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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즈킨트의 단편소설집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에 한 젊고 촉망받는 여류 화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는데, 어느 한 평론가에게 당신의 작품은 훌륭하지만 깊이가 없다.”라는 비평을 듣습니다. 그 이후 이 평론가의 말이 실렸고, 사람들은 뒤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깊이가 없을까?” 고뇌하며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녀는 피나는 노력을 해 봅니다. 도대체 깊이가 무엇일까? 어디에서, 어떤 기준으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에 메달립니다. 그러다 결국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라고 결론을 내리죠. 자신이 깊이가 없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외출도 안 하고, 방문도 거부하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모든 것을 방치합니다. 한 때 유능한 젊은 예술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모든 그림을 찢어버리고 텔레비전 방송탑에 올라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단편집은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의 위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큰 배를 작은 키로 움직이게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도 그런 영향력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말보다는 비판적이고, 비평하는 말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부정적이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그 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관대한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인내할 줄 알게 되고, 격려의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높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5~6)에서 작은 불씨가 많은 것을 태우는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이요, 불처럼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8)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엄청난 파괴력과 자생력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스스로 제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복있는 혀를 갖고, 복있는 말을 하며 살 수 있을까요?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고 금방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영어를 배우고 써 먹고, 활용해야 잘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되게 말을 잘하고,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말에 절제를 하려면 자꾸 훈련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훈련받아야 할까요?
우선 야고보 사도는 (1)에서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이 있으므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무도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 뜻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행함없이 남만 가르치려고 하는 말선생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은 줄줄이 알고, 남을 잘 가르치면서 자신은 정작 말로만 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복된 말을 하고 살 수 있을까요?
(9~12)까지는 예수 믿고 나서도 한 입으로는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는 저주를 퍼붓는 자가 되지 말라!
그렇게 이중적인 말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온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이 없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럼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면 주님을 닮게 될 것이요, 주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처럼 말하게 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따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말을 하는데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기분나쁜 말이 들려왔을 때, 첫째,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먼저 확인해야 하고, 객관적인 사실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 아니라면 일부러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말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대부분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꼭 해주고 싶고, 콕 찔러서 가르치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곱씹어 보다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것이 사실이고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됩니다.
(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지존파 검거,1994년9월21일.


 예전에 끔찍한 살인 기계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존파 멤버중에 김기환 씨가 있었는데 그는 사형장으로 가기 위한 최후 법정 진술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습니다. 1977년 창 밖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던 한 겨울날 교실에서 크레파스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무시당하고 욕을 듣고, 따귀까지 맞고 벌을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은 크레파스를 살 형편도 아니었는데, 그런 모욕을 받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미웠고, 다 죽이고 싶었다.”고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한마디가 한 소년의 마음을 멍들게 해서, 결국 처참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 버린 것입니다.

루빈스타인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폴란드에 한 소년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소년은 노력해서 겨우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나 교수로부터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네 손가락은 너무 짧고 굵다. 유연성도 부족하다. 다른 악기를 배우도록 하라.” 그래서 다른 악기를 배워 보았으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만찬회장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연주가 끝난 뒤 한 노신사가 다가오더니 너는 피아노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 열심해 노력해 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노신사가  루빈스타인이라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소년을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그가 바로 피아노 천재로 불리는 잔 파라데우스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향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베드로 였지만 그는 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담긴 이 한 마디의 말에 감명받아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6FIw6_NlU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게서 오늘 할 말을 입에 담아주십시오. 대신 하지 말아야 할 때는 굳게 입술을 닫는 절제가 있게 하옵소서.






 

 

(찬 407)

 

살아볼수록 인생은 허무하죠. 과연 인생의 허무는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의미있는 인생이 살아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을 경외를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내용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물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찾으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3)을 해석하며,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뜻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중히 살피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자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에 극에 달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고 말씀하셨고,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16,1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 시대나, 이사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더 둔감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못하면 즉시 치셨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기에 더 죄를 가벼히 여기고, 더 만홀히 여깁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참된 경외와 경건의 자세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일까요?

본문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여기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앞에두고 하는 말도 천박하거나 경박하면 모독이 되는데,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죄요, 입술로 범죄하는 악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허물은 점점 늘어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랍시고 아무 말이나 막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하며, 인도하심을 구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하는 것보다, 자주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는 보배로운 향기와 같습니다.

(58)에 보세요.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8)에 보면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들과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외형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러 말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뱉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실수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말을 되도록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향연을 더 많이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얼마나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실수가 많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외적 경건을 기본으로 두고, 내적 경건함이 더해지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따라서 감정이나 기분으로 말하기 보다 믿음으로 말하고, 또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향기로운 향기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성령님, 할 말을 우리 생각과 입에 담아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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