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91장)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성장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수직상승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지속성장을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울을 왕으로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우리가 살아갈 때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나름 정직하게 하는데도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살아가야 할까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시작하는 첫 번째 왕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미스바는 창세기에서 야곱과 라반이 화친의 조약을 맺은 곳이며, 사사 시대에는 백성들의 총회가 열려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거나, 집회를 통해 회개하였던 공적인 장소입니다.

오늘 나라의 중대사인 왕이 선출되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백성이 모였습니다. 왕을 선출하기 전에 사사인 사무엘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압제하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모든 나라의 손에서 구원하신 분이신데, 너희가 그 왕대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달라고 해서 오늘 이날을 맞이한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다분히 인간적인 의도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죠.

드디어 왕을 선출하는 방식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제비뽑기였습니다. 결국, 12지파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에서 마드리 가족이 뽑혔고, 그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울은 짐 보따리 사이에 숨어버려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울이 단상에 올라왔을 때는 온 백성이 왕의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사울은 키가 훤칠하고,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세우며 두 가지를 확실히 했습니다. 그가 뽑힌 이유는 첫째, 그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셨다. 둘째, 그는 모든 백성보다 출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국가 방위와 통치에 적격자임을 공표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부르면서 사울은 이스라엘 왕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앞서서 언급했던 왕정 제도의 헌법을 백성들에게 공표하여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런데 왕이 된 사울은 왕궁이 아닌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아직 이스라엘이 사사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에는 사울이 왕으로 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으로 남겼고, 사울은 그들의 저항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깨닫고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첫 번째 핵심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왕이셨고,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여 따로 왕을 세우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패역입니다. 동기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이요, 물질과 생활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주인 되고, 물질이 주인 되고, 사람이나 우상이 주인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우리의 생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완성된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백성도 품으셨고,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요청대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욕구대로 사는 삶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가를 깨우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내 욕구와 욕망대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종종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왜죠? 그것을 통해 아픔을 겪겠지만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가 아파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내 고통은 말씀의 순종에 온 것입니까? 인간적인 선택 때문에 온 고통입니까? 중요한 것은 아픔이 온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오늘도 진리를 깨닫고, 복된 삶을 깨닫고, 아름다운 인생을 향하여 재조정하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핵심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창 49장의 예언에 의하면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에서 뽑아 세우셨습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께서 미스한 것입니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사울을 뽑으셨다는 것이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음 유다 지파에 왕을 세우실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충성하고 지키면 되는 것이죠. 그러다 유다 지파에 왕을 세우시면 박수쳐주고 물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어 사울이 망쳐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정통 이스라엘 지파의 혈통에서 선택하지 않으셨고, 이방 민족의 혈통에서 뽑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자, 은혜로운 결정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괜히 유대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그 모양, 그 위치,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 누구나 큰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고, 큰 사업을 하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부르심의 목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길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중요한 것은 몇 달란트를 맡겼느냐가 아니라, 그 맡은 것을 얼마나 충성되게 감당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 선택에 감사하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감당하면 그것이 승리요, 성공이자, 가장 멋진 일입니다.

오늘 남을 시기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충성합시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갑시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 인생에 다른 것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합시다.

이것이 가장 인생을 잘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잘사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펼쳐지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Dd5-KcN-vE&t=6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사울 왕을 뽑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희도 선택하여 세상에서 뽑아내셨습니다. 사울에게 역할과 사명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같은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정해주신 경계 안에서 충성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며, 즐겁게 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성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여 귀한 일에 쓰임 받는 주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찬 458장)

모든 만남에는 뜻이 있습니다. 특히 성도의 만남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가 있습니다.
오늘은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내용입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오랜 시간 헤매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하시고 사무엘과의 만남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만남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찾아올 것을 말씀해 주셨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고 깊은 대화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먼저 (15~16절) 보면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은 우연히 보여지는 사건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기 24시간 전부터 사울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음 날 사울를 만날 것을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냐민 출신의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오직 당신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이미 하나님을 버려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절망에 빠진 그들을 구원할 왕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왕으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복되게 사는 비결입니다.

