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간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한 반면 요나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놓고 사울은 죽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4~31)에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한 계획대로 초하루 식사 때에 아버지 사울을 만나 그의 의중을 살폈습니다.
초하루 식사 첫날에 다윗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정한 일 때문에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집안의 제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가길 원했고 자신이 그것을 허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사울 자신의 왕권뿐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왕위도 보장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주장하며 다윗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스스로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막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때부터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회개해야 합니다.

 

 (32~34)은 다윗을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요나단은 또 한 번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번에는 울분과 격한 감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은 크게 분노해 그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미움을 받는 다윗을 위해 슬퍼합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자기 집안의 왕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해 왕이 될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 두 부자가 보인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 생각하는 바가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여동생 미갈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 않았고 하나님 뜻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그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따지면 사울은 그의 아버지지요, 이해관계로 따져도 다윗은 자신이 당연히 물려받아야 될 왕위를 대신 차지할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요나단은 당연히 사울 편에 서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길 원했고 육신의 아버지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단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삶의 가장 큰 본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이죠?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독일 간호사인 엘리자베스 조안나 쉐핑은 191232세부터 54세에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신음하면서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살피며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희생적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모두 당신의 뜻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켜 나아가실 것입니다.

 오늘은 박대영 저자의
디도여, 교회를 부탁하오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제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학을 하러 유학을 갔지만 신학을 바치고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안수를 받지 않은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 무서워서다 어릴 때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그 무서운 책임을 존경스럽게 감당하셨는데 나는 도저히 그분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더 엄중한 책임을 부여하고 더 큰 신뢰와 존경을 보이는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는 참으로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가치관, 행동 양식,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심지어 영원한 미래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그릇 인도하면 함께하는 영혼들을 파멸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부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유능해서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하리라 자신하는 학생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마다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습니다. 전자는 너무 교만해서 실패할 것이고 후자는 목회를 할 때도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상당 부분 지도자들의 과오와 부덕에서 비롯됩니다.
지도자나 성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지도자들이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성도들은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 저자의 말처럼 정말 지도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사울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끝끝내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Eyg5-qv5I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는 사울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아버지이자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복잡한 이해관계 앞에서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뭘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늘 정의롭고 거룩한 편에 속해 있으면 결국 그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살리려는 요나단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살리려는 그 길을 기쁨으로 가십시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고 나를 통해서 어떤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나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멋지게 출발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죽이려는 사울과 살리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내가 살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위로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경청하며 손잡아줘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길에서 우리 각자가 살려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동을 주시고, 그래서 살리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해서 별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복된 성도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댈만한 예수님



(
86)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또 낙심해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면 매우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친구에 대한 명언을 몇 가지 조사해 봤는데요. 명심보감에 열매가 없는 과일 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가 없는 친구는 사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잘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라고 조언했고, 조지 오버트 목사님은 오래된 친구가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요즘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때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친밀한 우정을 우리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친밀한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쫓기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토로했는데요.

그리고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털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형편을 들은 후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울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과 어려운 형편을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발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진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hen)‘입니다. ’매력, 아름다움, 매력적인 인격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러분과 저에게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고 깨진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구가 될 때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넉넉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영적 친구의 관계가 아름답게 조성되고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9W3XwepXr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좋은 친구 관계로서 함께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친구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이 때에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시고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도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성능이 재앙이 됩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죄에 대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할뿐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박히고 맙니다.

고장난 인간의 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 간데 없이 타락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타락과 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시편 36편은 지독하게 부패한 인간의 죄성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거짓없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높이시고 악인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1-4절)까지 인간의 부끄러운 죄성을 거짓없이 폭로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눈이 어두운 짐승같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뭣하러 두려워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죠.

눈빛은 죄를 짓고도 뻔뻔해져서 ‘불법은 드러나지 않고, 미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악과 속임수 뿐이고, 잠자리를 누울 때마다 흉계를 꾸미며, 길거리에서 제멋대로 설칠 뿐 아니라, 불장난을 하면서도 누가 화상을 입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마음은 더 이상 회개의 자리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굳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심장처럼, 이제 스스로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영적 타락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5-12절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드러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드높고, 그분의 성실하심은 끝이 없다.

