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325장)
성경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복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사울의 모습은 두 삶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형통함을 경험했다면, 사울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울은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처럼 창화하는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시기와 분노의 마음을 털어내리지 못하자 그 자리에 악령이 침투해 사울의 광기가 시작됩니다.
한편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그는 더 지혜롭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먼저 (10~11절)까지 말씀해 보면 사울에게 악령이 내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시기에서 시작한 마음에 증오가 자랐고 그곳에 악령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정신없이 떠들어댔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살해할 만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윗은 사울을 위해 평소와 같이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닙니다. 그의 위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군대 사령관이 되어 백성에게 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잊지 않고 여전히 겸손하게 그를 섬겼습니다.
다윗의 손에 든 수금은 그가 양을 치며 지내던 목동 시절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늘 손에 들고 다니던 악기였습니다. 그 수금은 그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혼을 치유하는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상을 기록한 저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의 손과 사울의 손을 교차해서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생명을 살리는 수금이 들려 있는데 사울의 손에는 생명을 해하는 창이 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손에 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아버리겠다며 있는 힘껏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두 번이나 다윗은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위해서 도구를 잡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에르치노,'다윗을 공격하는사울',1646.

 

 (12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동행하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울도 그 사실을 깨닫고 다윗을 두려워했는데요.
사울은 다윗을 떠나게 할 방법을 찾아 다윗에게 천부장이라는 직책을 주어 야전 사령관의 임무를 맡도록 멀리 떠나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백성들 앞에 출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다윗이 부지런히 군사들과 백성들을 살피며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의 성실과 충성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고 타윗은 더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다윗이 원래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의 지혜와 성실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는 여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정도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다는 구절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일하시고 도우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됩니다.
다윗은 젊고 온유하며 전쟁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따랐고 왕은 이미 백성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한 후 그것을 다시 뽑아 사울에게 되던지는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백성을 선동해서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묵묵히 창을 피하고 멀리 떠나라면 그 자리를 묵묵히 떠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십니다. 수량을 맡겨주신 부분에 있어서는 그렇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 맡기신 수량에서 보면 공평하지 않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맞는 분량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신 불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하고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다섯 달란트를 만들어내라고 말씀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달란트 받았으면 한 달란트로 두 달란트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면 그건 역시 잘못된 것이요, 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분노하고 질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마음의 고통만 더해갈 뿐입니다.
마치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사울왕이 가야 될 길이 있고 다윗이 가야 될 길이 있어요.
사울왕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고 다윗이 감당해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미움으로 질투하지 않고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윗을 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이스라엘에 가장 위대한 성군 다윗을 세운 더 훌륭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자기의 마음의 고통이 왔고요 그는 평강을 잃어버리고 사탄이 그의 심령에 자리 잡아서 괴로움을 더해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uh1KoF5Pro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고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창을 드시겠습니까? 수금을 드시겠습니까? 창을 든 자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평안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말 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남을 축복하는 자세로 수금을 타는 것과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복되고 가치 있고 값어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온유함을 지키는 그런 다윗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창이 아니라 수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다윗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고요 그 지혜는 더 날이 갈수록 날카롭고 예민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모든 인생의 길에는 하나님이 더욱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지혜롭고 강한 주님의 승리가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사울의 창이 아니라 다윗의 수금을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 지혜롭게 행동했던 다윗의 편에 서겠습니다.
오늘 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가 항상 지혜롭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옵소서 오늘 또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원유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드는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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