 이어서 (17~24절)까지 보면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줄 선견자를 찾았지만 선견자 사무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하나님은 확실하게 그가 하나님이 정한 사람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과 같이 대우합니다.
사무엘은 미리 초청해 놓은 많은 손님들 가운데서도 오직 사울에게 상석을 내주고 요리인을 통해 미리 준비해 놓은 최고의 음식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왕이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렸던 지도자의 권한이 끝나고 그의 아들들도 사사로서의 모든 권세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전심으로 새롭게 세워질 왕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모습은 그가 리더십으로 있으면서도 개인적 사리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순전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외적으로는 백성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결국 백성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과 봉사의 자리에서마저 서로의 영향력을 놓고 다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회이 보여준 순전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당신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살아온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 성실하고 순종적이며 겸손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데다 키도 훤칠하고 출중한 가문 출신의 자제였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을 봤을 때 외모로나 외적인 조건이나 성품으로 봤을 때는 훌륭한 왕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은 그렇게 믿음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그의 부족한 신앙 부분이 드러나게 될 텐데요.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미래의 왕에게 최선의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은 사사로운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 일처럼 행하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만남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시고 바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무 일처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을 통해서 그 만남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겼던 사무엘처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정을 세우게 하시고 사업장과 직장을 세우게 하시고 다음 세대를 세우게 하시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충성된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찬 516장)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왕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경우도 있고, 물질이나 사람, 성공이나 부유함을 왕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왕을 버리고 거짓 왕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행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나이많아 늙었고, 어느날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었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불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5)에 보면 진짜 왕을 요구한 이유가 나오는데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도 되고 싶다는 것이죠. 그들도 이방나라처럼 인간 왕을 세워, 통치를 받고 싶고, 전쟁에도 이기려면 왕이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7)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돌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 졌을 것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두가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은혜를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들이 ‘인간 왕을 요구한 것은 국가 위기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변 나라들을 막아주셔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망각해 갔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방어력으로 블레셋을 제압하고 있었다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다 사무엘은 점점 늙어가고, 그 아들들은 패역하니 불안과 염려가 백성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를 누렸는데, 그 평화가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고, 은혜를 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적) 사람들은 형통과 평안을 원하는데, 실제로 평안과 형통이 오면 불안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문제가 해결된 평안한 상태를 원하는데, 놀이터의 시소가 한 쪽 올라가면 상대쪽이 내려가듯이, 평안과 형통이 오면, 그때는 영적으로는 침륜에 빠지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또 실제로 형통하고 평안하면 기도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많아지게 되죠.

 

(잠언 30)에 보면 아굴의 기도가 나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7~9)

부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혹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잘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가난한 것이 훨씬 더 큰 복이요,
장수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보다, 경건하게 단명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복된 것입니다.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이 왕을 구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요? 주변 나라들이 왕을 세워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그들은 세상에 속한 나라들이 잘 되는 것 같고, 그들을 부러워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부귀나 성공을 부러워하면 영적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지요. 창세기 6장에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여인들을 자기 아내로 삼으면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나라입니까?

(4)에서는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5) “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율법을 주셔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게 해 주신 특별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오랫동안의 평안과 형통이 방심을 하게 했고, 신앙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망각하면, 성도도 가정도 교회도 쉽게 무너집니다.
성도와 교회는 돈이 없고, 성공하지 못해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평탄하게 살며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한 때는 은혜받고 성령도 받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다가 지금은 예배도 안 드리고, 불신자가 된 경우를 보셨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 왕은 너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지 않은 세금을 걷어가고, 자녀들을 데려가 일을 시키고, 심지어 종으로 삼아 부려먹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19)에 보세요.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아무리 경고했지만 사무엘의 권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의 대답이 (22)인데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물론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7)에 보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왕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하나님이 진짜 왕임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RyKt1U_N4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나라처럼 왕만을 요구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로 주시는 첫째 왕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 인해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은 ’왕을 버리고 왕을 얻으려는 아이러니‘였습니다.

