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382장)

 

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가 자신의 복음역사에 참예한 것을 칭찬하며, 마지막 문안 인사를 나누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고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칭찬을 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칭찬을 하는 걸까요?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의 쓸 것을 헌신적으로 보냈고,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난에도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15)에서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이 상황은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에 그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재정 지원에 동참했다는 것이고요, (16절)에서도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16)라고 한 것으로 보아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지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선교초기부터 바울과 교제하며 기도하고 쓸 것을 공급했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가 된 것은 바울이 선물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라(17)’고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밝힙고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중보기도와 헌금을 통한 복음사역에 동역한 것을 칭찬한 것은 자신이 선물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봉사의 열매가 풍성이 맺히길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열매가 될 것이요, 성도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칭찬으로 인해 더욱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고, 점점 더 복음이 전파되는 선순환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4)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했고요, 그 방법은 사랑 가운데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라고 성장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사도 바울', 렘브란트, 1635.



특히 (18)에 보면 바울이 내게는 모든 것이 풍부한데,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것을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바울만을 위함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전파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것이죠.

자 이제 빌립보서를 닫으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공동체에 축복을 선포합니다.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기서 ‘풍성한 대로’는 ‘그의 풍성을 따라’의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에게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인 거죠.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하셨고(시 24:1). 아까워서 조금씩 주시는 분이 이시요(약 1:5),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고(눅 12:32).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딤전 6:17).

 

자, 바울도 이렇게 축복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풍성하고 넉넉한 삶에 대해 축복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형편이 어렵고, 풍족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면 전도도 하고, 선교도 많이 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사용하면 될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보면, 우리는 더 많이 간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왜 하나님은 그렇게 결과가 뻔한 길이 있는데도, 성도들을 달아보시고, 재어보시고, 훈련하시고 연단만 많이 하실까요?

첫째는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죄성이 무섭고 파괴적입니다. 죄성이란 한마디로 휴발유와 같다고 할 수 있죠. 기존에 불 위에 부으면 확하고 크고 맹렬하게 일어나서 사고를 당하고, 가만히 부어놓고 불을 붙여도 똑같이 무섭게 불이 일어납니다. 죄성은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도 얼마든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타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간교하고 사악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안에 죄성이 가득찬 인간들에게 휴발유가 부어지듯 부어지면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이 타락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못 주시는 겁니다. 물질이나 풍족한 것에 도취되어 타락한 사람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재물을 맡기실 때되면 맡기시고, 사람을 맡기실 때가 되면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과 나라를 다스릴 때가 오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더 복이니까요.

 

왜 하나님은 물질적 풍성함보다 영적 풍성함을 많이 주실까요?

둘째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온실속에 화초란 말이 있지요? 온실속에 자란 화초는 쑥쑥 자라지요. 노지보다 잎사귀가 크고, 키도 크고, 열매도 사시사철 열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죠? 비닐이 벗겨지만 온실안은 정말 난장판이 되잖아요?

식물을 제대로 키우려면 비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뙤약볕과 가뭄을 견디며 자라나야 하잖아요? 맞습니다. 이렇게 노지에서 자란 채소나 곡식을 보면 벌써 향이 다르죠. 찐합니다. 실제로 약효를 조사해봐도 월등한 성분을 갖고 있고, 당도도 훨씬 더 높습니다.

(125)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조카나, 친척 동생쯤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물론 노예도 아니시고 아들도 대우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보세요.

