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325장)
성경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복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사울의 모습은 두 삶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형통함을 경험했다면, 사울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울은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처럼 창화하는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시기와 분노의 마음을 털어내리지 못하자 그 자리에 악령이 침투해 사울의 광기가 시작됩니다.
한편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그는 더 지혜롭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먼저 (10~11절)까지 말씀해 보면 사울에게 악령이 내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시기에서 시작한 마음에 증오가 자랐고 그곳에 악령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정신없이 떠들어댔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살해할 만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윗은 사울을 위해 평소와 같이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닙니다. 그의 위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군대 사령관이 되어 백성에게 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잊지 않고 여전히 겸손하게 그를 섬겼습니다.
다윗의 손에 든 수금은 그가 양을 치며 지내던 목동 시절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늘 손에 들고 다니던 악기였습니다. 그 수금은 그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혼을 치유하는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상을 기록한 저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의 손과 사울의 손을 교차해서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생명을 살리는 수금이 들려 있는데 사울의 손에는 생명을 해하는 창이 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손에 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아버리겠다며 있는 힘껏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두 번이나 다윗은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위해서 도구를 잡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에르치노,'다윗을 공격하는사울',1646.

 

 (12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동행하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울도 그 사실을 깨닫고 다윗을 두려워했는데요.
사울은 다윗을 떠나게 할 방법을 찾아 다윗에게 천부장이라는 직책을 주어 야전 사령관의 임무를 맡도록 멀리 떠나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백성들 앞에 출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다윗이 부지런히 군사들과 백성들을 살피며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의 성실과 충성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고 타윗은 더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다윗이 원래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의 지혜와 성실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는 여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정도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다는 구절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일하시고 도우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됩니다.
다윗은 젊고 온유하며 전쟁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따랐고 왕은 이미 백성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한 후 그것을 다시 뽑아 사울에게 되던지는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백성을 선동해서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묵묵히 창을 피하고 멀리 떠나라면 그 자리를 묵묵히 떠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십니다. 수량을 맡겨주신 부분에 있어서는 그렇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 맡기신 수량에서 보면 공평하지 않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맞는 분량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신 불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하고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다섯 달란트를 만들어내라고 말씀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달란트 받았으면 한 달란트로 두 달란트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면 그건 역시 잘못된 것이요, 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분노하고 질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마음의 고통만 더해갈 뿐입니다.
마치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사울왕이 가야 될 길이 있고 다윗이 가야 될 길이 있어요.
사울왕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고 다윗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미움으로 질투하지 않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윗을 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이스라엘에 가장 위대한 성군 다윗을 세운 더 훌륭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자기의 마음의 고통이 왔고요 그는 평강을 잃어버리고 사탄이 그의 심령에 자리 잡아서 괴로움을 더해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uh1KoF5Pro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고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창을 드시겠습니까? 수금을 드시겠습니까? 창을 든 자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평안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말 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남을 축복하는 자세로 수금을 타는 것과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복되고 가치 있고 값어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온유함을 지키는 그런 다윗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창이 아니라 수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다윗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고요 그 지혜는 더 날이 갈수록 날카롭고 예민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모든 인생의 길에는 하나님이 더욱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지혜롭고 강한 주님의 승리가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사울의 창이 아니라 다윗의 수금을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 지혜롭게 행동했던 다윗의 편에 서겠습니다.
오늘 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가 항상 지혜롭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옵소서 오늘 또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원유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드는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46장)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 뜨림으로 전세는 완전히 이스라엘로 기울었고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블레셋을 향해 진격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승리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새로운 계획들을 내다보게 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겨 왕권을 확립했듯이 다윗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 권위를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이제 다윗의 대적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 사울로 바뀌기 시작하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본격적으로 사울과 다윗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누가 진정 하나님이 세우신 참 왕인가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50절부터 54절까지 보면요.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상징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칼이 대표적입니다.
분문은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고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겼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왕위를 상징할 칼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았음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쓰러뜨린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웠는데 이후 그 칼은 성소에 맡겨졌다가
다시 다윗에게 주어져 그의 왕권을 상징할 칼이 됩니다.

