 영적 혜안이 열려서,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복된 어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온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와 보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성장해서 마침내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도 반복되는 일상이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에,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도 점점 성장하여 말년에는 하나님께 받은 참된 지혜를 전수하는 어른이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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