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94장)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증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소서’같은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이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고, 나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자랑하길 원하는데, 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자랑만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육체는 곤고하고, 마음이 지쳤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썼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어떤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미 큰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커가는 것을 보고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자녀의 존재는 곧 부모의 기쁨인 것이죠. 그런데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힘든 인생 길도 견딜만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를 사고, 얻으면 잠시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 같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안에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직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1~3)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을 경계하라고 거듭 당부하며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을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며,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4~8)까지는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조건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조건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무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랑할만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해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가장 귀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죠. 거기에 견줄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바울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이기에 율법으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야라는 자랑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에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자랑스러워 하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탁월한 신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에 보면 바울 자신이 받은 의롭다는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중에 하나가 뭐죠? 바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보면 내 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는지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죄를 사했다는 쪽으로 가야 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실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서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8hjU_6z73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자신보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인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그분을 자랑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육체와 환경만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예수 그리스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로 사십시오. 그것이 복이요, 그것이 참된 승리의 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찬양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자랑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신실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찬 351장)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고민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22,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나은지, 사는 것이 나은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사는 것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위해서는 자신이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개인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 즉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은 하나님나라 천국백성으로써 천국의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음으로 서 있다라는 표현은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앞둔 군사들이 우와 열을 맞춰 전쟁터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협력하다’를 NIV성경에서 컨텐딩 애즈 원 맨 contending as one man’.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되어 함께 싸우는 모습이 천국 백성의 합당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리더는 바울이죠. 그런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사로 잡혀간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경제적 문제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감정에 잡혀 있고, 어떤 이는 나쁜 습관에 잡혀 있습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오늘도 집요하게 사로잡힐 만한 문제들로 단단히 결박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마귀가 바라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힘을 잃고 더 이상 일어나길 포기하길 원합니다. 기도생활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간계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마귀를 대적하여서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나가 되어 싸우라는 것입니다.

과연 천국의 백성답게 사는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둘째, 무슨 일에든지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28)을 보세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마귀가 성도들을 가장 잘 넘어지게 하는 비결은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두려움일 것입니다.

전쟁에서 최고의 전술은 뭘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죠.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요? 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겁을 먹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이긴 것이나 진배가 없게 되겠죠.

우리가 자주 환경을 바라보고, 내 약한 몸을 바라보고 한숨이 터져나오고, 이제 무엇을 하겠나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려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하겠나 주저 앉고 싶을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어느 것도 하기 싫을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요,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입니다.

(14)에서 홍해 앞에서 두려워 하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본문 (2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믿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

또 이 부분을 새번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kQ3Z6w3_U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어떻게 하면 고난이 특권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질병이 있습니까? 그 질병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가난이 있습니까? 역시 그 가난이라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세요. 실패가 있습니까? 역시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돼죠? ”주님,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장큐티 가족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즉 싸우는 것이다. 이단들과 세상의 헛된 지식과 타락한 문화와, 우리를 사로잡고, 두렵게 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협력합시다. 그리고 당당히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함께 하실 것이요, 우리를 당신의 오른 팔로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바울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만났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뜨거움을 주시고, 협력하는 마음을 주셔서 세상과 마귀와 싸우기 위해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 이미 이긴 싸움이니, 끝까지 밀고 전진하게 하소서.

 

 

(고후 212- 35)

자아정체감 (égo idèntity)’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제적인 느낌을 말합니다. 즉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전체 느낌이죠.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나요? 그 느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1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두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각처에 퍼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14)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하고, 항상 이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때, 즉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의 승리의 행진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향기를 자신이 있는 곳에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에나나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16,17)은 누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으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안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실제로 복음을 믿고 순전하게 전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면 우리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로 각국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 꼭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시작합시다!

기회를 잡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저들에게 있는 죽음의 독가스를 몰아내고,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시다.