하나님은 전에 블레셋의 신 다원의 머리를 베셨듯이 이스라엘 왕 다윗은 블렛의 장수 골리앗의 머리를 배웠습니다.
사실 블레셋은 요나단에 의해서 얼마 전 큰 타격을 입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예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인 골리앗을 믿고 쳐들어온 것인데요.
그런데 믿었던 골리앗이 허망하게 한 방에 쓰러지자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몰아내고 많은 전리품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에게서 왕의 칼과 갑옷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갑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힘과 재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55절부터 58절의 내용은 사람에게 주목하는 가짜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는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신하나, 백성의 존중을 받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금식을 선포하기도 하고 불순종의 책임을 백성에게 돌리는 어리석음을 이미 드러냈습니다.
사울은 골리앗 앞에 나선 소년이 자기가 악령에 시달릴 때마다 가까운 곳에서 수금을 탔던 소년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을 처음 만나 수금 연주를 들었을 때는 마음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의 아들이라던지 그가 어느 고향 출신인지조차도 물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앞에 섰는데 이는 누가 더 강한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 앞에서 겸손히 자신이 ‘주의 종 이세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는데요.
만약 사울이 지혜로운 통치자였다면 요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다윗을 아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경쟁자로 여기며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은 자기 능력으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사울은 (창세기 49)에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난다고 하는 예언을 멸시했는데요.

유다 지파에 대해서 축복하기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오고 실로이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 왕위가 존속된다고 하는 예언을 사울은 무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고, 자기의 역할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세워질 때 그를 축복하고 왕의 권한을 위임하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자신의 왕위를 유다 지파가 아닌 자기 아들을 통해서 계승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마음은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하고 다윗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죽이려고 하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울처럼 늘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과 사명을 주셨으며 그 복과 사명은 정해진 때까지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자신의 현 상태와 받은 복과 사명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동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주신 복과 사명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붙들려서 쓰임받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과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실 때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마지막 때가 올 것이고 그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가야 할 테니까요. 지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복과 사명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위나 제사는 모두 본질이 아닌 외형이요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껍데기를 잃지 않으려고 본질인 목숨을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질에 집중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왕이 되었고 왕위에 집착한 사울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과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더 아름답게 유지하고 더 귀하게 쓰임받는 기회인 것을 잊지 맙시다 또한 더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인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사명을 선용하여 활용하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eL3zjBhq8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복과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복과 사명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때가 있고 옮기실 때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셨을 때 복과 사명을 잘 감당해낼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더 모든 것을 가져가시기 전에 주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고 활용하여 하나님 안에서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는 복된 성도로 또 사명자로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300장)

 

인생은 전쟁터 같습니다. 그런데 싸우기 전에 정신적으로 기가 눌리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도가 감당해야 되는 싸움은 물리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한 믿음이 승리를 좌우합니다. 악한 영적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크기와 두께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믿음으로 무장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크고 두려운 세상을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1~7절)까지는 크고 강한 골리앗의 출현입니다.

요나단의 활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패했던 블레셋은 다시 힘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블레셋은 에베스담밈 언덕에 진을 쳤고 이스라엘은 그 맞은편 산에 진을 쳤습니다. 두 군대가 평지를 두고 양쪽 언덕에 진을 친 상황에서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하게 되기 때문에 싸움의 초반부에서 심리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두 진영 사이에 ‘싸움을 돋우는 자’, 즉 두 진영 사이의 평지에 내려와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도발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골리앗이었습니다. 키는 6규빗 한뼘, 290센티미터 정도 되는 사람이었고, 5천 세겔, 약 57kg의 갑옷을 입고 있었고 600세겔, 7kg의 창날을 가진 거대한 창을 휘두를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골리앗의 이러한 거대한 모습은 세상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후에 사무엘서를 쓴 저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처럼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면 블레셋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참 안타까운 것은 교회도 은연 중에 세상처럼 크고 강한 존재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고 강함 역시 껍데기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크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제자로 삼기보다 단지 12명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크고 강함보다 진실하고 참된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너무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거나 쫓아가지 마세요. 참되고 진실한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쓰십시오 그것이 여러분과 저를 더욱 값지고 복되게 할 것입니다.

