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321장)

 

사무엘상,하는 한마디로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소견대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대’로를 뜻하는 것인데, (창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 타락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이 쓰여진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소돔성에도 적지만 의인은 있는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말씀을 따라사는 의인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나’라는 여성이죠. 그녀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각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일의 시작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녀가 부각된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심각한 결핍 때문이었죠. 당시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요, 죄악이라 여겼던 시대입니다. 인생에 답이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간구해서 얻는 아들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한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불임중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진짜 믿음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 말씀은 12-17절은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 18-21절은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22-26절은 다시 엘리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B-A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면서 한나와 사무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형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라는 말과 17절에 엘리의 두 아들이 “소년”이었을 떄는 동일한 단어가 쓰였습니다. 엘리의 아들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는 것이죠. 그들을 비교하며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지만 행실이 악한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레위기 7장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 나오는 것을 제사장으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구운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날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가져가라는 제사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혈통에 따라 합법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 바쳐져 성막에서 생활했고,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화려하게 짜여진 옷입니다. 이 옷은 한나가 남편이 순서에 따라 제사일을 하기 위해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지어입힌 옷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바친 엘가나와 한나를 위해 엘리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그들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출산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무명한 사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녀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엘가나와 한나가 그런 복을 받을 만큼 신실하게 살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복된 가문을 세우게 하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아무리 제도적 질서에 의해 부여받은 복과 은혜가 있더라도 그들 자신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무엘처럼 유능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들어 써서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진리는 이미 한나의 찬양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2장 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손에 붙들리어 사는 축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교만한 말과 행동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하나님께서 달아보실 때 말과 행동에 진실함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기도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신앙의 1대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엘가나와 한나가 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가까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죠. 오늘 하나님의 테스트에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교만이나 오만한 말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cb8b36sp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출생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환경이나 가문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과 가문을 변화시킬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유명한 대제사장 엘리보다 무명의 엘가나와 한나의 길을 선택하는 복된 반열을 선택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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