그분의 목적대로 원대하고, 그분의 평결 드넓다.

광대하시되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시니

사람도, 생쥐 한 마리도 그분께는 소외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피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4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 무진장의 인자를 지니신 하나님

둘째, 범할 수 없는 진리의 하나님

셋째, 이론의 여지가 없으신 하나님

넷째, 인간이 감히 탐색할 수 없는 지혜와 모략에 뛰어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입에서 찬송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생명의 원천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복락의 강수로 마시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주님을 아는 자들에게서 주의 인자하심을 끊어지지 않고 계속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11-12)은 교만한 자가 맞이할 최후입니다.

교만한 자의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게 하셔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이 시편을 읽다보면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과연 독자인 나는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그늘아래 피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좋아도,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없다면, 아무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이 복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인자, 헤세드 안에 들어오라고,

당신의 보호아래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복락의 생수를 마시고,

주님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인자인 헤세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적) 여러분은 살면서 죽을 뻔한 위기나, 매우 위험한 곳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경험이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씩은 겪는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우도 있고, 한 발자국만 더 나갔더라도 큰일 날 뻔한 자리, 납치당할 뻔한 위기, 체온이 1도만 더 올랐어도 생명이 위독해지고, 조금만 삐끗했더라면 큰 낙사사고를 당할 뻔했던 경험등....

사실 잠깐의 차이 때문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무사히 지나가기도 하며, 살기도 하고, 죽게도 됩니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빼면 해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명이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입고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오늘 시편 36편이 달라 보이고,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한 것이 달라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편 기자의 찬송을 내것으로 만들어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지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너무나 오묘하고 기가막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우리 함께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501~14) 우리가 남겨야 할 신앙의 유산


(543)

 

어제 농장에 갔다가 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는데요, 자주 오시는 목사님 사모님이 계신데, 그분이 지난 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이는 칠십대 초반이지만 건강해 보이셨고, 항상 밝으셨는데, 불과 몇 주 전에 건강하게 뵈었는데,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기신 유언을 봤는데요. 세 가지였습니다. “장례식을 치루지 말라, 누군가 소식을 알고 조의금을 보내오면 모두 선교지로 보내라, 시신은 대학병원에 기증해라.”였습니다.

참 멋진 유언을 남기고 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남긴 유언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유산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147년의 긴 여정을 애굽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신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요셉은 애도하는 기간을 거친 후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가나안 땅에 다녀오겠다고 바로왕에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당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굴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레아가 매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에브랏에서 베냐민을 출산하다 죽어서 그곳에 묻혔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막벨라 굴에 묻히게 해 달라고 유언한 것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은 가나안 땅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야곱은 언제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요셉도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해골이라도 메고 올라가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면서 창세가 끝납니다.

야곱과 요셉은 좋은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왕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메고 가나안의 땅 막벨라 굴에 갑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동행했는데요, 장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왜 아버지 야곱이 그곳에 묻히길 원했는지 살펴보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듯이 야곱의 장례식에 참여한 후손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시작이 누구이며, 현재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어느곳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생생한 현장교육이었던 것이죠. 비록 애굽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해야 할 언약의 후손임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기록되었을까요? 야곱의 유언과 성취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첫째, 우리도 야곱처럼 이 땅을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왕에게 자신의 나그네길 인생이 일백삼십년이라고 대답한 것처럼, 야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그네 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문명과 번영의 땅 애굽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살았던 야곱처럼, 우리도 결국 들어가야 할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요, 세상 사람처럼 이 땅에 코 박고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을 헛되고 헛되게 보내지 않고, 의미있고 가치있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야곱의 유언은 우리가 남겨야 할 유산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 안치시켜 달라고 함으로서, 자녀들과 손주들까지 현장감 있는 실물교육을 시켰습니다. 자신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들어 수종들어야 할 언약의 백성인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유언으로 남긴 것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 147년을 살아보니, 모든 것은 헛되더라.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더라.” 이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남길 것은 결국 뭐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모든 것만 남기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남아 자녀들과 후손들의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 가르쳐 줄 이정표가 될 테니까요.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지만 이정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면서 자신은 그저 저 분을 가리키는 이정표에 불과함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이정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한 푼이라도 더 악착같이 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그들의 분복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실 것이요, 그들은 그만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부모로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실생활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즐겁게 살며, 항상 천국을 대망하며 살았던 삶이야 말로, 우리의 가족과 가문을 이끌어갈 진정한 가훈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하루가 유언처럼 살게 되겠지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며, 그분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도 말씀에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나그네처럼 살게 해 주소서.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대망하며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가족과 자녀들에게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물려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수하는 복된 조상이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3kXdsvoRz8M 