착한 일과 섬김을 통해 참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퍼트리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www.youtube.com/watch?v=T1Hmjiv6z68

 

www.youtube.com/watch?v=ed03V3NErU8

 

 

(고후 112-22)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와 아멘이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16개월동안 머물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교회교인들을 특별히 생각했고,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바울의 사도직분도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인격도 못 믿을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해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12(원어성경)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해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되지 않게 행동했다는 뜻이에요.

좀더 자세히 풀어보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으로 행동했다고 했는데,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거룩함을 단순함, 솔직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정직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실함으로 행하였다고 했는데, 여기 진실함은 햇빛에 비춰보아도 투명하다는 뜻으로, 성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동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관점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명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진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 더 방문할 계획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오히려 그들에게나 바울 자신에게도 더 유익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23) 이 결정은 사람들에게 변덕쟁이이라는 비난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에서였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긋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어긋난 계획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아멘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성도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하고 달려가면, 하나님은 모든 문제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오해도 있어 해명도 해야 하고, 자신과의 사이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고린도교회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든 관계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아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대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 이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어떻게 행동하며 살라고 교훈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함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무엇을 하든지, 그게 가정일이든, 학교나 회사일이든, 사역을 하는 것이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투명하게 일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떳떳하고 성실했어도 오해하는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도 오해를 받았고, 심지어 예수님처럼 깨끗한 분도 오해를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어도 오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신앙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고 옳은 일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적극 해명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행함으로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을 오해하여 비난하거나, 뒷담화까는 사람이 있어도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낙심하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십시오. 바울처럼 계속해서 믿음의 선을 행하고,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움으로 직진하십시오.

오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계획의 변동이나 수정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와 아멘이 됩니다.

사람의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죠. 때로는 뜻이 어그러지고, 어쩔 수 없이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뜻대로 안된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의 수정안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계획의 수정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예와 하멘으로 화답하며 기도하며 나간다면, 지금 어긋난 계획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계획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계획대로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가지십시오. ‘아멘, 예 그렇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신 계획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와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사단에게 밀리지 말고, 이겨내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적 승리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FbHoJ1Zb9OQ

 

(고후 11-11)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입니다. 내용은 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신앙적인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그 교회안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내용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퍼트린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들이 떠돌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력한 빛으로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충분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정확한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시작부분으로써 서론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첫째는 위로의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선순환이란 좋은 순환이란 뜻이니까, 나쁜 일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되게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난이 선은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바울은 그것이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속에서 위로라는 선을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위로받음으로서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기독교의 영성작가는 상처입은 치유자, 더 원디드 힐러(the Wounded Heal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상처입은 치유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가르켜요.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것이죠.

역시,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고난으로 큰 아픔을 겪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그 아픔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가 침몰하여 자녀를 잃은 큰 고통을 당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이에요.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이 고통을 우리가 겪게 하심으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위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의 끝을 경험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너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가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도 나처럼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지 않겠니?’라고 물어오십니다.

이 귀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의 사역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의 가르침은 초죽음으로 몰고가는 큰 고통의 문제는 이것을 겪는 사람에게도 큰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죠.

사실 이런 고통은 주요 사역자들에게 있었던 고통이에요.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 죽음 직전을 경험했고, 모세도 (11)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였으며, 예레미야는 (20)에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형선고와 같은 고통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때,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런저런 고통을 다 겪은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바울의 말이 실감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하셨습니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저에게도 사형선고와 같은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하는 공격에 뭇매를 맞고, 소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그게 항상 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다시 멋지게 우리를 살려내셨고, 오늘자기 이르게 하셨습니다.

악한 마귀는 성도인 우리를 괴롭혀 죽이려고 덤벼들고, 어떤 사람들도 그것에 동조하여 문제로 위협하고 얼토당토없는 말들로 성도인 우리들을 공격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까?
도리어 그 고통의 문제들이 성도인 우리를 겸손하게 했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가장 처절한 상태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붙잡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동의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마음에 간직합시다.

두 가지를 가르쳤는데요, 첫째는 고통중에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둘째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는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오늘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김이 빠져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기가막힌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종결자이십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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