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19장)

암소 두마리에 실린 언약궤가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곧 큰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방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부담스럽게 여겨야 할까요? 기쁘게 맞아 드려야 할 존재일까요?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에서부터 암소에 실려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무 수레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번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희생제물의 가죽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드리는 제사법인데, 이것은 완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에서부터 온 암소를 번제물로 드리는 것은 제사의 정석은 아닙니다. 번제물로 드리는 소는 흠 없는 수소를 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의 전심을 다한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들은 밀 추수철의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영과 진리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암소를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멀찌감치 따라왔고, 암소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손수 제작한 금 독종과 금 쥐는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물로 상징하는 트로피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로 인해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며 하나님의 위엄을 더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그들은 다시 에그론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블레셋 방백들이 돌아갔다는 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곳, 우상 숭배가 만연한 땅으로 돌아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포기했고, 자신들의 섬기는 신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한편 기쁨으로 찬양으로 가득해야 할 벧세메스에 하나님의 갑작스런 진노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언약궤 안을 들여다 봤을까요? 언약궤가 훼손된 것은 아닌지 염려해서, 아니면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에 넘는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같은 성물을 함부러 다루지 말 것을 경고하셨는데요, (민 4장)에서는 여호와의 성소를 들여다 보지 말라시며, 보기만 해도 죽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삼하 6장)에서는 웃사가 제사장 신분인데도 언약궤를 잘못 다루어 죽게 되는 사건도 나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약궤와 성물에 대해 엄히 다루셨을까요?

아마도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 봤더니 별 것 없더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떠벌이거나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교만한 죄성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의도적으로 어긴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호기심을 천박한 호기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눅 23장)에 보면 천박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천박한 호기심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다면 어떤 기적을 일으킬 것인가 따위의 아주 천박한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헤롯 황제의 질문에 묵묵무답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헤롯 왕은 세상의 구세주를 직접 만났으면서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영적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쓸데 없는 호기심으로 질문 몇마디 했고, 예수님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헤롯은 아무런 감동도 없었고, 깨달음도 없었고, 영생과도 영영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헤롯왕은 결국 에수님을 직접 만나고, 질문해 봤지만, 결국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린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나, 천박한 호기김을 가진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헤롯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천박한 호기심 대상으로 여겼고, 그게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다 주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속죄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엄청나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안에 들어오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WD__EBhT0M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천박한 호기심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큰 일날 일입니다. 또는 성경을 볼 때도 그저 지적인 연구 대상으로 본다던지, 역사책으로 본다던지, 문학책으로 본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미련한 접근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겸허한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며, 합당한 영광을 돌리겠다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마침내 복을 받는 자리까지 나가야 겠다는 거룩한 목적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대상 1629,30)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99)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딤전 615~16)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찬 463장)

 여호와의 궤가 다곤 신당에 머무는 동안 다곤 신상은 엎어지다 못해 머리와 두 손이 끊어졌습니다
.
언약궤가 지나갔던 블레셋에 아스돗, 가드 에그론 성읍에는 독한 종기 재앙이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언약궤를 가져왔을 때만 해도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7개월을 머무는 동안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던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에 난 종기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결국 그들은 언약계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는데요.

하나님은 블레셋의 성읍에 언약궤가 머무는 7개월 동안 그들의 우상 숭배와 반역을 꾸짖으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앞에서 블레셋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단지 재앙이 없는 편안한 삶만을 생각하다가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꾸짖으셨듯이 우리 잘못을 징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개인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교훈은 놓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죄 문제로 징계가 받을 때가 있음을 알고 혹시 나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요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 성숙하는 길입니다.

 

 이어서 블레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앙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왕에게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고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도 참된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지요.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두려워하면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언약궤를 빨리 돌려주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을 뛰어넘어 그분이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우리 가운데 적용해보면 우리는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깊어지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있으나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가지라는 뜻이죠.
우리가 주님과 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희근 [날마다 천국을 향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베일리라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도 만났는데 그는 평생 농업공학에 몸을 바친 사람으로서 퇴직 후에 히말리아에서 그 지역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업 기술이 열악해서 식량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일리가 가진 아쿠아 폴리스라는 기술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송어의 분비물을 통과시킨 물을 식물에 공급하고 식물에게 준 물을 다시 회수해 순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어의 분비물에는 질산염이 풍부해서 식물의 좋은 비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질산염을 다 흡수하면 물이 깨끗해져 다시 송어가 그 물을 먹는 방식으로 순환되었습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송어도 많이 키울 수 있고 곡식도 잘 자라서 식량이 풍부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남아프리카 해변에서 멋지게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 제가 가진 기술을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도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모든 선물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영원한 보물을 쌓는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런 곳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런 사람 가운데 살면서 제자를 삼고 목회자를 훈련시키길 원하십니까? 제게 주신 모든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진짜 보물 영원한 보물 끝없는 만족을 주는 보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플랜 목사님의 기도처럼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그러한 경험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현실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소홀히 여긴다면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늘 기도하십시오 생활 속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과 저희에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주실 것이오 또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dXHtNMJ2Oo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늘 블레셋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들의 행동을 보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면하길 원합니다. 늘 기도 시간에도 기도하지만 기도 시간 외에도 생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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