 

 

 

 

[생명의삶 / 성장큐티] 2022년 11월 16일 수요일 QT 

 

본문 : 창세기 47장 23~31절 

제목 : 성공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

설교 : 송정수 목사(백석신학대학원,연세신학대학원,행복한제자교회)

 

(찬 327장)

 지금까지 살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고, 듣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며 목표에 도달하지만, 정작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원래의 처음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실적 상황이라는 미명아래 타협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어쩌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맡을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성실함이죠. 오늘 요셉은 우리에게 성공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17세 청소년이었을 때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 드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요셉은 세상의 정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했습니다.

 

  요셉은 과거에 팔렸던 사람인데, 오늘에서 요셉은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렸는데, 이제는 애굽 백성의 몸과 토지를 산 사람이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요셉은 백성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을 보장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요셉은 비록 양식을 주고 그들의 땅을 샀지만,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소출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기만 하면 그 땅에서 그대로 살 수 있는 정책을 폈습니다.

 

  BC 18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농부들이 정부에 3분의 1이나, 심하면 2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요셉이 백성에게 부과한 세율은 무리가 없는 수준입니다. 백성들은 7년 동안 이어진 흉년으로 인해 요셉에게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의 세금만 부담하면 원래 자신의 소유하던 땅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감사를 표하며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까지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요셉의 공정한 리더십으로 인해 당시 애굽을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갖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한 사람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야곱의 70명의 가족뿐 아니라, 애굽에 몰려든 백성들까지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 현대문명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요셉은 우리에게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속에서도 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엇일까요? 바로 욕망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잠 28장 25절)에서는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씀합니다. (민 11장)에서 ’기브롯 핫다아와는 욕심을 낸 백성이 죽은 장소‘를 가르키고요,

 (시 10편 3절)에서는 “악인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약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세상의 모든 죄의 시작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개인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부딪치면 경쟁도 하지만, 하나로 뭉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핵폭탄처럼 번져 나가는 특성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이나 욕심이 적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환경적으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도는 그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의 비밀스러운 사역, 즉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갈 5장)에 보면 거룩하신 성령님의 사역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은 요셉를 도왔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런 삶을 살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령님은 직접 영접한 자의 몸에 들어오셔서 심령에 따뜻한 변화를 일으키게 하십니다. 또한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바라보는 삶도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엡 4장 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여러분과 저를 썩어져 가는 구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성공시킬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안에 들어오시면 육체적이고, 환경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요셉과 함께 하셨던 성령님의 역사가 함께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 거룩하신 성령님, 우리 안에 욕망과 욕심이 있는데, 당신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요셉의 명철과 충성스러움은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였을 줄 압니다. 오늘도 우리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진정한 성공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영적으로 부유한 자 되게 하시고, 우리가 받은 작고 큰 성공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CjS9fcfkHlU 

(찬 330)

 

사람이 한두 번은 성실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실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뛰어난 재능보다 성실함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보면 토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이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요셉에게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기근은 더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생명을 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요셉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요셉은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기근은 고대근동 지역에 임했고,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 곡식 창고의 출입(出入)을 관장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팔았고,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대 왕국 체계에서 토지 국유화를 의미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성읍 여러 곳에 분산시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이 애굽 왕실의 소작농처럼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왕이 모든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우리가 요셉의 일 처리와 그의 태도를 보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은 이 모든 거대한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돌려 자기 배만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 일관적으로 성실했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큰 과업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려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3)”고 하였고,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고(286),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2810).”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6)에서 종들아, 성실하게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고, (3)에서는 윗 사람들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에서 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자기 일에 성실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셉의 성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셉의 성실함을 우리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하소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