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9장


 (
찬 397장)

‘위기가 곧 기회다’라고 하는 말이 있죠.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도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용병 노릇을 했던 다윗은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지요.
블레셋의 편에 서지 않으면 생존 위협을 받을 것이고 블레셋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우면 자기 동족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다윗에게 피할 수 없는 크나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스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신하였던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다윗의 참전을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또한 방백들은 오래전에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상기시켰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던 그 노래 가사를 아기스에게 이야기하면서 방백들은 다윗이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 노래 가사를 들었을 때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그 노래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다윗의 인생에 이렇게 구겨지고 힘든 순간들이 많아졌던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방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윗을 세 번이나 인정했습니다. 이제까지 다윗에게 허무를 본 적이 없었고(3절)에 정직하여 악을 찾을 수 없었고(6절)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하다고(9절)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의 강력한 항의로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라고로 돌아가게 되지요.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블렛의 진영의 군사로 참여하지 않게 되고 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과 맺은 언약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뜻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그저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위기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길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위기 때마다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오래전에 불렀던 여인들의 노래가 다윗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되었지만, 오늘 그 노래가 이스라엘과 싸움을 피하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뼈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또 우리가 만났던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서 별처럼 빛나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로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해서 안전을 도모하려 했고 또 오늘 본문에서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 속에서 그조차 선으로 바꾸셔서 신실한 약속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 불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윗을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다윗처럼 여러분의 상황도 막막하거나 답답하십니까 우리가 이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이십니다.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희에게 넘쳐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H7qH7LrRg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피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위기 어려움의 위기 질병의 위기 문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불의하고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문제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조합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을 간절히 바라며 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사무엘상 28장


(찬송가 543장)


(27장)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갔고, 아기스 왕 아래에서 평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28장)에서 아기스 왕이 함께 이스라엘을 쳐서 공을 세우면 큰 보직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 때 사울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으며 크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가 거룩한 전쟁임을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물었는데, 첫째는 꿈이요, 둘째는 제사장을 통해 듣는 우림이었고, 마지막은 선지자를 통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진짜 잘못된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무엘이 죽었을 때 내쫓았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이 엄격하게 금하는 주술로라도 확신을 찾으려 집착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 과도한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를 자행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합니까?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분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과욕을 부리며 살더니,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사실 사울 왕에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현실적인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사울은 아직까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황이 지금 불리하긴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전보다 불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의 과거 행적을 살펴 본다면 이 정도 상황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음식조차 끊어버리고 이렇게까지 절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까지 절망했을까요?결국 답은 사울왕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만을 뛰어난 존재로 여기고,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나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곳에서도 도움을 기대하거나 요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에 쓰러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성도가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교만하게 되면 사울처럼 왕임에도 일반 백성보다 못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스스로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만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못하여 결국 파멸의 길로 갔던 사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 내 뜻, 내 마음대로 안 되어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안 되었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허락하시고, 정말 그러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겸손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최선이 기도라면 기도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사랑이라면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일이라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역사를 바꾸려 하지 말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이 우리에게 본보기와 거울이 되어, 우리 행동과 마음가짐에 영향을 끼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운에 맡기지 말고, 힘들고 어렵다고 점치는 자에게 묻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성도의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가는 길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Z7YZy4wvg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오늘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은 저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려운 일은 오지만 사울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님에 감동되어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미래가 밝은 성도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우리 갈 길을 밝히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을 따를 것이냐 이것은 우리 삶에 늘 주어지는 숙제와 같은 것이지요.
엔게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사울이 왜 왕자에서 쫓겨났는지를 드러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했고 사람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13~16절) 말씀에서는 다윗은 사울의 진영과 거리를 확보한 이후에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다윗이 자기를 부르고 있음에도 왕을 부른다고 착각했고 또 그가 다윗인지도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군대 장관으로서 아브넬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다윗도 아브넬이 사울을 수행하는 군대 장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명 아브넬은 용사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능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할 만한 자였습니다(15절)
그런데 그가 모시는 왕 사울을 지키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는 죽음으로서 책임을 져야 마땅한 큰 잘못이라고 다윗이 말했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용사였던 아브넬이라고 해도 사울을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유능하고 강하다고 해도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그 생명을 유지하고 승승장구했지만 사람을 의지했던 사울은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도 이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17~20절)까지 보면 아브넬과 달리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곧장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다윗이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엔게디 사건과 유사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헤아려 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야 옳겠지만 이것이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십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찾아 나선 것이므로 다윗이 지적한 대로 사울왕은 사람의 말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람들의 말을 따라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를 죽이려는 시도를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을 듣고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패망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1~25절)까지 보면 사울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다시는 그 생명을 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또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을 돌려주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생명을 다윗의 처분 아래 두셨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다윗 편에 서 계시기에 다윗은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겼듯 하나님도 자기 생명을 중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24절)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던 다윗은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 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야말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Wq47o1-mI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몇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현직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힘과 평판을 의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왕이 결코 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오늘 또 내가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될 그 뜻은 무엇인지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또 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 귀한 삶에 승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살아계신 우리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사람을 따르는 사울왕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사람이 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주님,저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사람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과 역할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또 기뻐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입으며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축복된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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