 

(216)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를 이렇게 칭하십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렇게 존귀한 자들이니, 달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덥석덥석 주시지 않으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처럼 사랑하시니까, 한번 더 훈련하시고, 한번 더 기도하게 하시고, 한번 더 의지하게 하시고, 한번 더 주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훈련방식입니다.
훈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고, 궁창위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며, 부족함이 없어 온전함을 이루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신앙성장을 위해서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빌립보의 관계처럼 주안에서 돈독하고, 서로 돕고, 서로 중보기도하고, 연합하여 영혼구원의 사명을 완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또한 우리 빛을 세상 사람들을 향해 비추어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저들이 예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실제적인 헌신도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이라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당당히 승리해 나간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영혼구원과 함께,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되어야 이 모든 게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주님과 교제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꿔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단지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밀착하여 동행함으로서

바울과 같이 쓰임받고, 빌립보 교인들처럼 협력자가 되는 복과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빌립보서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어려운 중에도 하늘에 창고에 쌓아 하나님의 상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들어와 구원을 얻는 존귀한 일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주님, 승리에 도취되어 희생자의 헌신을 망각하는 자가 안 되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보고 간구하고 훈련받아 존귀하게 쓰임받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찬 312장)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가듯이, 인생에도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머지는 정리할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무적 용건을 다루는데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서 그를 파송한 교회에 감사를 표현하는 편지인데요.
우리는 바울이 이처럼 감사를 표명하면서도 사실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음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먼저 (8~10)까지 말씀 보면 바울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데요.
바울은 결론적으로 바른 삶과 정결한 삶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8,9)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것은 종교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일상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즉 평강을 인사말 쓸 정도로 중시했는데 바울은 이방인이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가 유대인이 되지 않더라도 내 가르침을 따르면 ‘평강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토록 반복하던 기쁨을 또 강조했습니다.


(10) “내가 크게 기뻐함은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빌립보의 성도들의 관심이 다시 싹텄기 때문인데요.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갇혀 있다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빌립보교회와 바울은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기가 전한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빌립보교회가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만나 그동안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신앙의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고 마치 봄에 다시 싹이 올라오듯 그 생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관심은 성도들의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진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11~13)까지는 ‘늘 깨어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들이 후원한 재정에 대해서는 큰 기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쓸 것은 직접 일을 조달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은 적극적으로 독려했지만 자기가 쓸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에 대한 감사 표현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이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신을 잘못 해석해서 ‘지금 많이 궁핍하지만 견디고 있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만이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는 겁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능력은 가난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유할 때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목적이었고 현재 어떤 환경에 처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사역을 못한 적도 없었고부유해서 자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만큼이나 부유함도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가난하다고 비굴하거나 낙심하거나, 자신을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유하다고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그 물질로 헛된 일에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의 균형이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한 태도말이에요.

 

 오늘은 김의수, 데이비드 서의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아내와 나 김우수는 처음. 결혼할 때 화려하게 출발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학대학에 갔고 약사가 되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나는 결혼할 때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이었으니 조건이 세상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혼집으로 32평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래도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장 최우선으로 보고 서로를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IVF에서 신앙 훈련하는 과정에서 만나 우리의 중심에 늘 하나님을 모셨다. 만약 아내가 세상적인 조건만 보고 나를 선택했다면 결혼 1년 만에 첫 딸이 장애아로 태어난 사건과 곧이어 시댁의 사업이 망해서 쪽방을 전전해야 했던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배달, 풀 뽑기, 전단지 돌리기 등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딸 치료비조차 벌어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을 아내는 격려하며 위로했다. 아내는 아픈 딸을 24시간 돌보느라 어렵게 공부한 약사 자격증을 쓰지 못하는 것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충분히 돈을 벌겠다고 뛰어나갈 만도 한데 아내는 그 좁은 집 안에서 내가 벌어오는 적은 돈에 자족하며 힘든 시절을 묵묵히 이겨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부부 가운데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위에 지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풍파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 위에 결혼해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좋은 스펙으로도 실업자가 될 수 있고 많은 돈도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모든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해 믿음의 반석 위에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가정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본질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그런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군사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상에 맞서는 자들입니다.

경제적 상황이 고려 대상일 수는 있지만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자기가 맡은 보직을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능력과 지혜와 모든 상황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힘들고 어려운 그런 조건에서도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존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QyXDO8P-M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도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평강의 샬롬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해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항상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균형을 잘 유지하고 지키는 성도로 살게 해주시옵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오늘 또 말씀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신 모든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나아가는 복되고 충성된 주님의 종들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저에게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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