 

 

(8~11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에는 대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한 싸움에서는 계속 대치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골리아스는 그런 상황이 답답하다는 듯이 1대 1로 싸움을 벌려 전쟁을 끝내자며 이스라엘을 충동했습니다.
이긴 사람의 나라가 패한 자의 나라를 노예로 삼자는 것이죠.
여기에서 ‘나는 블렛의 사람’이라는 골리아세의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자기는 블렛의 사람 중에 블레셋 사람 블레셋의 대표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사실 ‘너희는 사울의 노예들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들이라고 비웃고 있는 것이죠.

원래 노예들은 당시 물건처럼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존재이므로 지금은 사울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만 블렛의 사람들을 주인으로 섬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그런 뜻입니다.
결국 골리앗은 사울더러 나와서 너의 노예들 즉 백성들을 우리에게 빼앗기지 말고 지켜보라고 도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분노하며 나서는 자가 없었고 그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자격을 상실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원했지요. 그들을 대신해서 싸워주고 용감하게 물리쳐줄 위대하고 멋진 왕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울왕의 모습은 백성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두려워 떠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사울은 더 이상 왕의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신 후에 새롭게 세워질 왕을 소개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게 바로 다윗이죠.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리앗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듯이 우리도 세상에 크고 강한 존재들을 볼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크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본질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지혜를 가진 자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역대상 1626) “만국의 모든 것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444) ”사람은 헛 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단해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헛것이요 바람과 같은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3)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느니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하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https://www.youtube.com/watch?v=FVGR4SkrBvQ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성도와 함께 계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두렵고 무섭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골리앗과 같은 헛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달려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종 다윗처럼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세상은 크고 두렵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운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우리의 삶의 과제들을 성취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매일매일 성령의 기름 부어주시는 담대함으로 무장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 골리앞과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때론 우리가 그 앞에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떨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소서 담대하게 하소서. 어떤 문제든지 그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하시고 그 본질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손을 잡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며 극복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과업들을 다 감당해 나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명처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현명한 생각들을 주셔서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찬 191장)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 밤에 온통 깜깜하게 덮었던 어둠은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성령이 오면 악령은 떠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에게 성령이 떠나자 악령이 엄습했고, 성령으로 충만한 다윗이 오자 사울에게 악령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여전히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의 보좌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에서 왕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에게 악령의 지배가 강해지면서 피해망상증, 극도의 불안증과 정신분열 증세까지 나타났습니다.

(10)에서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자 예언도 하고, 전쟁에서 승리했지요. 지금 그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사울에게 악령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증상은 사울이 더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객관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 사울에게 나타난 정신적 불안증상들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렘브란트, '사울과 다윗'.

악령의 괴롭힘으로 발작이 일어난 사울왕에게 신하들이 다윗을 치유자로 추천했고,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연주할 대 사울의 증세는 호전되었습니다.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그것은 사무엘에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기록되었을까요? 본문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른 적용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악신이 그를 번뇌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왕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자 악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에게 악령의 지배가 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다고 해서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고, 자신의 삶과 영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자신이 주인이 되는 줄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신이 떠나가고, 악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 몸과 삶이 망가지고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영역에 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맡기며 따른다면 성령님께서 안내자가 되셔서 가장 복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두번째 교훈은 성령님께서 성도의 마음안에 내주하심인데, 이것은 성도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작은 사람들에게 임재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선지자들, 소수의 왕들에게만 성령님이 임재했습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은 대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일을 잘 수행하도록 임재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서 성령님은 마치 ‘입는 옷’처럼 임재하셨습니다. 순종하면 강력하게 임하여 역사하시고, 불순종하면 떠나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 성령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성령님은 다릅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인 철저히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임한 성령님은 성도의 구원의 보증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엡 4장 30절)의 말씀처럼 성령님은 일단 임재하고 나면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 분입니다.

신약시대 성령님은 성도의 구원의 보증으로 임하신 것이요, 한번 임하신 성령임은 성도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습니다.

그럼 성도가 만일 불순종하고, 의도적으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도인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고 살면 성령님이 떠나가지 않으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님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임재를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당연하게 여기면 감사가 없지만 당연하지 않게 여기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님께 감사하십시오. 성령님이 감동하여 죄를 생각나게 하실 때는 진심으로 회개하세요. 아울러 성령님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요 16장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롬 8장 13,14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오늘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최고로 복된 삶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
455)

‘루키즘(Lookism)’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루키즘은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을 설명한 용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로 외모 지상주의를 일컫는 용어인데요. 요즘 이런 현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알바몬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모로 인해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를 경험한 적이 있다라고 하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중 62%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에게 외모는 중요한데요. 사람들은 볼 때 외모나 외적인 조건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죠.
외모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속 사람을 보시는 분입니다.