성도는 첫째, 망각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둘째, 말씀에 방심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왕을 버리면 육신의 왕, 세속적인 왕을 원하게 됩니다. 그 왕이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71,72)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참된 왕을 믿고 따르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찬 540장)

 

인생이 힘든 이유는 뭘까요? 아무래도 ‘불확실성’이라 아닐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불안과 두려움,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전능한 능력자가 미래 일을 알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불안한 사람들은 미래를 알려준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와 운명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 수 없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사 59장)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고 만 것이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는 제사장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무엘은 소년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1)에 보면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당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도 드물었고, 이상도 많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14번째 사사이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와 군사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2절)”고 소개했는데, 이것은 노안이 온 것 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약 열두살쯤 되는 소년이었고, 엘리 제사장 밑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년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네 번이나 들었지만 엘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께서 동행하셨으나, ‘저희 눈이 가리워 알아보지 못했다(눅24장)’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 교회였던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 역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다(계3: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인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끊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고, 그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엘리가 소년 사무엘에게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지시합니다. 엘리도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이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무엘은 얼마나 든든하고, 확실하게 담대히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주로 직접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졌던 AD 1세기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말씀하셨고,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시대처럼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 일까요? 꿈과 환상과 음성에는 사탄이 끼어서, 변조하여 나타날 수 있고, 잘못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비주의가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성경 자체의 증언이 있습니다.

 (딤후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모든 성경이란 완성된 66권을 가르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경(正經), 영어로는 ’캐논(Canon)‘입니다. 표준 성경이란 뜻이죠.

이 정경인 66권 안에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개인의 문제든, 질병의 문제든, 사회문제든, 인간관계나 신앙적인 해답이 다 성경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심령안에 들아와 성경말씀을 듣거나 읽고 묵상할 때, 조명하여 깨닫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감동을 주어 깨우쳐 주십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해 답을 찾기 원할 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분주함을 내려놓고, 정규적으로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갖는 게 유익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꾸준히 가질 때 침묵 가운데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또 성도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처럼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나 확신이 있습니다. 물론 그 깨달음이 성경적이냐를 따져보고 사탄의 음성이냐, 자기 속사람의 음성이냐, 하나님의 음성이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요청하고 부르짖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잠잠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전에 모나미 볼펜 사장님이 부도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하나님의 책망이셨습니다. “너 사업한답시고 주일 잘 지켰냐? 십일조는 제대로 했냐? 성경은 얼마나 읽었냐?” 정곡을 찌를 음성이었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잘 하겠다고 고백하고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21장이 눈에 띄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해변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한 후 많은 고기가 잡히죠. 그 때 잡힌 물고기 수가 153마리입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모나미 153 볼펜을 만든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1자루 이상 사도록 50억 개를 생산할 것을 기도했더니, 그런데 정말 50억 개 목표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사람들을 통해, 목회자의 권면이나, 성도들과 대화중에 깨닫게도 하시고, 은혜받은 것을 나누거나, 복음을 전할 때 깨닫게도 하십니다. 또한 꿈이나 환상, 질병의 치유 체험, 신비한 영적 경험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또는 우리 환경이나 사건, 고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LfFZY8sXk

중요한 포인트는, 이렇게 음성을 들었다 싶을 때는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꾐에 넘어가 미혹당하여 낭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 어렵고 힘든 때에 사람들은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방황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음성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말씀을 묵상하는 큐티를 지속해야 하고, 생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때를 돌파하고, 사탄의 시험과 유혹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사무엘처럼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 들었을 때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적용하면 말씀이 우리를 복되고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좋아지는 복과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생활로 앞으로 전진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Summer Morning 1891 Artist: Emile Claus.

