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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에서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라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싸움의 종류는 달라도 모든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한 단어 때문이다. ‘정욕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탐스럽게 보인 것이 뭐냐? 바로 정욕인 것이죠. 죄가 정욕을 타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깨보면 결국 정욕의 문제요,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욕과 탐욕을 부린다고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게 될까요?

야고보 사도는 (2)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과 탐욕이 다툼을 낳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첫째,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한다. 둘째, 살인하고 시기해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셋째, 그래서 다투고 싸운다.

그러니까 탐욕을 채워보려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욕과 시기가 생겨, 결국 다툼과 같은 싸움판이 벌어져, 악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탐욕을 채워보려 하는데, 싸움만 일어나고 얻지 못하는 것이죠.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3)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위해 기꺼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추구하며 살아도 될 텐데, 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기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서 구하는 것을 기도만이라고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의 삶의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뭐하는 거죠? 뭔가를 추구하며 사는 겁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지 않는다.’ 광야 40년 생활처럼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참 가난하고 헐벗었죠.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다 보니까 절실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실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부자가 되어버린 거죠.

성도 여러분, 진짜 복이 어떤 것인줄 아세요?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보다 정말 귀한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16)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시인의 고백이 나와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진짜 복이 있는 상태는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기도 밖에는 할 게 없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죠.

자 다음 구절을 보세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적당히 세상과 발맞추어 짝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은 여자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둔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거죠. 세상을 벗삼아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세상과 벗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을 어떨 때 쓰였을까요?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간음한 상태는 한마디로 설명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양다리 걸친 신앙은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입니다. 99% 하나님을 사랑하고, 1%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보세요. '아니 나같은 죄인을, 정말 너무나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시기하까지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잊지 말라! 무엇을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10)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주님 앞에서 높아진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죄를 씻고,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 자신의 죄의 속성 때문에, 탐욕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일으키심을 얻는 과정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럼 겸손이 뭘까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얌전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이지요. 성경에서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뭐죠? 교만이죠.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자 겸손의 모습을 갖추면 특별한 은혜가 임해요.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높이세요. 자신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앞으로 올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세요.

오늘 주님앞에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밖에는 나에게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주님 밖에는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고백하세요. 그리하면 때가 되면 어떻게 높이시던지 주님이 높이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영어 성경에서 “he will lift you up”. 그가 너를 들어올릴 것이다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신다는 거죠. 이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환경으로부터 구원이요, 문제로부터 구원이요,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 잘했다, 잘 살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O7DEH-rfk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지만 우리 삶에도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탐욕을 부리고, 정욕으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서 낮추며,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모습임을 압니다. 주님, 우리를 리프트 업하여 주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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