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무엇을 따를 것이냐 이것은 우리 삶에 늘 주어지는 숙제와 같은 것이지요.
엔게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사울이 왜 왕자에서 쫓겨났는지를 드러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했고 사람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13~16절) 말씀에서는 다윗은 사울의 진영과 거리를 확보한 이후에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다윗이 자기를 부르고 있음에도 왕을 부른다고 착각했고 또 그가 다윗인지도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군대 장관으로서 아브넬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다윗도 아브넬이 사울을 수행하는 군대 장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명 아브넬은 용사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능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할 만한 자였습니다(15절)
그런데 그가 모시는 왕 사울을 지키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는 죽음으로서 책임을 져야 마땅한 큰 잘못이라고 다윗이 말했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용사였던 아브넬이라고 해도 사울을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유능하고 강하다고 해도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그 생명을 유지하고 승승장구했지만 사람을 의지했던 사울은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도 이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17~20절)까지 보면 아브넬과 달리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곧장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다윗이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엔게디 사건과 유사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헤아려 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야 옳겠지만 이것이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십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찾아 나선 것이므로 다윗이 지적한 대로 사울왕은 사람의 말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람들의 말을 따라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를 죽이려는 시도를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을 듣고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패망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1~25절)까지 보면 사울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다시는 그 생명을 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또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을 돌려주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생명을 다윗의 처분 아래 두셨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다윗 편에 서 계시기에 다윗은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겼듯 하나님도 자기 생명을 중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24절)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던 다윗은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 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야말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Wq47o1-mI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몇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현직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힘과 평판을 의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왕이 결코 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오늘 또 내가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될 그 뜻은 무엇인지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또 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 귀한 삶에 승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살아계신 우리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사람을 따르는 사울왕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사람이 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주님,저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사람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과 역할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또 기뻐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입으며 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축복된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50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한은 헛되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세워져 갔습니다. 그는 또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무리가 춤추며 다윗에 대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그들 앞에서 미친 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의 침을 흘렸습니다. 아기스는 자기에게 미치광이를 데려왔다 하며 신하들을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집안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는데 그 외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어느새 그들의 수장이 되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위로와 회복이 넘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모압 출신 증조모 룻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새에 있을 때 부모는 모압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최선을 다해 부모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요새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 수풀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다윗에게 도피 생활은 연단의 과정이었고 목적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과감하게 유다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도는 방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단의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Saul angry with David,Antoni Brodowski,1815

 반면에 사울의 모습을 보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셀나무 아래에서 손에 꼭 쥐고 있는 단창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울은 다윗이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며 신하들을 질책하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요.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눈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악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도액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견고한 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힘을 키워야 합니다.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악한 세력을 공동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뿌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서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메어 달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극심한 기근에 처하게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서 갔잖아요? 즉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와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오직 그의 아내인 나오미만이 겨우 살아서 모압에서 얻은 자부 룻만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돌아와서도 나오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궁극적인 기쁨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우리를 품으심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39, 40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란 때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데살로니가전서 33)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hvjJ4UsUc40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모든 일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선지자의 제안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반면에 사울은 불안함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도엑 같은 악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과 그렇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유연했지만 사울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담대한 성도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오늘 하루도 잘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오늘 이 하루도 넉넉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 446장)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 뜨림으로 전세는 완전히 이스라엘로 기울었고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블레셋을 향해 진격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승리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새로운 계획들을 내다보게 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겨 왕권을 확립했듯이 다윗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 권위를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이제 다윗의 대적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 사울로 바뀌기 시작하는데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본격적으로 사울과 다윗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누가 진정 하나님이 세우신 참 왕인가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50절부터 54절까지 보면요.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상징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칼이 대표적입니다.
분문은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고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겼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왕위를 상징할 칼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았음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쓰러뜨린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웠는데 이후 그 칼은 성소에 맡겨졌다가
다시 다윗에게 주어져 그의 왕권을 상징할 칼이 됩니다.

하나님은 전에 블레셋의 신 다원의 머리를 베셨듯이 이스라엘 왕 다윗은 블렛의 장수 골리앗의 머리를 배웠습니다.
사실 블레셋은 요나단에 의해서 얼마 전 큰 타격을 입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예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인 골리앗을 믿고 쳐들어온 것인데요.
그런데 믿었던 골리앗이 허망하게 한 방에 쓰러지자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몰아내고 많은 전리품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에게서 왕의 칼과 갑옷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갑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힘과 재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55절부터 58절의 내용은 사람에게 주목하는 가짜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는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신하나, 백성의 존중을 받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금식을 선포하기도 하고 불순종의 책임을 백성에게 돌리는 어리석음을 이미 드러냈습니다.
사울은 골리앗 앞에 나선 소년이 자기가 악령에 시달릴 때마다 가까운 곳에서 수금을 탔던 소년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을 처음 만나 수금 연주를 들었을 때는 마음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의 아들이라던지 그가 어느 고향 출신인지조차도 물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앞에 섰는데 이는 누가 더 강한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 앞에서 겸손히 자신이 ‘주의 종 이세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는데요.
만약 사울이 지혜로운 통치자였다면 요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다윗을 아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경쟁자로 여기며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은 자기 능력으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사울은 (창세기 49)에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난다고 하는 예언을 멸시했는데요.

유다 지파에 대해서 축복하기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오고 실로이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 왕위가 존속된다고 하는 예언을 사울은 무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고, 자기의 역할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세워질 때 그를 축복하고 왕의 권한을 위임하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자신의 왕위를 유다 지파가 아닌 자기 아들을 통해서 계승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마음은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하고 다윗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죽이려고 하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울처럼 늘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과 사명을 주셨으며 그 복과 사명은 정해진 때까지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자신의 현 상태와 받은 복과 사명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동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주신 복과 사명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붙들려서 쓰임받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과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실 때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마지막 때가 올 것이고 그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가야 할 테니까요. 지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복과 사명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위나 제사는 모두 본질이 아닌 외형이요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껍데기를 잃지 않으려고 본질인 목숨을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질에 집중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왕이 되었고 왕위에 집착한 사울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과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더 아름답게 유지하고 더 귀하게 쓰임받는 기회인 것을 잊지 맙시다 또한 더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인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사명을 선용하여 활용하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eL3zjBhq8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복과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복과 사명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때가 있고 옮기실 때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셨을 때 복과 사명을 잘 감당해낼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더 모든 것을 가져가시기 전에 주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고 활용하여 하나님 안에서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는 복된 성도로 또 사명자로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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