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고후 7장 2-16절)

 

 관계심리학에서 사람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꼭 잊지 말고 실행해야 할 원칙이 있는데, 3/1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나 권면을 할 때는 먼저 3번 칭찬하고 1번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에게 먼저 3번 칭찬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누군가의 충고나 권면을 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부분이더라도, 충고나 권면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면서 기분이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충고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충고나 권면을 잘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도 잘 받으면 인격과 신앙에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8-9)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권면을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디도 편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부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편지 안에는 이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이런 편지는 고린도 성도들이 기분 나빠하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고, 솔직하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묵인하는 것은 복음의 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단받는 것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고 일단 덮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빨리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더 옳은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요.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의 사랑이 전달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충고를 해야 하고, 사랑의 충고를 잘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지혜이고, 믿음입니다.

 

(10-12)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근심을 두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세상 근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사실이 아닌 헛소문과,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인 것을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 근심했습니다.


(
적용) 모든 근심이 다 나쁜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근심은 유익하고, 그 사람을 멋지게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거나 돌아보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 생기는 근심은 사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말씀앞에 바로 서기 위해 진지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쓴 것은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얼마나 이들이 잘 따라 왔는가? 바른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리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권면과 충고는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3-16)에 보면 고린도 성도들은 순종적인 자세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를 환대했고, 바울의 권면을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사도들에게도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힘들지만 그래도 순종하며 나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디도의 권위를 존중했고, 심지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만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자세는 한 마디로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7)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복음에 대해 너그럽고 사모하는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복음과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신앙발전과 인격 성숙을 위한 충고나 권면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몸에 좋은 것은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비록 듣기에 불편하거나,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충고는 큰 유익이요,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충고나 권면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없는 충고는 자칫 허물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리 3번 듣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면,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심어린 충고와 권면은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권면도 충고도 잘 하고, 잘 받을 수 있는 성도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올해는 공동체나 개인까지, 우리 모두 부쩍 성장하는 해로 만들어 봅시다.

 

www.youtube.com/watch?v=hsGi62tgx5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 511-21)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을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까지 받았다고 바울은 구독자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 말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이 우리 인생을 바뀌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은 헬라어로 카이네 크티시스인데, 이것은 새 창조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우주적 차원에서 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뜻이죠. 기존의 질서들을 다 부수고,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 만들어진 그릇이 있는데, 토기장이가 그것을 깨부수고 버린 게 아니라, 그 파편조각들을 다시 잘게 부수어 새로운 작품그릇으로 재탄생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새로운 창조작업에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은 어릴 때는 참 좋은 꿈을 가지고 순수하게 출발합니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이 되겠지?라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환경속의 인간(person in environment)’이라고 살면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척,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까지, 멀리는 정치, 교육, 윤리와 가치, 신념, 관습, 문화와 주변환경까지 이 사람의 성품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러면서 이런 환경체계안에서 한 인격체로서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이 사람은 온전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여기저기 터진데다 피를 흘리고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온 가시들을 가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면서 당하는 상처와 피해, 또는 부정적인 말들이나 교육으로 인해 이렇게 흉측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생긴대로 산다고, 이 모습이나 성향을 바꿀 수 있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평생 갖고 살다 죽어서야 내려놓게 되는 거죠. 심지어 아주 힘든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다는 수행자들도 자신의 죄악된 성향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조금은 좋아질지언정 근본적으로 새 사람으로는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빅뉴스가 있어요. 바로 오늘 본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못된 성격장애자나, 죄악된 행실로 살아온 사람도, 또는 자신은 착하다고 생각하고 남들을 판단하고 있는 찌질이까지, 아니 모두가 인정하는 그보다 더 큰 죄악된 삶을 살아온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런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되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 실제로 깊이 공감하고 실감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한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면서 천지창조에 직접 관여하신 분이고, 심지어 그분이 없이는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세주로서 3년 반을 사시면서 자신이 창조자이심을 분명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고, 미친들이 불어닥치는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셨으며, 수많은 불치의 병을 단번에 고치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본인도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증명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새로운 창조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과거에 육체를 따라 생각하고 행하던 것들이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과 제가 믿는 예수는 바로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고, 대단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 분안에 거하시는 것을 가장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단번에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피로가 누적되어, 짜증 섞이고, 가시처럼 톡톡 붉어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어떤 일에도 감동도 감사도 없는 굳은 살 베긴 올드한 신자가 아니라, 오늘 아침에 예수님 안에서 시작하는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아침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 아침이에요.

주 예수안에서 당신은 새로운 창조물로 재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주님은 하고 계시고,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이 오늘도 떠나지 않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의 나가 아니라, 오늘 새롭게 하신 나로 살아가세요.

오늘 하루, 한 순간만 집착하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하고, 인생 전체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세요. 오늘도 여러분의 하루에, 새 창조가 이루어지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dDZBhhiviFw

 

(고후 212- 35)

자아정체감 (égo idèntity)’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제적인 느낌을 말합니다. 즉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전체 느낌이죠.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나요? 그 느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1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두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각처에 퍼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14)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하고, 항상 이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때, 즉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의 승리의 행진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향기를 자신이 있는 곳에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에나나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16,17)은 누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으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안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실제로 복음을 믿고 순전하게 전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면 우리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로 각국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 꼭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시작합시다!

기회를 잡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저들에게 있는 죽음의 독가스를 몰아내고,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시다.

착한 일과 섬김을 통해 참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퍼트리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www.youtube.com/watch?v=T1Hmjiv6z68

 

www.youtube.com/watch?v=ed03V3NErU8

 

 

(고후 112-22)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와 아멘이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16개월동안 머물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교회교인들을 특별히 생각했고,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바울의 사도직분도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인격도 못 믿을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해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12(원어성경)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해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되지 않게 행동했다는 뜻이에요.

좀더 자세히 풀어보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으로 행동했다고 했는데,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거룩함을 단순함, 솔직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정직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실함으로 행하였다고 했는데, 여기 진실함은 햇빛에 비춰보아도 투명하다는 뜻으로, 성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동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관점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명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진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 더 방문할 계획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오히려 그들에게나 바울 자신에게도 더 유익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23) 이 결정은 사람들에게 변덕쟁이이라는 비난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에서였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긋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어긋난 계획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아멘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성도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하고 달려가면, 하나님은 모든 문제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오해도 있어 해명도 해야 하고, 자신과의 사이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고린도교회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든 관계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아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대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 이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어떻게 행동하며 살라고 교훈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함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무엇을 하든지, 그게 가정일이든, 학교나 회사일이든, 사역을 하는 것이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투명하게 일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떳떳하고 성실했어도 오해하는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도 오해를 받았고, 심지어 예수님처럼 깨끗한 분도 오해를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어도 오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신앙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고 옳은 일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적극 해명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행함으로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을 오해하여 비난하거나, 뒷담화까는 사람이 있어도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낙심하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십시오. 바울처럼 계속해서 믿음의 선을 행하고,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움으로 직진하십시오.

오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계획의 변동이나 수정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와 아멘이 됩니다.

사람의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죠. 때로는 뜻이 어그러지고, 어쩔 수 없이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뜻대로 안된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의 수정안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계획의 수정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예와 하멘으로 화답하며 기도하며 나간다면, 지금 어긋난 계획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계획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계획대로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가지십시오. ‘아멘, 예 그렇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신 계획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와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사단에게 밀리지 말고, 이겨내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적 승리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