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찬 321장)

 

사무엘상,하는 한마디로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소견대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대’로를 뜻하는 것인데, (창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 타락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이 쓰여진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소돔성에도 적지만 의인은 있는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말씀을 따라사는 의인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나’라는 여성이죠. 그녀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각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일의 시작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녀가 부각된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심각한 결핍 때문이었죠. 당시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요, 죄악이라 여겼던 시대입니다. 인생에 답이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간구해서 얻는 아들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한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불임중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진짜 믿음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 말씀은 12-17절은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 18-21절은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22-26절은 다시 엘리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B-A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면서 한나와 사무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형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라는 말과 17절에 엘리의 두 아들이 “소년”이었을 떄는 동일한 단어가 쓰였습니다. 엘리의 아들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는 것이죠. 그들을 비교하며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지만 행실이 악한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레위기 7장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 나오는 것을 제사장으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구운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날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가져가라는 제사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혈통에 따라 합법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 바쳐져 성막에서 생활했고,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화려하게 짜여진 옷입니다. 이 옷은 한나가 남편이 순서에 따라 제사일을 하기 위해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지어입힌 옷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바친 엘가나와 한나를 위해 엘리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그들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출산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무명한 사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녀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엘가나와 한나가 그런 복을 받을 만큼 신실하게 살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복된 가문을 세우게 하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아무리 제도적 질서에 의해 부여받은 복과 은혜가 있더라도 그들 자신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무엘처럼 유능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들어 써서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진리는 이미 한나의 찬양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2장 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손에 붙들리어 사는 축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교만한 말과 행동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하나님께서 달아보실 때 말과 행동에 진실함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기도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신앙의 1대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엘가나와 한나가 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가까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죠. 오늘 하나님의 테스트에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교만이나 오만한 말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cb8b36sp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출생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환경이나 가문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과 가문을 변화시킬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유명한 대제사장 엘리보다 무명의 엘가나와 한나의 길을 선택하는 복된 반열을 선택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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