외모가 참으로 출중했던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은 새로운 왕을 세우십니다.
새로운 왕이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미 사울을 버렸으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서 베들레헴 사람 이세에게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어요.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지만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도요 이 시대의 악함과 교회의 세락으로 인해서 안타까워하는 것만 아니라 이 땅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하고 멈추지 말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 때문에 망설이자 하나님은 암송아지 하나를 끌고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뜻에 순종하려 하는 사람에게 사명만을 맡기시는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나아갈 길을 열어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걷고 있다면 결코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 앞길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5절)에 보면 사무엘은 불안해하는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에게 평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왔다고 안심을 시켰고 이세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이세의 아들들을 성읍 장로들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명을 맡은 자에게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은 이세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왕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겉모습을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엘리아의 용모와 키는 신체적 요소 뿐만 아니라 기질이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뭐죠? 사람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영적 태도와 신실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마음 중심을 항상 하나님 앞에 고정하십시오 그것이 성도가 잘 되고 복받고 형통한 비결입니다.

 

이세의 일곱 아들이 모두 사무일 앞을 지나갔는데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일곱 명의 아들을 다 이미 달아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버렸다는 거죠. 하나님은 사울을 테스트하셨듯이 이미 이 세 아들들도 달아보시고 테스트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달아본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라고 명령하심으로 달아보셨고,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에게 붙여서 과연 타락하는 사람인지 다뤄보셨습니다. 에서를 야곱의 팥죽에 위해서 달아보셨고, 롯을 에덴 동편으로 인도하셔서 달아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상을 시작하면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출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 (2장)에 나옵니다.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이렇게 한나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그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이세의 일곱 아들이 모두 지나갔는데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자는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또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묻자 이세가 막내가 있다고 대답했지요.
‘막내’는 ‘말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장 작은 자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표현은 ‘큰 자’라는 뜻의 사울과 대조를 이루며 다윗이 장차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겸손한 자로 쓰임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큰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쓰임받는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양치는 데서 데려왔는데요. 다윗은 그 첫 인상이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외모가 아름다워서 다윗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니지요. 이 표현은 용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신 그의 내적 자질이 외모로 투영된 모습을 묘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내면의 아름다움을 소유한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과 성품으로 외적인 모습마저 아름답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멜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표현은 사울에게도 일어났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기름 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는 것은 다윗이나 사울이나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사울은 버림을 받고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가장 위대한 선왕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성령을 이미 받았지만 성령을 거부하고 역행한다면 성령의 열매는 커녕 우리의 형편이나 상황이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감동과 감화하심에 따라 순종하십시오 그렇게 살면 우리 개인에게는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거고요 또한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빛을 보여주는 증거자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감동과 감마하심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려면 중요한 것이 뭐죠?

 

"사람은 외모를 보고 이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늘도 중심을 하나님 앞에 굳건하게 세우고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말고 오늘 세상 속에 살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살아가세요.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일하실 것이며 사람을 붙여주실 것이며 환경을 열어 환경을 열어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을 통해서 올바르고 복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선택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살기 원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IWXNInpzD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세상 가운데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시고 다윗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던 것처럼 저희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내주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늘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원하오니 성령님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지키게 하시고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셔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능히 수행하고 이루어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중심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우리 중심을 받으시고 주님의 귀하신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고 활용하여 주시옵소서.

 

 



 (찬 399장)

 최근에
‘이럴 때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는 문장을 읽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기분 좋을 때 약속하지 마라 화났을 때 대답하지 마라 슬플 때 결정하지 마라”입니다. 감정이 나쁘거나 너무 좋을 때 함부로 결정하지 말고 신중하라는 것이지요.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 경솔하게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경솔함 뒤에는 허영 자만 욕심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면 다행인데 타인과 공동체의 영향을 미치게 되면 큰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초조한 마음에 경솔한 선택을 하는데요.
그의 경솔함이 불러온 과오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사울은 전세가 유리해지자 군사들에게 블레셋 정벌을 마칠 때까지는 전원 금식하라는 맹세를 시킵니다.
아마도 금식하면 하나님이 더욱 도와주시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은 당신의 뜻 가운데서 자발적인 행하심일 뿐 인간의 희생을 대가로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뜻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여겨 그분의 뜻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것이 금식 기도의 목적이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할레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6절에서 불렀지만 사울은 블레셋을 ‘내 원수’라고 24절에서 불렀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대적으로 이해했지만 사울에게 블레셋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개인의 원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러면서 맹세를 어기면 저주가 될 것이라고 하며 허기진 군사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요나단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욕심 때문에 사람을 도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연합하고 동역해야 합니다.