(찬 323장)

 사람을 항상 좋은 사람, 때때로 좋은 사람, 언제나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진짜 좋은 사람은 베려할 줄 알고, 기다려 줄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던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가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집은 특별히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길로만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특별한 선택을 한 집안에 심판을 예고하실까요?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좋지 못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고기를 함부러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음행으로 더렵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제사장이자 아비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지적하시기 보다 엘리의 죄로 지적하십니다. 엘리가 마땅히 제사장으로서도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혼을 내어 그들의 죄를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내 아들들아,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구나(우리말)”라고 타일렀을 뿐입니다.

 

 그럼 엘리는 왜 아들들의 악행을 방치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들의 악행을 막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경외심도 없고, 두려움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한 보응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소중히 여긴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망하게 해서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이실 것이요, 엘리 가문의 자손이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게 만드실 것인데, 이것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징벌하시는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예고는 어떻게 될까요? 엘리 제사장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끝장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 고 엘리 가문은 몰락하게 되지요.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집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제사장은 세습되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특권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이 실감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심판의 예언들은 하나씩 성취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제사장 특권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획하신 중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앞으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한 앞으로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본인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단번에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겠다는 미래의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특히 (24)에서 엘리가 아들들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죄악이 백성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요, 제사장은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자 어른입니다. 이들의 타락은 곧 백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 중직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챈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교회와 신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심판의 나팔을 불 때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늘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의 직분자요, 리더라면 더욱 주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예수 닮아가고,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 운동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속한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지 못한 자를 베려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도할 줄 아는 넒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상태입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성숙하고, 더 초월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사무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무엘의 길은 (26)에서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토브’인데, ‘선한, 좋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도 좋게 여겨졌지만,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토브의 선함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DlV7wHHmjc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며 보았습니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길로 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늘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토브의 자세와 토브의 말과 토브의 행동을 하는 성도로 살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비추는 빛을 통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지는 토브의 선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찬 321장)

 

사무엘상,하는 한마디로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소견대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대’로를 뜻하는 것인데, (창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 타락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이 쓰여진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소돔성에도 적지만 의인은 있는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말씀을 따라사는 의인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나’라는 여성이죠. 그녀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각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일의 시작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녀가 부각된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심각한 결핍 때문이었죠. 당시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요, 죄악이라 여겼던 시대입니다. 인생에 답이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간구해서 얻는 아들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한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불임중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진짜 믿음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 말씀은 12-17절은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 18-21절은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22-26절은 다시 엘리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B-A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면서 한나와 사무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형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라는 말과 17절에 엘리의 두 아들이 “소년”이었을 떄는 동일한 단어가 쓰였습니다. 엘리의 아들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는 것이죠. 그들을 비교하며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지만 행실이 악한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레위기 7장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 나오는 것을 제사장으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구운 고기를 먹고 싶으니 날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가져가라는 제사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혈통에 따라 합법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 바쳐져 성막에서 생활했고,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화려하게 짜여진 옷입니다. 이 옷은 한나가 남편이 순서에 따라 제사일을 하기 위해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지어입힌 옷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바친 엘가나와 한나를 위해 엘리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그들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출산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무명한 사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녀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엘가나와 한나가 그런 복을 받을 만큼 신실하게 살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를 통해 복된 가문을 세우게 하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아무리 제도적 질서에 의해 부여받은 복과 은혜가 있더라도 그들 자신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무엘처럼 유능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들어 써서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진리는 이미 한나의 찬양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2장 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손에 붙들리어 사는 축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교만한 말과 행동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하나님께서 달아보실 때 말과 행동에 진실함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기도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신앙의 1대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엘가나와 한나가 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가까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죠. 오늘 하나님의 테스트에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교만이나 오만한 말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cb8b36sps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출생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환경이나 가문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과 가문을 변화시킬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유명한 대제사장 엘리보다 무명의 엘가나와 한나의 길을 선택하는 복된 반열을 선택하는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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