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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장 1-11절)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입니다. 내용은 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신앙적인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그 교회안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내용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퍼트린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들이 떠돌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력한 빛으로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충분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정확한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시작부분으로써 서론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첫째는 위로의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선순환이란 좋은 순환이란 뜻이니까, 나쁜 일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되게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난이 선은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바울은 그것이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속에서 ‘위로’라는 선을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위로받음으로서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기독교의 영성작가는 ‘상처입은 치유자, 더 원디드 힐러(the Wounded Heal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상처입은 치유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가르켜요.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것이죠.
역시,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고난으로 큰 아픔을 겪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그 아픔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가 침몰하여 자녀를 잃은 큰 고통을 당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이에요.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이 고통을 우리가 겪게 하심으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위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의 끝을 경험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너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가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도 나처럼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지 않겠니?’라고 물어오십니다.
이 귀한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의 사역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바울의 가르침은 초죽음으로 몰고가는 큰 고통의 문제는 이것을 겪는 사람에게도 큰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죠.
사실 이런 고통은 주요 사역자들에게 있었던 고통이에요.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 죽음 직전을 경험했고, 모세도 (민 11장)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였으며, 예레미야는 (렘 20장)에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형선고’와 같은 고통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때,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런저런 고통을 다 겪은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바울의 말이 실감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하셨습니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저에게도 ‘사형선고’와 같은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하는 공격에 뭇매를 맞고, 소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그게 항상 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다시 멋지게 우리를 살려내셨고, 오늘자기 이르게 하셨습니다.
악한 마귀는 성도인 우리를 괴롭혀 죽이려고 덤벼들고, 어떤 사람들도 그것에 동조하여 문제로 위협하고 얼토당토없는 말들로 성도인 우리들을 공격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까?
도리어 그 고통의 문제들이 성도인 우리를 겸손하게 했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가장 처절한 상태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붙잡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동의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마음에 간직합시다.
두 가지를 가르쳤는데요, 첫째는 고통중에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입니다.
둘째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는 성도의 생존법칙이죠.
오늘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김이 빠져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기가막힌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종결자이십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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