사울의 맹세를 모르는 요나단은 수풀에 흐르는 꿀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나중에 맹세 소식을 알고서 아버지의 겸손한 판단을 지적하는데요. 군사들이 억지로 금식하는 대신 음식을 먹고 힘을 내서 전투를 더 잘 수행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왕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면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말을 절대시하여 강요하지 말고 지혜롭고 유연한 태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악순환을 끊고 선순환을 만들어가는 복된 선택입니다.


 31절과 32절에 보면 승리가 확정되자 굶주린 군사들은 탈취한 가축을 핏자에 먹는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짐승들을 향해 달려간 그들의 모습은 사울왕의 경솔함을 닮은 듯합니다. 사실 백성은 맹세를 했지만 그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강요에 의한 맹세였기에 짐승을 핏째 먹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도 잊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중심적인 경솔한 태도는 타인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달급하고 긴급할수록 경솔함보다 진중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군사들이 믿음 없이 행했다며 책망하는데요. 하지만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사울 자신입니다.
군사들이 허기에 빠져 이성을 잃지 않도록 적절히 대처했더라면 자신이 미리 군사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했더라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통제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섬기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경솔히 여겼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에서인데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주었을 때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예수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라”라고 개혁 한글 성경이 되어 있는데요. 개역 개정에서는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단 말입니다. 그것이 에서의 가장 큰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내가 살찌고 부패하고 윤택함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 구원의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개혁 한글판에 이렇게 돼 있고요 개혁 개정 성경에 보면 ’업신 여겼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 구원의 반석을 경홀히 여기고 업신 여기게 되면 무슨 결과가 찾아오겠습니까?

경솔함은 항상 더 큰 위기를 만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IykNGbOkr8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울의 맹세는 금식의 내용보다 그 동기가 문제였습니다.
그의 맹세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고요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진정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맞추며 그분의 일하심에 여러분을 맡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경솔히 행동하지 않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되고 그 지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오늘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지혜롭게 되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결정을 해서 갈수록 좋아지는 복이 여러분과 저희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경솔함은 항상 위기를 만든다는 것을 사울왕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우리가 경솔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주신 장자의 권한 즉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잘 활용하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림으로 말미암아 나도 복되고 가정도 복되고 교회와 직장의 모든 사람들을 복되게 할 수 있는 참된 복의 근원으로 오늘 하루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분별력과 통찰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찬 449장)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현대전에서 승전의 비결은 무기의 성능과 확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성능의 무기를 확보했다고 해도 군인의 사기가 저하 됐다든지, 승리를 위한 확신과 단결력이 없다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적 전쟁에는 무엇이 중요한 승리의 요소가 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함께 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모든 위기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고, 어떤 위기라도 기회가 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단의 믿음을 통해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부자간이었던 사울과 요나단은 외모가 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에게서 찾을 수 없는 내적 매력이 요나단에게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전투가 전면전으로 번져 나가기 전에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블레셋 부대로 침투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 사울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요, 위기 상황에서 가만히 석류나무 아래 머물러 있던 사울왕과는 사뭇 다른 모습니다.

요나단의 제안에 무기를 든 소년은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요나단은 무기를 든 소년에게 명령하지 않고 제안했고, 자발적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 신뢰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확신을 따라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표징을 구했습니다. 곧 블레셋 부대 앞에서 자신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넘기신 것으로 알고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적들에게 노출해야만 하나님의 표징을 알 수 있는 위험한 행동으로,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온전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단과 무기를 든 소년이 나타나자 블레셋 군인들은 이리로 올라오라고 보여줄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표징임을 알아 차렸고, 단번에 올라가서 20여명의 적군을 죽였습니다. 단지 2명이 20명의 군사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본 블레셋 병사들에게 큰 두려움이 덮쳤습니다. 그런데다 땅까지 진동하는 지진이 일어나면서 블레셋 진영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그것이 결국 공포로 돌변하자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까지 밀려오자 블레셋 군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빠졌습니다.

