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94장)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증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소서’같은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이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고, 나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자랑하길 원하는데, 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자랑만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육체는 곤고하고, 마음이 지쳤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썼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어떤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미 큰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커가는 것을 보고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자녀의 존재는 곧 부모의 기쁨인 것이죠. 그런데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힘든 인생 길도 견딜만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를 사고, 얻으면 잠시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 같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안에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직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1~3)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을 경계하라고 거듭 당부하며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을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며,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4~8)까지는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조건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조건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무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랑할만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해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가장 귀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죠. 거기에 견줄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바울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이기에 율법으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야라는 자랑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에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자랑스러워 하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탁월한 신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에 보면 바울 자신이 받은 의롭다는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중에 하나가 뭐죠? 바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보면 내 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는지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죄를 사했다는 쪽으로 가야 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실로 의로워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서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8hjU_6z73c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자신보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인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그분을 자랑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육체와 환경만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예수 그리스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로 사십시오. 그것이 복이요, 그것이 참된 승리의 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찬양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자랑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신실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Greatest in the Kingdom

 

(455)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교회가 있고, 내형적 교회가 있지요. 외형적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지만 내형적 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일 수 있지만 진짜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말이 많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된 교회는 사랑과 권면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쫓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교회는 하나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으며, 지역의 교회들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경쟁하기 바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한 마음을 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라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한 마음을 품고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겸손함으로 한 마음을 품으라(1~4).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안에서 진짜 교제가 이뤄지고, 서로 끈끈하게 삽겹줄로 하나되려면 권면, 사랑, 긍휼 이 세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한 마음만 되면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며, 또 엄청난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각자의 은사와 성품,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툼과 허영입니다. 사탄이 성도를 다툼과 허영을 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이기심에서 비롯되고, 그 이기심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직 겸손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다른 지체의 일까지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이 교회를 진짜 건강하게 만듭니다(4).



 둘째,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5~8).

신앙생활에서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과 겸손입니다. 교만하기는 너무너무 쉽습니다. 본성이니까요. 그러나 겸손은 정말 어렵고 힘듭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려는 것이 겸손입니다. 매일 연습해도 겸손함을 유지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마치 외줄타고 균형을 잡는 것만큼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헤를 주시고, 복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인 교만으로는 교회가 절대로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목회자만도 아니고, 성도만도 아니라 모두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죠.

교만하기는 목회가 늘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교만하기 십상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안의 직분자들이나, 오래 출석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나 예외없이 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 말씀안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이 타락한 땅에 태어나신 것만해도 기가막힌 일인데, 심지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서 가장 천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거친 강보에 쌓였고, 말밥통에 뉘실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낮아지심에 대해 한마디도 하나님께 불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의 겸손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하면 모든 신앙생활의 헛것이요, 모든 기도가 시간낭비요, 모든 헌신과 예배가 엉망진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왔으나, 가장 비참하게 하나님을 섬긴 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겸손의 교과서가 되어 주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영원한 샘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8qR13UzM8

 사랑하는 성장 큐티 가족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겸손하기를 힘쓰십시오.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 곧 경건생활이고, 겸손이 곧 성품으로 나타날 때 예수님이 전해지며, 겸손하게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훈련보다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가 이렇게 예수님처럼 겸손하기를 힘쓰고 집중할 때, 교회가 하나되고 반석위의 교회처럼 강건해 집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겸손할 때, 가족 식구들이 은혜를 받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존중해 줄 것입니다.

오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겸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령님께서 겸손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오늘도 겸손하여 가장 귀하게 쓰임받는 멋진 제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오늘 가장 쉬운 것은 교만이고, 교만은 사탄에게 속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성령님, 겸손하게 하소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겸손한 종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고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 자신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영광과 존귀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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