그러자 숨어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도 블레셋에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와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전쟁의 승리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이게 오늘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되었을까요?

첫째, 요나단의 용맹함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용맹함은 단지 자신안에 있는 용기와 기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뜻을 분명히 알아차렸고, 그는 하나님의 사인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필요한 것은 최적의 환경이나 쾌적한 상황이 아닙니다. 요나단에게는 군사의 수나 싸우는 무기가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길 원한다는 바램이 읽혀입니다.

(6)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환경에 매몰되어 위축되지 마세요. 역사하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십시오. 환경에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오늘도 당당히 삶을 누리세요.

 

두번째,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말씀의 적용은 동역자의 중요성입니다.

요나단에게는 무명의 무기를 든 소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블레셋 진영으로 뛰어들어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동역입니다. 그들은 동역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귀한 동역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실력있고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해주는 신실한 성도입니다. 함께 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친구인 것처럼 영적인 일에도 함께 하며 협력해 주는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울왕은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두려워 떨었고 백성들도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전쟁은 하나님께 있으며 실제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의 믿음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블레셋 군인들이 떨었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습니다.

 

사울은 전에 상황이 불리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번제를 드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유리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서둘로 군대를 출발시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요나단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상황의 유리함과 불리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뜻을 구하고, 그것을 인내로서 지켜내야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TTz5HBRcoU

 

말씀의 결론입니다.

요나단에게는 있었고 사울에게 없었던 것은 신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며 사용하신다는 믿음,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세요. 죽은 믿음, 화석화 된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이 믿음이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줍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요나단의 믿음을 주시옵소서.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내 삶의 스타일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따라 움직이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기쁨이요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복된 날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을 이긴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주 예수님, 오직 말씀을 믿음으로 승리를 반드시 경험하게 하소서.

 

 

 


(찬 449장)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행위를 망령되다라고 일컫고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망령대 행하지 말고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린 사울에게 망령되이 행했다며 책망했습니다.
사울은 막강한 블렛의 군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패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주목했고요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잠언 29장 25절)에 보면 지혜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종국에는 승리와 생명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새롭게 세워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지도자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왕이 아니라 부족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떠나간 후에 사울은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했는데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스스로 번제를 드렸지만 이제 남은 백성은 600명뿐이었습니다. 사울이 남은 백성을 개소한 것은 새로운 전술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만나는 위기 앞에서 나의 지식이나 경험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야말로 개인과 가정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식임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21절)에 보면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는 철공이 없어서 쇠로된 도구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의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블레셋 사람들이 철공 기술을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에 그 기술이 전수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기자는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는 블렛의 사람들의 말을 언급하면서 철공 기술 전술을 철저히 차단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무기와 관련 없는 농기구만 수리해 주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의 땅에 농기구를 벼리러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지금 군사적 대치 상황에 있는 본문과는 달리 불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평화롭게 왕래하던 시기가 상당 기간 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그들과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은 바로 그들과 타협하고 공존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과 타협하고 공존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신앙보다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큰 위기로 지금 닥쳐온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결국에는 타협과 공존이 큰 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질서에 동화되거나 타협하며 지배받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무기에도 절대적으로 열세였고요 블레셋 군대는 창이나 칼 같은 철제 무기로 무장했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철제 무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워 이길 승산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셔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힘과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자기가 연약하고 상황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도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요. 믿음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을 아름답고 복되게 바꿔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위기는 절대 위기가 되지 못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DXhIElTluU

 

 말씀의 결론입니다.

 위기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때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상황을 통제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지혜를 쏟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나아간다면 우리 생활은 기쁠 것이고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며 우리의 모든 삶은 위기 앞에서 기회로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모든 위기를 역전시키시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위태롭고 위험하고 두렵고 걱정되는 그런 상황과 현실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신뢰하고 나아갈 때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십시오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고 위기를 잘 지혜롭게 풀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들어야 될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깨닫고 순종하며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될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그 일을 시작하게 하시옵소서.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사오니 그 말에 순종하겠습습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